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이정호 울산저널 편집국장 | ||
조선일보 4일자 34면(사람)엔 ‘경제부총리도 쩔쩔맨 그녀의 대통령 연기 / 박은결 기획재정부 사무관’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조선일보는 박 사무관의 웃는 얼굴까지 실었다.
역대 어떤 정권에도 가장 힘 있는 부서인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는 지난달 31일 오후 현오석 경제부총리와 신제윤 금융위원장 등이 참석해 대통령 업무보고 리허설을 진행했다. 박 사무관은 이 자리에서 박근혜 대통령 역할을 맡아 경제부총리에게 깜짝 질문을 하는 등 장관들을 당황케 했다. 실제 기획재정부의 대통령 업무보고는 사흘 뒤인 지난 3일 열렸다.
대통령이나 장관들이 기자회견을 하거나 재래시장을 방문할 때 여러 언론이 앞다퉈 취재하지만 사실은 다 짜고 친다. 높은 양반들이 떡볶이를 먹거나 장을 보는 가게까지 미리 다 정해 놓고 한다. 전날 청와대 경호실 직원들이 탐지견과 함께 나와 조사까지 마친다. 보좌관들은 1분 단위로 짜여진 행사 진행표까지 들고나온다. 결국 대통령과 환하게 웃는 시장 상인들의 표정은 사실 완벽하게 연출된 거다. 독자들이 다음날 신문이나 방송뉴스로 보는 장면들은 이처럼 연극적 요소를 극대화한 코미디다.
그처럼 부처별 업무보고조차 사전 리허설까지 곁들인 연출이다. 이날 리허설에서 대통령 역을 맡은 박 사무관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나와 행정고시 51회로 기재부 5급 관료가 됐다. 고고미술사학과 행정고시, 연극 셋 다 참 안 어울리는 조합이다.
우리는 언제쯤 이런 ‘보여 주기’ 정치 및 행정과 이별할 수 있을까.
한국일보는 4일자 8면(정치)에 <청와대 “기사에 ‘관계자’ 표현 쓰지 말아 달라”>는 기사를 썼다. 청와대 윤창중, 김행 두 대변인이 3일 오전과 오후 청와대 기자실을 찾아가 기자들에게 ‘관계자’라는 말을 그만 쓰도록 해 달라고 말했다. 이에 언론계는 “취재원 보호를 위한 익명보도를 못하면 언론 자유가 위축될 우려가 있다”고 반발했다.
이날 오전 윤창중 대변인은 ‘고위 관계자’라는 말은 자기가 여기 와서 브리핑할 때만 써 달라고 했단다. 청와대가 알리고 싶은 내용만 알려 주는 브리핑 시간에 대변인이 공식적으로 발언한 내용을 ‘관계자’라고 보도할 기자는 아무도 없다. 김행 대변인의 말은 좀 더 설득력이 있다. 김 대변인은 “청와대가 논의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심지어 대통령 생각과 동떨어진 내용이 청와대 관계자 명의로 자주 나온다”며 ‘관계자’ 보도 자제를 요청했다.
청와대가 비판적 목소리를 차단하려고 실명보도를 요청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잘못은 청와대와 언론 양측에 다 있다. 청와대는 홍보성 브리핑만 해 대고,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자주 함구령을 내린다. 이를 피해 가려고 언론은 ‘관계자’ 보도를 해 왔다. 그러다가 정도를 넘어선 ‘관계자’ 연출 보도도 있다. ‘관계자’를 등장시켜 자기 생각을 마구 써 대기도 한다.
몇 년 전 중앙일간지 3곳과 진보적 대안미디어 2곳의 두 달치 기사를 모두 살펴보니 ‘관계자’ 보도가 전체 기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80%에 가까웠다. 보수신문보다 대안미디어가 ‘관계자’를 남용하는 비율이 최소 10% 이상 더 많았다.
언론 교과서는 권력집단 같은 고위직을 다룰 때는 되도록 실명(實名)으로 보도하고, 일반 서민들을 다룰 땐 익명(匿名)으로 보도하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우리 언론은 정반대로 고위직은 되도록 익명으로 처리하고, 가난한 범죄자들은 대부분 실명으로 보도한다.
울산저널 편집국장 (leejh67@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