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부산에 가면 부마항쟁 20주년을 기념해 건립한 부산민주공원(1999년 건립)이 있다. 공원 안에는 소해(宵海) 장건상(張建相)의 동상이 있다. 동상은 1991년 세워졌으며, 매년 임시정부수립일인 4월13일이 되면 동상 건립을 주도한 광복회 부산지부를 중심으로 참배행사를 한다.
 

국가보훈처
국가보훈처

장건상은 1882년 12월19일 경북 칠곡에서 태어나 이듬해 부산 좌천동으로 이사했다. 좌천동에서 그는 한문과 신학문을 동시에 배우며 성장했다. 19세 때 초량 출신 이찬성과 결혼해 1남2녀를 두었다. 자식들도 그의 삶처럼 불운했다. 아들 지갑은 고국을 그리워하다가 1967년 일본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딸 수원은 잃어버렸다. 남경에서 금릉대학을 다닌 둘째 딸 수양만이 장건상 곁에 있었으며, 독립 후 조국 통일의 길에 나선 부친을 보필했다. 현재는 손자 장상진이 장건상의 유족으로 남아 있다.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

결혼 후 장건상은 영국 선교사 엔젤의 주선으로 당시 부산에 세워진 장로교 영어 강습소에 들어가 1년간 영어공부를 하면서 조선이 처한 현실에 눈을 뜨게 됐다. 1903년 그는 부모의 만류에도 상경해 인동 장씨 집안 인물인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의 소개로 관립한성영어학교에 입학해 1년간 다녔다. 당시 연동교회 담임목사였던 제임스 게일과도 연을 맺고 영어를 배웠다. 게일 목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영한사전을 만든 인물이다. 이승만이 미국 유학을 할 수 있도록 추천한 이도 게일 목사다.

1905년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한 일제가 조선 병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 시기 장건상은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조선의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대범하게도 일본 해군병학교에 지원서를 냈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하고 대신 와세다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의 도움으로 주일본 미국공사관 무관 이스트레이크의 집에서 류동열을 비롯한 조선인 유학생 50여명과 기초군사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일제는 군사교육을 중지시켰고, 이 일로 그는 퇴학을 당하게 된다. 더 이상 일본에 머물기 어렵게 된 그는 1907년 귀국한다.

장건상이 일본으로 떠나 있는 동안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된 을사늑약이 맺어졌으며, 조선의 국권이 일제로 넘어가고 있었다. 귀국해 부산에 머물고 있던 그는 더 이상 편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한성으로 올라온 그는 게일 목사를 찾아가 미국 유학을 의논했다. 1908년 3월 그는 지참금 200원과 게일 목사의 추천서를 들고 미국으로 가기로 했다. 그는 태평양 바다를 건너는 동쪽행이 아닌 러시아와 유럽을 거쳐 가는 서쪽행을 택했다. 미국으로 가는 그 길에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한인거류민단장 유성춘과 의병대장 유인석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친분을 쌓았다. 더불어 서양 각국의 문물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시베리아와 유럽 그리고 대서양을 횡단해 미국에 도착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1908년 6월, 3개월의 모험에 가까운 여정을 끝내고 미국에 도착했으나, 여권이 없던 탓에 미국 이민관리국에 의해 추방당할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이상설의 도움으로 추방은 면할 수 있었다. 그는 게일 목사의 추천서를 들고 인디애나주에 있는 발프레이조대학 법학과에 입학을 청했다. 1912년 4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30세가 됐다. 청년 시절 일본해군학교에 입학하려 했던 열혈청년은 그간의 학업을 통해 문무를 겸비한 민족의 지도자로 성장해 있었다. 그의 실력을 높이 산 안창호는 1913년 결성되는 흥사단에서 같이 활동하자고 권유했다. 하지만 조선은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를 당한 상황이었다.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에 따라 이역만리에서 조선의 국권을 되찾는다는 것은 젊은 장건상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중국 상해에 머물던 신규식에게 연락이 왔다.

동제사와 임시정부 참여

동제사는 1912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건국되자, 이를 본받아 일제에 빼앗기 조선의 국권을 되찾아 공화주의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단체였다. 신규식을 비롯한 김규식·이범석·민제호·이극로 등 조선의 신진세력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동제사 활동에 참여해 달라는 연락을 받은 장건상은 기다렸다는 듯이 상해로 건너갔다. 이 시기 김두봉과 김원봉을 만나 친분을 쌓는다.

1919년 3·1 운동은 1차 세계대전 전후처리 문제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려는 배경하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인 대표로 참석한 이가 동제사 회원이자 신한청년당 당원인 김규식이었다. 하지만 일제의 집요한 방해로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전 민족적인 항일운동으로 번진 3·1 운동을 계기로 그해 4월10일 상해로 몰려든 1천여명의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운다.

