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대 대법원장이었던 가인과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 청산을 비롯한 문제 등에서 사사건건 충돌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연설에서 사법부를 비난하자 “억울하면 항소하쇼!”라고 일갈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서울시 도봉구에는 항일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를 기념하는 길이 있다. 이름하여 ‘가인 김병로 길’. 가인의 고택이 있던 곳이라 이를 기리는 의미라고 한다. 가인(街人)이란 문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거리의 사람’이다. 다시 말해 ‘나라를 잃고 거리를 떠도는 사람’이란 뜻이다. 김병로가 스스로 붙인 호라고 한다. 해방은 됐으나 이번에는 나라가 분열됐으니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에 그대로 호를 썼다. 그는 1887년 음력 12월15일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되던 1894년 인근의 고부에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이 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듬해에는 아버지까지 여의는 슬픔을 겪게 된다. 동학농민전쟁과 집안 어른들의 죽음이 어린 가인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청년의병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우연히 목포항에 정박해 있던 일본 군함을 보고 ‘우리의 전통에 뿌리를 두되 발달된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된 가인은 친구들과 일신학교(日新學校)를 만들어 신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분연히 서책을 접고 면암 최익현이 일으킨 의병운동에 뛰어들었다. 최익현의 의병부대가 해산한 다음에도 새로운 의병투쟁을 계획하고, 순창의 일본 관청을 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의 가혹한 ‘호남대토벌 작전’으로 의병투쟁을 접고 애국계몽운동·자강운동으로 눈길을 돌려 창흥의숙 고등과 속성과정에 등록·졸업했다. 더 큰 공부를 위해 1910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가인은 일본대학 전문부 법과 청강생이 됐다. 이때 도쿄에서 김성수·송진우·장덕수 등과 함께 유학생활을 했고, 이런 교우관계가 이후 그의 정치행보에 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술국치’라는 비보를 듣게 된 그는 충격과 건강 등의 이유로 귀국하고 만다. 건강을 회복한 그는 1911년 두 번째 유학길에 나서 명치대학 법과에 편입한 후 재동경조선인유학생학우회에도 참여한다. 명치대학을 졸업한 그는 훗날 2·8독립운동의 주축이 된 재동경조선인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의 창간호부터 편집자로 활동했다. 한편, 일본 변호사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서류를 제출했으나 “일본인 외에는 현행 변호사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없다”는 내각회의 결정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는 왜 변호사가 되려고 했을까. 훗날 가인은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변호사가 되면 아무리 일본경찰이라도 변호사를 쉽게 폭행하거나 구금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둘째 변호사 수입을 사회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쓸 수 있고, 셋째 공개법정에서라도 정치투쟁을 전개할 수 있으며 인권옹호와 사회방위를 위한 사업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항일변론과 좌우합작 운동

귀국 후 1919년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원에서 잠시 판사를 하기도 했으나 1년 만에 사임하고 서대문 자택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이때부터 가인의 ‘항일변론’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가 수임한 대표적인 독립운동 관련 사건으로는 1921년 보합단(普合團) 사건, 1923년 2차 의열단 사건, 1926년 6·10만세 사건, 1927년 1차 조선공산당 사건, 고려혁명당 사건, 정의부 사건, 1928년 1차 간도공산당 사건, 1929년 대구학생비밀결사 사건, 통의부 사건, 1930년 광주학생독립운동, 3차 조선공산당 사건, 1931년 3차 간도공산당 사건 등이 있고, 안재홍과 안창호 선생의 변호도 맡았다. 또 1928년 전라북도 옥구 농민들의 소작쟁의와 1929년 원산 부두노동자들과 형평사 조합원들의 파업투쟁, 경남 진주노동조합 사건 등 노동자와 농민들의 권익에도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함께 했다. 이처럼 일일이 나열하기도 숨이 가쁠 만큼 가인의 항일변론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가리지 않았고, 조선 팔도 어디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신의 연장선에서 그는 1927년 2월 ‘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을 표방한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했고, 이듬해에는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조선민족의 정치적·경제적 해방, 전 민족의 현실적 공동이익을 위한 투쟁, 모든 기회주의의 부인 등을 정강정책으로 출발한 신간회는 1930년 전국 140여개 지회와 3만9천명의 회원을 확보하며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내부 분열을 극복하지 못하고 1931년 5월 발족 4년 만에 해산하고 말았다. 어떤 형태와 수준의 운동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외적 환경이 아니라 내적 요인, 즉 단결과 신뢰라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신간회 운동이다.

