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다. 으레 그렇듯 연말이 되면 한 해를 되돌아보게 된다. 저물어 가는 2020년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게 특별한, 창립 20주년이 되는 해다. 불행히도 코로나19 때문에 계획했던 행사와 사업을 대부분 내년으로 미뤄야 했다. 그러나 지난 20년을 되돌아보고 향후 20년을 준비하는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오랜 시간의 무게를 말과 글로 풀어내 정리하고, 엄혹한 현실 속에서 비정규 노동자와 함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것은 너무나도 버거운 과제다. 그럼에도 외면할 수 없는 의무이기도 하다.
20년,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한 시간이다. 수많은 활동가의 헌신, 회원들의 꾸준한 성원이 있었기에 센터가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물론 마냥 뿌듯해 할 수만은 없다. 20년 동안 나름 분투했지만, 비정규노동 문제는 여전히 산적해 있다. 비정규 노동자의 노조조직률은 2.5% 정도에 불과하다. 매년 2천여명의 노동자가 일터에서 목숨을 잃고 있다. 비정규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갑질은 만연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유형의 비정규노동이 양산되고 있으며, 법과 제도는 빠르게 변하는 현실을 쫓아가기 바쁘다. 센터에게는 뼈아픈 성찰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노동기본권 사각지대에 있던 노동자들이 드러났다. 이들은 코로나19 전에도 힘들었고, 코로나19로 인해 더 힘들어졌다. 그리고 코로나19가 종식해도 여전히 힘들 것 같다. 우리는 너무나도 오만했다. 노동에 멋대로 가치를 매겨 위계를 나눴다. 위기가 닥쳐서야,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노동의 가격이 터무니없이 낮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노력과 능력도 좋지만, 그것이 한 개인의 온전한 결과물이 아니라 우연과 공동체의 덕을 상당 부분 봤다는 걸 몰랐다. 혹은 애써 모른 척했다. 정부도, 국회도, 언론도, 시민사회도 그간 노동기본권 사각지대를 제대로 조명하지 못했다. 코로나19라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에 그 역할을 내줬다. 충분히 부끄러워 해도 된다.
센터는 노동기본권 사각지대 해소를 목표로 다시 출발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노동기본권 사각지대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비정규노동이기 때문이다.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 헌법 32조3항이다. 그런데 근로기준법과 노동관계법, 그리고 그 법들이 적용되는 현실은 헌법이 이야기하는 ‘인간’을 매우 협소하게 해석하고 있다. 자신의 사용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간접고용 노동자가 허다하다. 평소에 이것저것 지시·관리하던 진짜 사장은 문제가 생기면 하청업체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인사업자로 불리고 있다. 그 결과, 근로기준법과 노동관계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고, 산재보험·고용보험 같은 사회적 안전망에서 배제된다. 단지 5명 미만 사업장에서 노동한다는 이유로 근로기준법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노동자도 많다.
노동기본권은 말 그대로 기본권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기본권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다. 즉 노동기본권은 원하는 종교와 신념을 믿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자유롭게 이동하고,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향유하고, 사유재산을 보장받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전체 노동자 중 비정규 노동자가 절반 가까이 된다. 당연하게 누려야 할 권리를 절반에 가까운 노동자가 누리지 못한다는 말이다. 기본권이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우리의 비참한 노동 현실은 노동기본권보다 ‘노동특수권’이라는 단어가 더 잘 설명해 줄 듯하다.
그렇다면 노동기본권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센터는 향후 20년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올 한해 고용보험 사각지대를 알리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 왔다.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없는 법적 사각지대와,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으나 가입하지 않은 실질적 사각지대를 해소해 전 국민 고용보험에 다가가기 위함이었다. (전체 취업자 약 2천700만명의 45.2%가 고용보험 사각지대다.) 이 외에도 해야 할 일들이 많다. 고용보험 사각지대 문제는 노동기본권 사각지대 문제의 일부일 뿐이다. 노동기본권 사각지대의 노동실태를 직종별로 상세히 파악하고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정책과 현장을 연계해 연대·조직화 지원을 함께하는 것도 물론이다. 센터 홀로 하기는 힘들다. 여러 노동·사회단체와 머리를 맞대야 한다. 구체적인 실행 방안도 필요하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센터의 치열했던 지난 20년을 거울삼아 차근차근 준비한다면, 노동기본권 사각지대 해소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ilecdw@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