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선거는 지나갔다. 욕설 없는 욕들이 난무했다. 나꼼수 김용민이 수년 전에 내뱉었다는 욕설은 이번 선거기간에 내뱉었던 비난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인격 무시와 모욕의 수준은 보다 근본적이고 심각했다. 단지 모욕죄로 처벌되지 않는 말로 내뱉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행동은 이 말보다 더했다. 욕된 행동이 난무했다. 권력을 향한 의지만이 설명할 수 있는 배신과 불륜의 시간이 지나갔다. 빌어먹을 4·11 총선은 이렇게 지나갔다.
2. 모든 말과 행동은 국회의원 의석수로 설명됐다. 이 나라에서 이른바 진보도 보수도 그의 말과 행동은 의석수로서 정당할 수 있었다. 심지어 노동도 의석수를 보고서 연대하고 통합했다. 한국노총은 민주통합당과 통합했고, 민주노총은 민주통합당과 정책연대했다. 민주노총은 국민참여당과 통합한 통합진보당의 후보, 그리고 통합진보당과 야권연대한 민주통합당 후보를 지지했다. 국회의원의 의석수가 이 나라에서 모든 말과 행동의 정당성의 근거였다. 진보가 뭐라서 진보라는 것인지 그건 다 잊었다. 노동자정치는 뭐라서 노동자정치라는 것인지 그건 몰라도 됐다. 오직 과반수의석을 획득해야 했으니 야권연대를 해야 했다. 국회의석 확보를 위해 통합해야 했다. 민주노총이 추진해 온 노동자정치세력화는 통합진보당의 의석수로 말하는 것이 돼 버렸다. 통합진보당은 20석을 확보해 원내교섭단체가 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번 총선에서 이 나라 노동운동의 모든 말과 행동은 야권연대의 과반수의석 획득, 통합진보당의 원내교섭단체 지위 확보라는 목표로 정당한 것이 됐다. 그리고 지금 4·11 총선이 끝났다. 어떻게 됐을까. 노동운동은 무엇을 확보했을까.
3.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는 수많은 정책이 발표됐다. 지역과 주민을 위한다는 수많은 공약이 쏟아졌다. 노동자를 위한 노동정책도 있었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노동정책을 발표했다. 그것을 노동입법을 통해 실현한다고 했다. 그걸 위해서는 과반수의석을 획득해야 하는 것이고 야권연대는 너무도 당연한 목표여야 했다. 이미 이명박 정권에 대한 민심이탈은 새누리당의 과반 미달과 야권연대의 과반수 달성이 눈앞에 보이게 했다. 민주노총은 심지어 그 야권연대의 과반수의석을 전제로 19대 국회에서 우선 처리할 노동입법의 목록을 제시하고 8월 총파업 방침을 선언했다. 그래서 이 나라 노동운동은 총선을 앞두고 통합과 연대로 달려갔다. 그리고 4·11 총선은 끝이 났다. 야권연대는 과반수의석을 획득하지 못했다. 통합진보당은 원내교섭단체가 되지 못했다. 총선 결과는 더 이상 이 나라 노동운동의 말과 행동이, 의석수가 노동자정치세력화의 길이라고 했던 노동운동이 정당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말았다. 설사 연말 대선에서 야권연대해서 민주통합당의 아무개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고 해도 새누리당이 반대하는 노동입법은 가능하지 않게 됐다. 그러니 야권연대로 당선된 대통령에게 아무리 비정규직법을 개정하라고 해 봐야 소용 없게 됐다. 정계개편을 하지 않는 한 19대 국회에서는 소용 없게 됐다. 졸지에 이 나라 노동운동의 말과 행동이 더 이상 정당하지 않게 됐다. 국회의석수가 국회의석이 노동운동이 노동자정치세력화의 길이라고 그것을 위한 통합과 연대가 정당한 방법이라고 주장해 왔던 말, 거기에 노동자를 동원해 왔던 행동은 더 이상 정당하지 않게 되고 말았다. 국회의원의 의석수로 노동운동이 말하고 행동해 왔으므로 총선의 개표방송이 끝나자 졸지에 이렇게 돼 버렸다. 일부에서는 통합진보당의 13석을 말한다. 과거 18대 민주노동당 의석보다 훨씬 많이 획득했으니, 정당지지율도 월등히 높였으니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성공이라고 말한다. 분명히 그렇다. 18대 민주노동당의 의석보다 증가했고, 정당지지율도 높아졌다. 분명히 통합진보당으로서는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기까지다. 국민참여당과 통합한 통합진보당으로서의 성공인 것이다. 이 나라 노동운동이 추진해 온 노동자정치세력화로서는 그것이 성공일까. 노동과 진보, 자유가 뒤섞여 있는 당이라면 그 당의 의석 모두가 노동자정치의 의석일 수 없다. 그 당의 의석 중 일부, 즉 노동자정치를 대표하는 의석만이 노동자정치세력화와 결부시킬 수 있을 뿐이다. 통합진보당의 당선자 중에서 노동자정치를 대표하는 노동자의 대표로서 당선된 자는 누구인가. 구체적으로 파악해 봐야 통합진보당이 이번 총선에서 확보한 의석 중에서 얼마를 노동자정치세력화로서 평가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과연 누가 있을까. 민주노총이 지지했던 후보이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한다면 야권연대로 민주통합당후보로서 당선된 자도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아무도, 심지어 민주노총조차도 그렇게 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노총이 내부절차를 거쳐서 민주노총의 후보로 추천해서 당선된 자가 해당한다고 봐야 할까. 그러면 도대체 몇 명, 누가 있을까. 한국노총은 또 어떤가. 민주통합당으로 한국노총 출신의 후보를 추천해서 비례대표와 지역구의 후보공천을 받아서 몇 명이 당선됐다. 이것을 이 나라 노동운동이 추진해 왔던 노동자정치세력화라고 볼 수 있을까. 