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동학농민군을 때려잡던 토벌대 대장이었던 것처럼, 그 토벌대의 군량미 500석을 착복한 혐의로 송사에 휘말렸던 것처럼, 선생의 한쪽 면만 추켜세우는 홍위병들만 접하면 우리는 영원히 87년 체제에 갇히고 만다.
리영희는 1929년 태어나 평북 삭주군 대관동에서 자랐다. 박현채는 리영희를 압록강변 ‘산골촌놈’이라 놀렸지만 삭주군은 동양 최대의 수풍발전소를 옆에 끼고, 남쪽보다 반세기는 일찍 개명한 부유한 도회지였다. 장준하의 아버지가 만든 3층짜리 교회의 병설유치원을 나와 40년 ‘히라이 히데야스’로 창씨개명하고 대일본제국의 전승에 들떠 출정가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자주 불렀다.
공부 잘했던 리영희는 반장을 해 본 일이 없다. 리영희는 벽동군 제일 부잣집 어머니와 영림서 산림주사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늘 반장은 자기보다 공부 못하는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 리당억 차지였다. “나는 공부로는 리당억을 이기면서 사람에선 그에 졌다”고 그는 고백한다. 아버지의 일기엔 늘 “성미가 급하고 너그럽지 못하고 말과 행동이 가파르고, 자기를 높이고 오만”했던 아들 리영희였다.
리영희는 42년 14살에 ‘갑종 5학년제’인 서울 대방동의 경성공업학교로 진학한다. 45년 4학년 1학기부터 근로동원령 밑에서 노동에 시달렸다. 그를 일깨운 건 학교선생도 독립운동가도 아니다. 학도근로단 조장이던 경성전기의 보잘것없는 전기공 최아무개씨였다. 최씨는 얄타회담과 포츠담선언을 들려주며 리영희에게 일본 패망을 예고했다.
해방과 함께 리영희는 45년 11월부터 남대문시장에서 담배장사와 성냥장사를 하다가 46년 7월 인천에 문을 연 국립해양대에 들어갔다. 47년 봄 ‘반탁’ 시위에 자진 참여했지만 미국의 식민지 직접통치와 소련의 조선자치권 인정을 이해한 건 그로부터 20년 뒤였다. 같은 대학의 학생들이 당시 반탁운동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를 리영희는 깨닫지 못했다. 48년 남한 단독선거에 이어 이승만의 백색테러가 뒤덮던 시절엔 해상실습선을 타고 상해에서 밀무역할 물건을 사들이기에 바쁜 동료들과 함께했다. 여순반란을 진압하러 가던 백선엽 대령의 부대를 여수항에 실어 나른 것도 리영희가 탄 실습선이었다.
한국전쟁이 나던 날 리영희는 경북 안동중 선생으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흥망사>을 읽으며 한가로웠다. 50년 8월 연락장교단에 입대해 한국 여성의 생식기 모양에 통달한 미 군사고문단 장교들의 통역을 맡았다. 리영희는 경남 진주의 11사단 9연대에서 함양·산청·거창·구례군의 ‘공비토벌’에 열을 올렸다. 미군에게 얻은 45구경 권총을 챙긴 게 군대생활 7년 동안의 최대의 기쁨이었다. 연대장이 장교들 사기를 돋우고자 베푼 기생파티에서 잠자리를 거부하고 사라진 기생의 집까지 쫓아가 그 자랑찬 45구경의 방아쇠를 당겨 위협사격까지 했지만, 기생은 흐트러짐 없이 서서 “젊은 장교님, 당신은 진주기생을 잘못 봤어요. 나는 그렇게 천하게 굴지 않습니다”고 일갈했다.
베트남전을 끝장낸 미라이 학살사건보다 몇 곱절 처참했던 51년 2월10일 ‘거창 양민학살사건’도 리영희의 9연대가 저지른 만행이었다. 719명의 양민을 집단학살한 9연대는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해 국회조사단을 위협사격하면서 현장검증을 방해했다. 리영희는 월간지 <마당>이 82년 6월호에 <위령비를 다시 세워다오! 아직도 복권 안 된 거창사건 희생자들>이란 기획기사를 볼 때까지 이 사건 피해자가 187명이라던 이승만 정부의 발표를 믿고 살았다. 죽은 719명 가운데 14살 이하의 아이들이 359명으로 절반에 달한다는 충격적인 폭로로 리영희를 일깨웠던 <마당>의 편집장은 당시 민완기자 조갑제였다.
57년 합동통신에 들어간 리영희는 미 국무성이 55년부터 (준)식민지의 지식인을 초청해 미국 혼을 머리에 심어주던 ‘풀브라이트 4기 장학생’이 돼 59년 가을 처음 미국 땅을 밟는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이 모여 만든 게 지금의 관훈클럽이다. 리영희는 이 여행에서 푸에르토리코를 방문해 몸을 파는 뮬라토 여성을 20달러에 사서 하루를 자고 나서 “미국의 매춘여성은 너무 커서 한국 남자가 다루기엔 힘들다”고 평가했다. 리영희는 자신의 표현대로 “60년 1월 말 한 말의 신사유람단처럼 귀국했다”. 월 360달러씩 미 국무성이 주는 체류비를 남겨 성신여대 옆 두 칸짜리로 집을 늘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