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언젠가 서울지하철 구의역에서 청년 하청노동자가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끼여 죽었다. 유품으로 남은 컵라면을 들고 사람들이 울었다. 또 언젠가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청년 하청노동자가 컨베이어벨트에 말려 죽었다. 사람들이 컵라면을 쌓아 두고 엉엉 울었다. 왜 자꾸 죽는지를 길에서 물었다. 돈 때문이었다고, 누구나가 아는 답이 짧았다. 책임을 묻고 대책을 만드는 일이 다만 하염없이 길었다. 그러니 건물 올리고 배 짓는 현장에서 날아든 부고가 오늘 또 새롭다. 불에 타고, 떨어지고, 질식했다는 사인만이 여느 때처럼 익숙한 것이었다. 사철 가리지 않고 흰 국화가 팔린다. 향내 배인 노동조합 조끼에 근조 리본이 마스크처럼 익숙하다. 우리는 왜 날마다 명복을 비느냐고 길에 선 사람들이 묻는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밥 한 끼 먹겠다고 나선 일인데, 집에 돌아오질 못해 그 저녁 밥상엔 생쌀이 오른다. 향 연기가 오른다. 더는 명복을 빌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새로운 국회에 촉구했다. 50주기에 이른 어떤 죽음 옆자리에서 오늘의 죽음을 꼽아 말하느라 말이 길어진다. 잇따른 죽음을 기록한 2020년의 노동백서가 나날이 두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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