“억울하면 항소하쇼!”

1945년 해방이 되자 가인은 건국운동에 적극 나서게 된다. 그러나 가인은 일제 강점기 활동과 노선에 비춰 이해하기 힘든 행보를 보인다.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하지 않은 점과 친일파들이 만든 한민당의 창당에 깊이 개입하고 중책을 맡은 것이다. 물론 가인은 건준을 방문해 좌우합작을 제의하기도 했고, 미군정이 건준을 비난하자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좌우세력이 분열된 해방정국과 미군정 치하에서 어느 것이 올바른 통일독립 노선이었는지 모를 리 없었을 가인이었을 터인데…. 가인과 <동아일보>와의 관계, 보성전문학교와의 관계 등으로 볼 때 해방 직후 가인이 택한 정치행보는 인촌 김성수와의 관계 때문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 아무튼 ‘단정단선 반대 투쟁’과 제주 4·3항쟁 같은 회오리를 겪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대법원장이 된 가인은 사사건건 이승만과 충돌하게 된다. 문제의 발단은 친일파 청산에 대한 입장의 차이 때문이었다. 이승만이 친일파를 재등용하고, 친일파들이 살아남기 위해 만든 한민당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반민특위가 만들어지자 가인은 재판부장을 맡았다. 이승만은 반민특위법을 개정해 공소시효를 단축하려 했고, 가인은 당연히 이에 반대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친일경찰을 동원해 반민특위를 해산시켰다. 가인은 이 사건을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규정하고 “법에 비춰 추호도 용서 없이 판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승만이 노발대발한 것은 불문가지. 뿐만 아니라 국회 프락치 사건, 윤재구 의원 횡령 사건 재판을 놓고도 가인은 이승만의 전횡에 맞섰다. 1956년에는 이승만이 국회 연설을 통해 “우리나라 법관들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권리를 행사한다”며 사법부를 정면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가인은 이렇게 맞받아쳤다. “억울하면 항소하쇼!” 4·19혁명이 일어나자 가인은 비상대책위원회 지도위원으로서 과도정부의 개편과 부정선거 관련자, 부정축재자 처벌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1961년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일으키자 민정참여 반대와 군정 종식을 촉구하기도 했다. 가인은 박정희의 공화당에 맞선 ‘야권통합’ 운동을 벌였으나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건강도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악화돼 민정당과 국민의당 대표최고위원직에서 물러나며 사실상 정계를 은퇴하게 된다. 청렴한 법률가의 대명사, 민족지사, 민주헌정의 수호자, 반민특위 재판부장, 초대 대법원장…. 가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항일변론, 신간회 운동, 광주학생운동, 해방 후 토지개혁과 좌우합작, 친일청산과 반민특위 등 시대적 과제, 민족적 과제 해결에 적극 앞장섰던 그이기에 당연한 일일 것이다.

지공무사(至公無私)의 좌우명을 되새기며

▲ 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가인이 늘 강조하던 좌우명은 지공무사(至公無私)였다. 개인의 이익을 버리고 공동체의 이익에 헌신하라는 뜻이다. “정의를 위해 굶어 죽는 것이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수만 배 명예롭다. 법관은 최후까지 오직 ‘정의의 변호사’가 돼야 한다.” 1957년 가인이 대법원장 퇴임식에서 남긴 이임사의 한 구절이다. ‘공정’이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오늘, 모두가 한번쯤은 되새겨야 할 경구가 아닌가 생각된다. 가인 김병로,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가인의 손자인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다.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아버지인 가인의 슬하에서 자랐다고 한다. 김종인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시작해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 요직을 차지했고,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좋게 말하면 한평생 노른자위 땅만 밟으며 출세가도를 달려 왔다고 할 수 있고, 다른 말로 하자면 출세와 권력을 위해 평생 갈 짓 자 행보를 반복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행보가 과연 자신을 키워준 할아버지의 항일정신, 좌우합작 정신, 반독재정신과 부합되는 것인지…. 그래서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에게 권하고 싶다. ‘할아버지의 삶’과 ‘자신의 오늘’을 생각하며 ‘가인 김병로 길’을 걸어 보시라고. 이 가을이 다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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