지난달 29일 열린 올해 첫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에서 일부 위원이 투자기업 가운데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문제를 일으킨 곳에 사외이사를 추천하자는 주주제안 안건을 발의했다. 위원회는 산하기구인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위)로 넘겨 검토키로 했다.
위원회는 국민연금기금 운용과 관련한 최고의사결정기구다. 보건복지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정부 당연직(기획재정부·농림축산식품부·산업통상자원부·고용노동부 차관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6명과 노사 각 3명, 지역가입자 대표 6명, 전문가 2명 등 모두 20명의 위원으로 구성한다.
노동자 대표와 일부 지역가입자 대표 등 7명이 이 안건을 발의했다. 내용은 중대재해가 잦은 대기업 2곳(포스코와 CJ대한통운)과 사모펀드 판매에 책임이 큰 금융지주 4곳(KB금융·우리금융·신한금융·하나금융), 이상한 합병으로 지배구조를 왜곡시킨 삼성물산을 포함한 7개 기업에 사외이사를 추천하자는 거다.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제정과 검찰의 사모펀드 수사, 국정농단 재판에서 널리 알려진 내용이라 국민적 관심을 살 만했다.
다음날 매일경제는 12면에 “참여연대 소속 위원 ‘산재 많은 기업에 사외이사 추천’”이란 제목의 기사를 썼다. 매경은 코로나19 때문에 위원장이 자가격리돼 불참한 가운데 올해 처음 열린 회의에서 “참여연대 추천 위원인 이찬진 변호사가 기습적으로 안건 상정을 시도해 논란”이라고 비판했다. 매경은 “기습 안건 상정 시도에 일부 위원은 크게 반발했다. 더욱이 포스코 등에 사외이사를 추천해야 한다는 건 민주노총과 참여연대 등의 주장과 같다”고 지적했다. 매경은 회의에 참석한 한 민간위원 입을 빌어 “위원장 부재 속에 일부 단체 주장을 정식 안건도 아닌 상황에서 기금위가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썼다.
안건은 국민연금법과 위원회 운영규정에 따라 전체 위원 20명 중 3분의 1 이상인 7명의 동의를 받아 발의됐다. 위원장이 불참하는 회의에선 안건을 발의하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회의 전에 규정과 절차를 지켜 발의했는데 ‘기습 상정’이라고 표현한 것도 과하다. 매경은 마치 이찬진 위원이 몹쓸 짓이라도 한 듯 몰아붙였다.
위원회는 이 안건을 수탁위에서 검토하기로 했다. 수탁위는 발의 취지와 책임투자 현황, 절차 등을 검토한 뒤 위원회에 다시 상정한다. 다음 위원회는 주총 시즌 직전인 이달 하순에 열린다.
발의한 안건에서 언급된 기업들이 워낙 굵직해 위원회가 의결하면 주총 때 뜨거운 감자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현행 위원회 구성을 보면 의결하긴 쉽지 않다. 몸부터 사리고 보는 정부 측 당연직 위원이 6명이나 되고, 지역 가입자대표 6명 중에서도 농협과 수협처럼 정부 입김이 작용하는 단체가 있다. 한국경총과 대한상의·중소기업중앙회 같은 사용자 대표는 당연히 반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2018년 도입한 스튜어드십 코드 취지를 놓고 볼 때 이런 안건이야말로 꼭 필요하다.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스튜어드)처럼, 국민의 노후 재산을 관리하는 국민연금이 기관투자자로 투자기업의 도덕적 해이에 개입하라는 게 도입 취지다. 무턱대고 비난만 할 일이 아니다.
2019년 초 한진그룹 오너 일가 퇴출 여부를 놓고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마에 올랐지만 칼집만 만지작거리다 끝났다. 적극적 주주 활동이란 당초 취지는 용두사미가 됐다.
재계는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경영권을 위협한다고 울상이지만, 2019년 1~9월 국민연금이 주총 안건에 반대표를 던진 622건 중 부결된 건 21건에 불과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대기업 대주주의 중대한 탈법·위법에 국민연금이 보유 지분을 활용해 주주권을 적극 행사한다는 취지였다. 도입 취지대로 해야 그나마 주주 민주주의가 바로 선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