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중소·영세 사업장에서 일하는 한 파견노동자 인터뷰 글을 보게 됐다. 파견노동자는 휴게실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왠지 불편해서 안 가게 되고, 혹시 휴게실에 들어가더라도 정규직들 눈치 보면서 끄트머리에 앉아 있다가 나온다는 이야기였다. 그 인터뷰에서 뼛속 깊이 박혀 있는 '이곳은 내 자리가 아니다'는 생각을 보게 됐다. 아마도 일상적으로 이런 경험을 했으리라. 그러니 이 노동자는 자기가 일하고 있는 회사의 휴게실을 이용하면서도 눈치를 보게 됐으리라.
또 다른 인터뷰에서 조회시간에 “우리 회사 직원이라면 주차장에 차를 엉망으로 대놓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며 은근히 비정규직을 타인 취급하거나 문제 있는 사람들로 취급하는 관리자들 때문에 곤혹스러웠던 경험을 이야기한 이도 있었다.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지만 "당신의 자리는 없다"고 말하는 이들로 인해 비정규 노동자들은 유령이 된다. 공공기관이나 자치단체에도 이런 노동자들이 많다. 예산을 정부에서 통제하다보니 어떤 이들은 정식 T/O(정원) 없이 일하는 사람들이다. 공공기관에 일이 많기 때문에 채용은 해야 하는데 T/O가 없으니 재료비나 사업비에서 노동자들의 인건비를 충당해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노동자들은 자신이 일하는 곳의 조직표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정부에서 지급되는 비품도 비정규 노동자들의 것은 없다. 정원 안에 포함된 노동자들에게는 지급되는 비품인데, 이들은 자기 돈을 주고 사야 한다. 공공기관에서 똑같이 일을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는 노동자들이다.
이렇게 유령이 돼 버린 노동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조리종사원으로 일하는 학교비정규 노동자들은 아이들과 함께 6년을 같이 밥을 나눈다.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맛있는 밥을 해 주기 위해서 구슬땀을 흘렸고, 6년을 같이 웃었던 사이인데 학생들의 졸업앨범에 이들의 사진은 없다. 졸업앨범에는 교사와 학생, 교장만 있다. 그 아이들이 더 잘 자랄 수 있도록 함께했던 무수히 많은 노동자들은 유령처럼 앨범에서 지워져 있다.
병원도 마찬가지다. 환자 곁에서 24시간 생활을 하다 보니 환자의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이들은 간병인들이다. 하지만 의사들은 간병인들에게 환자의 상태를 묻지 않는다. 이들은 병원에서 마치 그림자와 같다. 병원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일하는데도 밥 먹을 장소, 옷 갈아입을 장소 하나 없다.
누구나 자신의 자리가 있을 때 안도감을 느낀다. 내가 속해 있는 곳, 나와 함께하는 사람을 인식하게 될 때 기쁘게 일하고 어려움과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다. 그래서 공동체다. 그런데도 회사는 비정규 노동자들을 일회용품으로 취급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하다가 언제라도 버릴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대기발령이 징계의 한 종류이고, 노동자들의 책상을 없애 버리는 것이 가장 악독한 탄압의 유형인 것처럼, 노동자들을 유령으로 만드는 비정규직은 아주 나쁜 제도다.
자신의 존재가 지워져 있다는 것은 일하는 이들에게 형벌이다.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것은 자존감에도 상처를 준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때때로 회의하게 된다. 가장 심각할 때는 그렇게 힘을 다해 일해 오던 곳에서 쫓겨날 때다. 해고도 아니고 단지 계약해지이며, 왜 잘려 나가는지에 대해 제대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문자로, 구두로 통보를 받기 때문이다. 항의라도 할라치면 "너희는 원래 우리 직원이 아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존재를 부정당하는데도 버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자신을 유령이 아니라 당당한 노동자라고 선언한 이들이 있다. 청소노동자들은 2010년부터 “우리는 유령이 아니다”고 외치며, “따뜻한 밥 한 끼의 권리” 캠페인을 시작했다. 유령이 아니라 대학이나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기 때문에 따뜻한 밥 한 그릇 먹을 공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한 화장실에서 청소를 해도 마치 유령처럼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사회를 향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청소노동자 행진’을 시작했다.
모든 대학에서 청소노동자들은 당당한 주체로 인정받고자 한다. 학교비정규 노동자들도 스스로를 유령이 아니라 교육의 한 주체라고 선언했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인천공항 노동자·KTX 승무원·수자원공사 비정규 노동자 등 간접고용 노동자들도 원청회사가 "너희는 이 회사 직원이 아니며, 너희의 자리는 없다"고 말할 대 "원청이 우리의 진짜 사장"이라고 외치며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한 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더 많은 이들이 이런 외침에 함께할 때 비정규 노동자는 유령이 아니라 기업의 주체가 된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work21@jinbo.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