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9월15~20일 ‘브라질 대통령선거 민주노동당-민주노총 합동 연수’ 중 상파울루 중심가에서 노동자당(PT) 선거운동에 참가한 연수단 일동. 뒷줄 왼쪽에서 가운데 인물이 키엘 야콥센이다.

우리나라에는 ‘브라질 민주노총’으로 알려진 통일노동자중심(CUT) 국제비서를 지낸 키엘 야콥센(Kjeld Jakobsen)이 지난 5일 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덴마크에서 태어나 브라질로 이주한 야콥센은 1983년 출범한 CUT 활동에 관여했다. CUT는 노동자당(PT)과 더불어 1964년부터 1985년까지 이어진 군사독재를 끝장 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덴마크 출신이라 조직 안에서 ‘바이킹’이라 불린 야콥센이 한국을 처음 방문한 때는 그가 CUT 국제비서로 있던 1995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주노총 출범식을 계기로 한국 민주노총과 브라질 CUT, 그리고 남아프리카노동조합회의(COSATU, 코사투)가 참여한 3국 연대 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국제화학에너지광산노련(ICEM)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국제노동운동가 피정선이 아시아와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새롭게 떠오르던 세 나라 화학산업 노동조합의 국제연대가 필요하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고, 이를 독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이 후원하면서 화학노조 연대에 더해 노총 연대를 추가해 회의가 성사됐다. 당시 민주노총 국제국은 전노협 때부터 국제 업무를 챙겨 온 신은철이 이끌었고, 피정선과 협력하에 성실하고 신의 있는 활동으로 국제 노동계의 관심과 성원을 받고 있었다.

야콥센과 필자가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은 2002년 무렵이다. 당시 필자는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월간 <노동사회> 편집국장으로 상근하면서 민주노동당 국제담당으로 있었다. 2002년은 브라질과 한국 두 나라 진보정당에 중요한 해였다. 브라질에서는 10월, 한국에서는 12월 대통령선거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브라질에서는 노동자당의 룰라가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컸고, 권영길 대표가 후보로 나설 참이었던 민주노동당에 그해 대선은 2004년 국회의원 총선거로 나아가는 교두보였다.

2002년 봄,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브라질 선거 연수를 조직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세부 계획은 노회찬 당시 사무총장과 상의했다. “연수 기간은 대선 캠페인이 한창일 9월 중 일주일로 하되, 비행깃값은 민주노동당과 연수 참가자가 함께 부담하고 현지 체류 비용은 브라질쪽에서 대도록 했다. 연수단은 노동자 정치세력화 원칙에 입각해 민주노동당 활동가와 민주노총 간부를 중심으로 꾸린다”는 사업 방향이 정해졌다. 그런데 브라질 노동자당과의 교신은 6월 말까지 진척이 없었다.

민주노동당 연수단 파견을 환영한다는 답신을 받은 이후 구체적인 연수 계획을 논의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가던 7월, 필자는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가맹조직으로 있던 국제노동자교육협회(IFWEA) 회의 참석차 영국 맨체스터를 방문했다가 거기서 야콥센과 예상치 못한 만남을 갖게 됐다. 연수 준비의 어려움을 전해 들은 그는 노동자당 대신 CUT가 브라질쪽 준비 주체를 맡는 게 낫겠다며 조직과 상의하겠다는 답변을 줬다. 이후 연수 준비는 빠르게 진행됐고, CUT의 지원을 받아 9월 ‘브라질 대통령선거 민주노동당-민주노총 공동 연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CUT 위원장 직무대행, 페르세 아브라모 재단 이사, 상파울루시 정부 국제관계 비서로 활약한 야콥센은 국제자유노련(ICFTU) 사무차장에 도전하지만 미국의 반발로 무산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2017년과 2018년 서울시가 국제노동기구(ILO)와 공동 주최한 ‘좋은 일자리 도시 포럼’에 초청받아 방한했을 때 맥주잔을 기울인 게 그와의 마지막 추억이 됐다. 서로 못 본 사이 상파울루시립대학 국제관계학 석사가 됐고, 같은 주제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며 환히 웃던 얼굴이 기억에 또렷하다.

남아공 코사투는 키엘 야콥센을 추모하며 “흔들림 없던 진정한 동지를 노동조합운동이 잃어버렸다”는 성명을 냈다. 필자도 한마디 보태려 한다. 알루타 콘치누아(A luta continua). 투쟁은 계속된다는 브라질 말이다.

윤효원 객원기자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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