노조간부의 정치적 진출일 수 있어도 노동운동의 노동자정치세력화라고 할 수 있을까. 노동운동이 말해 온 노동자정치세력화는 노동자정치를 위한 독자적인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을 창당해서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를 추진했다. 그때 그것을 누구나 노동자정치세력화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국민참여당과의 통합도, 민주통합당과의 연대도 노동자정치세력화의 길이라고 당연하게 말한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국회의원의 의석수가 모든 말과 행동을 설명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노동자정치는 국회의원의 의석으로 말해지는 것이므로 통합이든 연대든 얼마든지 의석수를 증대시킬 수 있는 것이면 그건 노동자정치세력화의 길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랬는데 19대 총선의 결과가 발표된 지금, 더 이상 노동자정치세력화를 말할 수가 없게 됐다. 도무지 당선자의 수로는 어떻게 노동자정치세력화를 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국민참여당과 통합한 통합진보당의 모든 의석이 노동자정치세력화라고 봐서는 안 된다. 만약 이것이 노동자정치세력화로 평가된다면 지금 이 나라 노동운동은 이번 총선으로 상당한 성과를 올린 것이 틀림없다. 패배의 탄식이 아니라 승리의 만세를 불러야 할 때다. 이것을 노동자정치세력화라고 만세를 부르는 자가 있다면 기왕에 야권연대한 것이니 민주통합당과 통합하게 되면 민주통합당 의석이 노동자정치세력화로 평가하게 될 것이므로 다음 20대 총선에서는 더욱 크게 승리의 만세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가 아무리 만세를 불러대도 그것은 노동자정치세력화가 아니다. 이제 이 나라 노동운동은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노동자정치세력화는 19대 총선에서 실패했다. 울산·창원 등 이 나라 노동운동이 조직적 힘을 갖추고 있는 지역에서도 노동자정치세력화는 실패했다.
4. 이제 이 나라 노동운동은 노동자정치세력화의 길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다. 노동자정치세력화는 노동자 스스로 정치세력이 돼서 노동자권리를 실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선거 등을 통한 권력의 길로 가고자 한다면 정당운동으로서 전개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노동자당의 건설과 그것을 통한 정치적 진출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은 인민의 당, 진보의 당은 그 당에서 노동운동의 지배가 확고하게 보장되지 않는 조건에서는 그 당의 정치가 노동자정치세력화라고 평가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나라에서 통합진보당·진보신당, 과거 민주노동당 등이 노동자정치세력화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 그동안 이 나라에서 노동자정치세력화의 과정은 통합과 연대의 과정이었다. 노동자 외에 다른 계급과 계층과의 통합을 위해서, 연대를 위해서 달려왔다. 이미 노동자가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 자본의 세상에서 통합과 연대를 위해서 민중이라는 범주로, 진보와 민주라는 전선으로 ‘우리’라는 울타리를 확대해 왔다. 그런데 이번 총선을 앞두고서도 나타났지만 통합을 위해서, 연대를 위해서 노동자권리의 요구수준을 낮추어야 한다. 노동자세상을 꿈꾸지 않는 진보와 통합하기 위해서는 노동정치는 노동자세상을 강령에서 삭제해야 한다. 노동자권리를 기껏해야 자본의 불법과 부당을 바로잡는 수준에서, 공정하고 합리적인 노사관계 질서의 확보로 바라보는 민주와 자유의 그들과 연대하기 위해서 노동정치는 실현해야 할 노동자권리 요구수준을 그들이 받아들이는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 실제로 이렇게 이 나라에서 노동자정치세력화는 달려왔다. 그런데 이러한 통합과 연대로는 더 이상 노동자의 분노를 제대로 조직할 수가 없다. 노동자세상의 꿈이 사라진 노동정치는 보다 많은 의석을 확보해서 정치세력화를 실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자의 꿈, 노동자세상과 노동자가 확보해야 할 노동자권리를 포기하고서 세워진 것일 수밖에 없다. 이 자본의 세상에 대한 노동자의 분노를 노동정치가 틀어막고서 그 노동자정치세력화는 실현되게 된다.
이것이 이미 수많은 나라에서 노동자정치세력화의 길을 걸었던 노동운동의 모습이었다. 이들 나라에서 노동의 꿈을 잃은 노동정치는 세력화된 정치만 남고 말았다. 이들 나라에서 노동운동은 노동정치라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말았다. 친자본의 당이 집권할 때와 별로 다르지 않는 노동자권리가 노동자들에게 보장됐다. 오히려 경제위기 앞에 자본과 타협하고 노동자권리를 약화시키기도 했다. 이런 세상에서 선거는 욕설과 욕된 행동이 난무해도 그것은 노동자권리, 노동자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다. 노동에 대한 배신, 자본과의 불륜으로 얼룩진 노동정치의 빌어먹을 선거가 있을 뿐이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