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지선 변호사(법률사무소 마중)

업무상재해에 관한 소송은 근로복지공단의 처분을 다투는 행정소송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사업주나 가해자를 상대방으로 하는 민사소송, 업무상과실치사상이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의 형사소송도 있다. 사업주의 불법행위나 채무불이행을 다투는 민사소송도 가능하고 실제 소송도 적지 않지만, 변호사 입장에서 권하지 못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을 판례 법리로 보완한 타이완 대법원의 판결을 소개하려 한다.

원칙적으로 모든 업무상재해 소송에서 증명책임을 원고인 재해를 당한 노동자 또는 유족이 진다. 고의 또는 과실을 따지지 않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상 업무상재해 인정과는 달리, 민사소송에서는 사용자 또는 가해자의 고의 또는 과실을 증명해야 한다. 이러한 증명책임 분배의 원칙은 동등한 힘을 가지고 있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재해를 당한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정보력과 경제력의 차이, 노동자의 사용자에 대한 종속성 등을 고려하면 현재의 증명책임 분배는 최소한 완화돼야 한다. 이러한 원칙적이고도 실질적인 문제 외에도 현재의 증명책임 분배는 사업주가 노동자의 업무환경에 관한 자료를 애초에 구비하지 않거나 폐기·은폐할수록 관련 분쟁에서 유리해진다는 점에서 직업병 예방 측면에서도 악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노동자의 직업병 증명을 위해 필요한 자료들을 영업비밀이라 주장하며 자료 제출을 거부하는 경우도 다수다.

첫 번째로 타이완 대법원의 RCA 판결의 가장 큰 의미는 대법원이 화학물질 노출로 인한 대규모 직업병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유해물질(의 존재), 불법행위, 그런 행위들의 과정, 피해양상 등에 관해 그 불법행위들과 자신이 입은 피해 사이의 관계를 합리적인 수준의 확률이 존재한다는 수준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경우 피해자의 입증책임이 충족됐다고 본 점에 있다. 타이완 대법원은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받으려면, 그런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음을 피고가 증명하도록 했다.

두 번째로 타이완 대법원은 RCA 판결에서 소멸시효에 대한 회사쪽 주장을 권리남용이라 봐 소멸시효 항변을 배척했다. 원고쪽은 ① 작업장에서 사용된 화학물질과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노출과 관련된 모든 증거들은 RCA와 그 모회사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② 만성적 화학물질 노출로 인한 신체적 피해의 특징은 역학 및 다른 과학 분야의 적절한 연구 없이는 그 인과성을 판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개별 노동자가 증명책임을 충족시키기 대단히 어려우므로 이들이 다른 불법행위 사건들처럼 제때 소송권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이 노동자들을 “권리 위에 잠자는 자”로 봐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대법원은 사업주의 자료제출 거부 등을 고려해 사업주의 소멸시효 주장을 권리남용이라 판단했다.

많은 업무상질병이 잠복기를 가지는 점, 노동자가 자신의 질병이 특정 물질 혹은 업무 때문임을 아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는 점, 새로운 질병의 경우 그 의학적 인과관계를 밝히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업무상질병 소멸시효 항변에 대한 타이완 대법원의 판결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 번째로, 법인격부인론에 따라 피해 노동자들에 대한 RCA 모회사들의 책임이 인정됐다. 업무상재해 소송에서 법인격부인론이 적용된 사례는 필자가 아는 범위 안에서는 없다. 발주처와 원청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음에도 실제 그 책임을 묻는 방법은 요원한 상황에서 타이완 대법원의 이 판결은 새로운 자극을 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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