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 언론은 조인식 때 임창렬 장관이 사용한 만년필이 외제였니, 국산이었니 하는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임창렬 옆에서 장관을 보좌했던 이는 강만수 재정경제원 차관이었다. 당시 강 차관은 TV 화면엔 조연으로 잠시 얼굴이 나왔다.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첫 조각에서 IMF 구제금융의 숨은 조역이었던 강만수를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뽑았다. 여론은 반발했지만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만 1년 동안 그를 경제정책의 수장으로 기용했다. 2009년 2월 안팎의 많은 반발 끝에 강 장관을 끌어내렸지만 곧바로 대통령직속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 자리에 앉혔다. 다시 6개월 뒤 대통령 경제특별보좌관으로 옮겨 지금까지 기용하고 있다.
97년에 지금의 ‘어륀지’보다 더 인기 있던 ‘펀더멘털’이란 영어 단어를 온 국민에게 가르쳤던 강경식 경제부총리는 IMF 직전 불명예 퇴진했다. 당시 강경식 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김인호 김영삼 대통령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은 ‘환란 3인방’으로 낙인찍혔다.
이들은 최초의 여야정권 교체에 힘입어 98년 5월18일 뜻 깊은 날에 환란의 책임자로 구속돼 구치소에 들어갔다. 언론은 검찰의 입을 빌려 이들을 단죄하기 바빴고, 이들의 수갑차고 수의 입은 모습을 1면에 주로 실었다.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는 다소 억울했다.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경제수석이 틀어쥐고 있던 경제정책에 여러 차례 반발했던 정황이 나타났지만 여론은 이 총재의 호소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90년대 후반 한솔 PCS 휴대폰 사업자 선정과 자금 위기에 처한 해태, 신세계 재벌기업의 특혜 대출에 뒷배를 봐줬다는 죄목이었다. 그러나 ‘환란 3인방’은 이후 1심과 2심에서 연달아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지난주 우리 신문은 오랜만에 환란 3인방 중 한 명의 근황을 소개했다.(동아일보 11월17일자 31면, <김인호 시장경제연구원장 소비자정책 민간위원장에>) 김영삼 정부의 후반기 경제수석이었던 김인호가 당사자다. 나이 칠십 줄에 달한 구시대 인물을 이명박 대통령은 잊지 않고 챙겨 주요 정부위원회 수장에 앉혔다.
김인호 전 경제수석이 차지한 이번 자리는 공정위직속 소비자정책위원회의 제2대 민간위원장이다. 환란 이후 김 전 수석은 법무법인 세종의 부설연구소인 시장경제연구원에 지금까지 적을 두고 있다. 김 전 수석이 김영삼 정부하에서 경제수석 자리에 오르자, 당시 언론은 <반재벌 성향의 시장주의자> <원칙주의자>라는 수식어를 동원해 추켜세웠다. 반재벌 성향이라고 명명했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재벌 중심의 법률 변호로 이름난 세종에 자리 잡았다. 법무법인 세종은 김앤장과 쌍벽을 이루는 대형 로펌의 대명사다.
김 전 수석은 경기고를 나와 서울대 행정학과를 졸업하던 66년 행정고시에 합격했고, 박정희의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초안을 마련한 경제기획원에서 사무관으로 실무를 맡았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경력이면 언론의 표현대로 ‘반재벌 성향’을 갖기 매우 어렵다. 그가 미국 유학 시절 클래식 음악에 심취했고, 98년 5월 환란으로 서울구치소에 들어갔을 땐 악보를 보면서 울분을 달랬다고 해서 ‘반재벌 성향’이라고 할 순 없다.
이명박 정부의 인사정책은 물불을 안 가린다. 이유 여하를 떠나 과거 전력 때문에 온 국민의 비판을 받았던 인물이라도 한 번 자기 사람이면 반드시 챙긴다는 거다. 국민을 우습게 아는 안하무인 인사의 대표단수다. 온갖 경제 범죄로 지탄을 받은 재벌 회장이 사면 직후 국민들보고 “법을 지키라”로 일갈하는 수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