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청계천 헌책방에서 근로기준법을 산 전태일은 한자투성이인 법전을 각고의 노력으로 독파했다. 근로기준법을 완독한 전태일은 모든 게 불법인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을 알리려 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 어린 여공이 피를 토하고, 도시락만 열면 금세 먼지가 쌓이는 노동환경을 조사해 고용노동부(당시 노동청)에 찾아가 진정서를 넣었다. 거기서 문전박대를 당하다시피 한 전태일은 기자들을 찾았다. 기자들도 마침 국감 앞이라 반색하고 기사를 써 줬다. 전태일과 삼동회의 실태조사는 70년 10월6일자 매일경제 7면에 ‘저임금에 직업병까지’라는 3단 제목으로 실렸다. ‘평화시장 피복 여공들 개선 호소’라는 작은 제목과 함께. 전태일이 쓴 진정서에 근거한 매일경제 기사는 아래와 같은 요지다.

“평화시장엔 700여 의류업체에서 2만명의 노동자가 하루 12시간 이상 중노동에도 저임금에, 수당도 없이 휴일 강제근무까지 시달렸다. 환기도 안 되는 작업장에서 어린 여공들이 안질과 폐결핵 등 직업병까지 앓았다. 15살가량의 어린 여공(시다) 1만여명은 이렇게 일하고도 한 달에 고작 3천~3천500원을 받았다. 업주는 하지도 않은 건강진단을 했다고 서류를 조작했다. 1년에 한 번 다녀가는 근로감독관에게 말해도 어떤 것도 개선되지 않았다.” 다음날인 10월7일엔 경향신문과 동아일보·조선일보도 보도했다.

노동청은 기자들에게 “평화시장 실태를 파악해 법 위반이 있으면 의법조치하겠다”고 했지만, 국감이 끝나자 노동청 약속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절망했지만 전태일은 다시 집회를 준비했다. 10월 하순에 준비한 집회마저 경찰의 농간으로 실패하자 전태일은 다시 절망했다. 그래도 전태일은 2차 집회를 준비했다.

얼마 전 ‘전태일 50’ 신문 발행 소식을 전하면서 미디어오늘은 관계자 말대로 70년 10월 경향신문만 유일하게 전태일이 알린 평화시장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보도했다고 썼다가 하루 뒤 바로잡았다. 우리 안에 잘못된 신화는 수없이 많다. 그나마 미디어오늘은 실수를 알고 곧 바로잡았다.

당시 전태일은 전천후 활동가였다. 노동법을 뒤져 법 위반을 찾아내 노동청에 진정서를 넣고, 일일이 찾아다니며 실태조사를 하고, 노동자를 모아 집회를 조직했다. 11월13일은 무산된 집회를 다시 여는 날이었다. 몇몇 기자는 현장에 나오기도 했다. 업체 사장과 경찰은 노동자가 집회 장소로 못 가게 윽박지르고 집회 장소를 봉쇄했다. 전태일은 마지막 선택을 해야 했다.

전태일의 수많은 활동은 11월13일 뒤에도 이어졌다. 11월25일 서울시청 앞에 있는 조선호텔 노동자 이삼찬(30)씨가 호텔 로비에서 분신을 기도했다. 함께 노조결성을 준비했던 분회장 예정자가 행방불명되자 분노한 이씨가 사측에 항의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노조결성이 불발된 조선호텔 노동자들은 71년 2월6일 호텔 로비에서 연좌시위를 했다. 그보다 나흘 전엔 인근 북창동의 대형 음식점 한국회관 노동자 김차호(20)씨도 분신을 기도했다. 김씨는 “전태일의 뜻을 따라 요식업 근로조건을 죽음으로 알리겠다”고 했다.

70년 12월23일엔 월성섬유 노동자들이 노조결성 농성을 했고, 71년 2월15일엔 서울 구로공단에서 아이맥전자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었다. 일주일 뒤 2월23일엔 한일나일론에서도 노조가 만들어졌다.

전태일의 위대함은 분신이라는 극단적 선택 한순간으로만 국한할 수 없다. 극적인 강렬함만 강조하다 보면 엉뚱한 신화를 만들기 십상이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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