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엔 사무총장이 임기를 마치고 귀국해 제 나라에서 여기저기 찾아다니는데 수십명의 기자들이 달라붙어 일거수일투족을 받아쓰고 찍어 바친다. 이게 언론이 할 일인가. 노인 보호시설에 들어가 턱받이 두르고 할머니 밥 먹이는 게 주요 면에 실릴 일도 아니다. 이젠 복지시설에 찾아가서 쇼할 정치인들에게 주의점을 알려 줄 교육 프로그램부터 만들어야 할 판이다. 정치인들은 식사 봉사에서 유의해야 할 자세부터 배워야 한다. 반기문 전 총장의 식사봉사 장면을 놓고 벌어지는 해프닝은 평소 언론이 얼마나 자원봉사보다 자원봉사하는 정치인에게만 집중해 왔는지 잘 보여 준다. 아무리 봐도 전파낭비고, 지면낭비다.
문재인 전 대표는 18일 자신이 만들 다음 정부를 ‘일자리 정부’라고 공언하면서 131만개 일자리 공약을 발표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숫자의 신빙성은 신경 안 쓴다. 그냥 닥치고 받아쓰기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30대 재벌들과 만난 자리에서 “근로기준법이 개정되면 일자리가 15만개 는다”고 했다.(조선일보 19일자 1·2면) 이 역시 언론은 검증 없이 받아쓴다.
유일호 경제부총리도 1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열고 “올해 일자리 예산 33.5%를 1분기에 조기집행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내일신문 18일자 11면) 유일호 부총리가 주로 언급한 일자리는 취업성공패키지 21만명, 청년내일채움공제 5만명 등이다. 정부의 일자리사업 종류만 185개다. 정부와 정치권이 지난 20년 동안 읊어 댄 일자리 개수만 놓고 보면 완전고용을 실현하고도 남는다. 그런데도 65세 이상 노인빈곤율은 61.7%로 통계작성 이후 사상 최악이다.(내일신문 17일자 1면)
정부와 정치권이 공수표를 남발하고, 언론이 이를 검증 없이 받아쓰는 동안 1년짜리 파리 목숨이었던 아파트 경비원들은 6개월짜리, 3개월짜리 근로계약으로 쪼개져 고용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경향신문 18일자 10면) 아파트 경비원의 처지에 그나마 주목한 신문은 한국일보였다. 한국일보는 18일자 12면 머리기사로 '3개월짜리 계약까지 … 더 추워진 경비원들'이란 제목의 기사로 이 사실을 비교적 상세하게 다뤘다. 1년마다 갱신되는 입주자대표자회의와 업체의 용역계약에, 자신들의 3~6개월짜리 초단기 계약까지 한 해에도 서너 번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경비원들에게 대선후보들의 말잔치는 공허하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말의 성찬을 주워 섬기는 언론이 더 나쁘다.
언론이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반기문과 문재인을 따라다니는 사이 '18년 노점상이 쫓겨났다, 막무가내로…'(국민일보 18일 1면 머리기사) 국민일보는 이 기사를 1면 머리에 올린 뒤 8면 전면을 털어 보도했다. 지난 9월 구청에 의해 강제철거된 동작구 이수역 노점상인의 노숙농성과 노원구 월계동 인덕마을 재건축지역 상가 세입자, 마포구 아현포차 상인들의 아슬아슬한 삶을 실었다.
그런데 진보를 자처하는 한 신문의 18일자 사회면은 ‘송희영 대우조선 홍보업체서 1억 받아’ ‘박원순 서울대 수능폐지 이어 남경필 사교육 금지’ ‘이대 사태, 평생대학 사업 올해도 15개대에 226억원’ 같은 기사로 채워졌다. 이게 정치면이지 사회면인가.
이재용 구속 여부를 놓고 경제지들은 난리였다. 파이낸셜뉴스는 19일자 1면 머리에 "이래도 저래도 기업 때리면서… 일자리 늘리라니"라는 직접화법으로 재벌을 두둔하고 나섰다.
하나만 묻자. 이재용 부회장 구속되면 우리 경제가 망하기라도 하는가.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