당시 장건상은 상해에 머물며 임정이 수립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는 임정의 외무부 위원으로 선출됐다. 외무부 총장에 선출된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고 있었으므로 그가 실질적인 외무부 총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임정은 무장투쟁론을 주장한 그의 기대와 다르게 흘러갔다. 결성 1년 만에 임정은 분열했다.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세계사의 일대 변혁이었다. 독립을 바라던 조선인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장건상은 1921년 5월 개최된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참석해 중앙위원 7명 중 한사람으로 선출된다. 고려공산당은 1918년 이동휘가 중심이 돼 결성된 조선의 최초의 공산당인 한인사회당의 후신이다. 1921년 3월, 제3인터네셔널 3차 대회에 참석해 레닌과 만나 조선독립 지원을 약속받는다.

분열한 임정은 일개 독립운동단체로 전락했지만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미국에 조선의 위임통치를 제안한 사실이 밝혀지자, 이승만 불신임운동이 전개되면서 임정 참가세력의 재결집을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제안된다.

1923년 1월3일에 개막된 국민대표회의에는 국내외 135개 독립운동단체들 참여했다. 제2 임정 건설작업이었다. 같은해 3월 개최된 본회의에서는 창조파와 개조파가 대립했는데 그는 창조파에 속해 있었다. 6월까지 개최된 회의에서 단일한 의견이 나오지 않았자 창조파는 북경에 모여 원세훈·신숙 등이 중심이 돼 국호를 ‘韓’으로 하는 국민위원회라는 독자적인 정부를 조직했는데, 이때 장건상은 외무총장으로 선출됐다.

의열단의 배후

의열단은 임정이 혼란을 겪고 있던 1919년 11월9일 만주 길림성에서 결성된다. 1921년 3월5일자 동아일보에는 “임정외무차관 장건상이 안동현 영국사람 ‘뽀인’을 통해 소포로 탄피 화학약품 등을 국내로 보내 이를 수령하여…”라는 기사가 나온다. 이 기사는 1920년 3월 일어난 ‘밀양진영 폭탄 반입사건’ 관련자 곽재기·이성우 등 12명의 재판 결과를 보도한 기사다. 한때 일제 경찰들은 장건상을 단장 김원봉의 윗선인 의열단 총장으로 파악하기도 했다. 실제 1920년대 벌어진 김시현·장지호·이현준·구여순 등 의열단원들의 구국투쟁 후 사건 전모를 밝히는 신문기사들에 이들의 배후로 장건상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그는 의열단원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군사훈련과 폭탄제조법을 가르쳤으며, 단원들이 폭탄과 총기를 구입하거나 거사를 위한 국내 반입을 지원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1937년 4월17일 장건상은 김원봉·지청천·윤기섭·신익희·윤세위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에서 활동하던 중 일제 형사에게 검거됐다. 상해 일본영사관에서 6개월간 구금돼 있는 동안 동지들은 외교적인 수단을 포함해 그를 석방시키려 노력했으나, 결국 국내로 압송되고 만다. 다행히 1년 동안 재판을 받다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된다. 구속 중 모진 고문을 당한 그였지만, 독립운동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부산 본가에서 몸을 추스르던 그는 1941년 12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부산을 떠나 중경으로 가 다시 민족혁명당과 임정에 참여한다. 1942년 임정 국무위원이 되었으며, 1943년 4월에는 환갑의 나이에 임정 학무부장으로 선출됐다.

해방 이후 좌우합작과 통일 위해 매진

1945년 12월1일 임정 2진으로 환국했는데, 그의 나이 63세 때였다. 그는 임정 국무위원으로 귀국했으나, 고려공산당에서 같이 활동하였던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부위원장을 맡는다. 당시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을 건설했지만, 한반도 38선 이남의 새로운 권력자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해체된 상황이었다. 여운형은 근로인민당을 만들어 남북·좌우 합작운동을 하던 중 1947년 7월 암살당하고 만다. 장건상은 여운형이 떠난 뒤에도 근로인민당을 이끌며 여운형이 못다 한 일을 이어 가려 애쓰고 있었다.

1948년 4월 그는 근로인민당 위원장대리 자격으로 평양에서 열린 전 조선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남쪽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제헌의회 출마를 거부했던 그는 1950년 5월 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상태에서 옥중 당선되기도 한다. 그는 이후에도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의 진보당에도 관여했으며, 1957년에는 민주혁신당 결당을 통해 혁신세력의 결집을 꾀했으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박정호 간첩사건, 근로인민당 재건사건 등에 피의자로 조사를 받았다.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4·19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정치 일선을 떠나 있게 된다.

4·19 혁명이후 사회대중당창당준비위원회 혁신당 등을 통해 정계진출을 다시 시도하지만 5·16 쿠데타로 이루지 못한다. 이후 혁명재판소에서 5년형을 받았으나, 79세의 고령이란 점이 고려돼 형집행정지로 출감했다. 출옥 후에는 딸 수양의 보필을 받으며 후학들과 지내다 1974년 5월14일, 91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했다.
 

▲ 이창훈 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 이창훈 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그는 생전에 국가가 주는 건국훈장을 거부했으며, 사후인 1986년에 가서야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그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신세계 공원묘지에 안장됐다가 이장해 현재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