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벌 공화국은 그 용산에 국제금융단지를 지어 천 배 만 배의 땅장사를 노렸다. LG전자는 이 사업에 참여하기로 했다. ‘LG전자 구본준 체제로 정비’(조선일보 12월1일자 경제5면)·‘LG전자 글로벌 인사실험 중단하고 외국인 부사장 5명 모두 짐을 쌌다’(중앙일보 12월1일자 경제1면)·‘구평회 EI 명예회장이 한·미 양국의 민간 외교활동을 공로로 한미 우호상을 받았다’(중앙일보 12월1일자 31면)라는 기사가 쏟아졌다.
구평회 명예회장은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넷째 동생으로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51년 락희화학 지배인으로 재계에 발을 내디뎠다. 54년 국내 민간기업 최초의 해외 주재원인 락희화학 뉴욕주재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최초의 치약인 럭키치약을 탄생시켰다. 65년 당시 텍사코와 셰브론의 해외진출 법인인 미국 칼텍스와 합작을 통해 민간 석유화학업체의 효시인 호남정유(현 GS칼텍스)를 설립했다. 84년에는 국내 최초의 액화석유가스(LPG) 전문 수입·판매사인 LG칼텍스가스(현 E1)를 설립하는 등 국내 석유화학 부문의 토대를 닦았다. 한국인 최초로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국제회장을 맡은 것을 비롯해 한국무역협회장·한미협회장을 지내며 민간 외교관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한국경제신문 12월1일자) 한경 바로 옆의 경제지 매일경제는 오지랖도 넓게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체제 1년 기념기사(16면)에서 <소통의 리더십 … 고객과 가까워졌다>고 읊조렸다. 재벌 얘기라면 이렇게 시시콜콜한 것까지 세세히 주워섬긴다.
나 같으면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쓰겠다. 36년 진주로 나와 포목점 천종상회 건너편에 구인회상점을 만들어 비단장사로 제법 돈을 번 구인회는 “서울에 갔다 내려오는 길에 마산에 들렀다니 일본 군대의 말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전쟁이 난다면 물자가 귀해진다. 그는 광목 1천짝을 사 놓았다.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구인회상점은 재워 놓았던 것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8만원이라는 이득이 나왔다”(총수의 결단·한운사·동광출판사·1984)
31년 덮친 만주사변에서 37년 엎친 중일전쟁으로 조선 민중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할 시절 사재기로 떼돈 번 그 재벌의 얘기는 왜 뺐는지. 형 구인회가 맡긴 조선흥업사의 일이 잘 안 되고 보니 신이 날 일이 없었던 동생 구정회는 “회사에 붙어 있는 것도 심심했다. 정회는 헛일 삼아 도청에 들렀더니 그 담당자가 바로 고향 사람 아닌가. 원한다면 손쉽게 허가를 해 주마고 했다. 아우의 이야기를 들은 형은 깊이 생각했다. 아마스를 가지고 서울로 갔다. 크림이 다 팔렸으니 더 달라고 요청이 쇄도했다. 70만원어치를 가지고 가서 100만원 현금을 받아 즉각 부산으로 돌아왔다.”(총수의 결단·한운사·동광출판사·1984)
이런 게 요즘 글로벌 기업이라고 세간에 오르내리는 유수 재벌그룹들의 초기 모습이다. 현대차그룹도 예외일 순 없다. 그렇게 재벌의 입이 되려거든 아예 그룹 홍보실로 들어가는 게 옳다. 언론이라는 중립의 탈을 쓰고 홍보용 보도자료 수준의 글을 공익을 앞세우고 밀어붙이면 제2·3의 남일당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