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애림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교육선전팀장

“하청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2004년 2월14일, 당시 마흔아홉의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박일수가 자신의 몸에 불을 놓으며 남긴 유서의 첫 문장이다. 사내하청 노동자의 체불임금·노동조건 문제 해결에 앞장섰던 열사는 2003년 12월 원청인 현대중공업의 전산 자료 말소라는 방식으로 해고당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원청은 산재보험 처리를 신청하거나 노조활동을 하는 사내하청 노동자를 출입증 박탈이나 업체 폐업이라는 방식으로 내쫓을 수 있다.

2003년 8월 현대중공업사내하청노조(현재의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가 결성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노조설립신고서를 구청에 제출하자마자 신고서에 기재돼 있던 노조 임원과 조합원이 속한 업체들이 일제히 폐업에 들어갔다. 조합원이 아닌 노동자들은 곧바로 다른 사내하청업체에 고용됐지만 조합원들은 해고자 아닌 해고자가 돼 현장 출입이 금지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사업장에 취업도 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그렇게 쫓겨난 노동자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10년이 넘도록 노조를 지키며 조합원뿐만 아니라 전체 하청노동자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끈질기게 싸웠다. 임금체불, 산재 은폐, 사내하청에 대한 구조조정 등 문제가 생길 때마다 조합원이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함께 싸웠으며, 현대중공업만이 아니라 조선업 하청노동자 전체의 권리찾기 투쟁에 앞장섰다.

2010년 3월25일, 현대중공업에 의해 잘린 지 7년 만에 대법원에서 하청업체를 폐업시키는 방식으로 조합원들을 내쫓은 원청이 부당노동행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을 이끌어 냈다. 정부와 법원은 현대중공업의 사내하청 활용이 불법파견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현대중공업이 하청노동자의 “기본적인 노동조건 등에 관해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로서 노조법상 사용자의 지위에 있음을 인정했다.

조합원만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의 권리찾기를 위해 싸워 왔기 때문에, 법·제도적 제약에 굴하지 않고 원청을 상대로 싸워 왔기에,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2014년에는 설립 이후 최초로 12개 사내하청업체와 단체교섭을 진행하고 부분 파업도 전개했다. 올해 들어서는 원청 노조인 현대중공업노조와 함께 하청노조 집단가입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를 원·하청 사용자가 폭력적으로 탄압하고 이를 원청 노조가 방관하는 사이에 2004년 전체의 31%였던 사내하청노동자는 2014년 59%로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제 현대중공업에는 직영노동자가 약 2만5천명, 하청노동자가 파악된 인원만 약 4만5천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 정규직 노조가 사측의 일방적 노동조건 결정에 협조하고 사내하청 확대와 착취에 눈감은 십여년은 현대중공업 노동자 전체의 권리 실종으로 귀결됐다. 세계 1위의 조선소가 매년 최악의 노동자 살인기업 명단에 오르는 현실이 단적인 예다.

지난 14일 현대중공업 원·하청 노동자가 함께 손잡고 하청노조 집단가입 및 공동투쟁 결의대회를 가졌다. 벌써부터 원·하청 사용자는 업체 폐업이나 블랙리스트 등 오래된 탄압 수단을 들먹이며 노동자들을 주저앉히려 하고 있다. 하지만 10년 넘게 비정규직 착취·탄압과 정규직·비정규직 분할에 손 놓고 있었던 것이 오늘 전체 노동자의 고용·임금, 생명과 안전을 위험에 처하게 했다는 것을 경험한 노동자들은 쉽게 주저앉지 않을 것이다. 착취도 탄압도 실질적으로 지배·결정한 원청 현대중공업의 책임을 우리 사회가 함께 물어야만 할 때다.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교육선전팀장 (laboryun@naver.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