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왜 싸우는가?> 프리랜서 PD 김영미의 새 책 이름이다. 10년 넘게 분쟁 지역을 찾아다니며 카메라에 담아 왔던 그이는 나이 서른에 학살당한 동티모르 여대생의 사진에 경악했다. 카메라 가방 하나를 들고 동티모르로 떠났다. 이후 그이는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레바논·체첸·소말리아·이라크를 떠돌았다.

2003년 3월 미군의 이라크 침공 때 우리는 전장을 누비는 MBC의 종군기자 이진숙에 감동했다. 대부분의 기자가 레바논이나 요르단·사우디아라비아에서 얼쩡거리며 외신을 앵무새처럼 읽고 있을 때 이진숙은 놀랍게도 이라크 안으로 들어갔다. 심지어 몇몇 한국 언론은 프랑스나 독일에서 이라크 전쟁 리포트를 읽었다.

이진숙은 MBC 기자증을 들고, 미군에게 임베이드(취재허가)를 받았지만 전장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던 김영미 PD는 여권만 들고 있었다.
 
조국 교수는 민주노동당이 주최한 ‘진보의 현재와 미래’ 대담에서 “박근혜 이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도 지지하는 사람은 30몇%나 된다. 나로선 환장할 노릇”이라고 했다.(동아일보 12일 8면) 조 교수가 대담에서 이 말만 한 게 아니라 보수 포퓰리즘을 경고했지만 그 역시 상품으로 보인다.

지진이 난 일본을 애도하는 지식인들의 글이 신문에 춤춘다. 15일 한겨레가 1면에 고은 시인의 <일본에의 예의>를 실었다. 늙은 시인은 애도의 대상에 맞춰 한글맞춤법마저 일본어 번역투로 썼다. 최남선이 지은 최초의 신체시 <해(涇)에게서 소년에게>를 듣고 한참 당황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바다가 소년에게’라는 쉬운 말을 이렇게 어렵게 비틀 수도 있구나. 문학이란 이름으로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수많은 난행의 주인공이었던 늙은 시인은 오지랖도 참 넓다.

오랫동안 언론은 지식인을 상품으로 여겼고, 지식인은 허명을 채울 욕망의 배설구로 언론을 활용해 왔다. 50년대 중반 서울대 국문과 대학생이던 이어령은 신생 일간지 한국일보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청진동 구멍가게로 시작한 민음사 사장 박맹호는 서울대 불문과 대학생이었다. 조선일보 바지 사장에서 쫓겨난 선린상고 출신의 장사꾼 장기영은 54년 홧김에 태양신문을 인수했다. 이름을 바꿔 태어난 신생 일간지 한국일보는 파격적인 필진이 간절했다. 한국일보 문화부장 한운사가 박맹호에게 신인 문인을 구했다. 박맹호는 같은 대학 국문과 동기로 친하게 지내던 이어령을 천거했다. 한국일보 상품제조 책임자들은 가능하면 신인을 크게 다루려고 했다.(김현, ‘칠십년대의 마지막 말’, 1979. 4)

그렇게 허명을 쌓았던 이어령도 고은처럼 15일 중앙일보 1면에 <한국은 지금 일본으로 달려갑니다>라는 편지를 썼다. 첫 문장 “바다가 일어서는 것을 보았습니다”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시다. 중앙일보는 2면에 이어령을 책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펴낸 일본 전문가로 소개했다. ‘본사 고문’이란 자기 자랑도 빼먹지 않았다.

이어령·고은 같은 이들은 “산처럼 무너지는 검은 파도”와 “배들이 뭍으로 와 뒤집히는” 텔레비면 화면 속의 감성주의자들이다. 이 땅에도 산처럼 무너지는 검은 파도는 무수히 많다. 새벽 첫 지하철을 타고 일터로 나와 종일 일해도 쌓여만 가는 빚 때문에 자살했던 청소노동자는 우리의 일상이다. 김영미는 말장난에 익숙한 전문 글쟁이가 아니라서 제 눈으로 본 것을 이들처럼 화려하게 쓸 순 없다. 그래서 김영미의 글은 불편하지만 어떤 수사보다 진실에 가깝다.

한국 언론 모두가 조중동의 프레임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속에 김영미는 보석이다. 한 토론회에서 본 그이는 작고 옹골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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