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

그날 이후 일상이 무너졌다. 그저 가족과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선택한 일이었다. 나를 잃었고, 가정은 바람 앞 등불처럼 흔들린다. 남들은 법정기념일이라고 잠시 일터를 떠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쌓인 피로를 풀었다. 그러나 어떤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란 이유로 그날도 어김없이 일터로 향했다.

어제와 다른 건 없었다. 바람이 좀 불었고, 동시에 움직인 적 없던 800톤급 골리앗크레인과 32톤급 타워크레인이 동시 작업에 나섰을 뿐이다. 빠듯한 공기 탓이다. 그리고 오후 휴식시간. 사고는 터지고 말았다. 그날 그들은 거기 있었고, 여전히 그날에 갇혀 있다.

2017년 5월1일 노동절에 발생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타워크레인 충돌사고. 그 현장에 박철희(47)씨와 김영환(38)씨가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일을 하고, 휴식시간에 맞춰 찾은 7안벽 마틴링게 프로젝트 P모듈 3층 메인데크에 위치한 휴게공간. 그곳에서 사고를 당했다. 휴게공간이라고 해 봐야 간이화장실과 정수기, 재떨이뿐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곁에 있던 동료가 다치고 사랑하는 동생이 스러지는 걸 봤다. 노동자 6명이 목숨을 잃고 25명이 심하게 다친 최악의 크레인 참사. 그곳에 있던 그들은 피해자이자 목격자다.

“일상을 회복하고 싶어요”

노동절인 그날도 1천623명의 노동자가 출근해 일했다. 그중 최소 500명이 사고를 목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용노동부는 사고 발생 후 42일 만인 6월12일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 위험군을 조사했다. 유효 응답자 859명 중 161명이 사고 현장을 목격한 후 불면증과 심리적 불안 증세를 보여 PTSD 위험군으로 분류됐다. 사고 당일 출근한 노동자가 1천623명인 것을 감안하면 900여명에 대해서는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같은해 9월 재직자 350명과 퇴직자 321명을 대상으로 2차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들 중 417명이 사고 현장을 목격했다고 답했다.

2년이 지난 지금 사고 피해자이자 목격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7일 사고로 함께 일하던 동생을 잃은 철희씨와 사람들을 피해 경기도 부천으로 이사한 영환씨를 서울 강서구와 경기도 부천 인근에서 만났다.

이들은 “일상을 회복하고 싶다”고 토로했다. 깨지고 까지고 부러진 상처는 2년이 지나면 아물기 마련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는 2년이 지난 현재까지 이들을 괴롭힌다. 가족과 동료를 잃은 상실감과 슬픔을 다독이고 싶다고 했다. 그날로부터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는 현실을 바꾸고 일상을 회복하고 싶다고 했다.

철희씨는 사고 직후 극심한 환영과 환청에 시달렸다. 영환씨는 자신도 모르게 끓어오르는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온몸으로 발버둥 쳤다. 주위 사람들은 “그만 잊어라”거나 “가족을 위해 정신 차리라”고 채근한다. 2017년 5월1일 이전으로 누구보다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그들인데.

“얼마 전 큰아이가 학습지를 풀고 있는데 가르쳐 준다고 옆에 갔더니 말도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울어요. 소리를 지르거나 혼낸 것도 아닌데. 아빠가 무서운 거예요. 사고 이후 자꾸 신경질이 나고 예민해져요. 분노가 마구 끓어오르니 자꾸 화를 내게 됩니다. 큰아이 세 살 때 제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어 줬는데…. 그때는 가능했던 그 일이 지금은 불가능해졌어요.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영환씨의 바람은 크지 않다. 보통의 사람들이 원하는 내 집 장만도, 큰돈을 벌고 싶다는 것도 아니다. 다시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아이가 가고 싶어 하던 제주도를 함께 가는 것. 어린이날 가족과 함께 사진 한 장 찍는 것. 평범한 일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삶을 원하고 또 원한다.

사고 열흘 만에 현장 복귀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조선소 떠난 노동자들


지난 7일 부천역 인근에서 만난 영환씨는 모자와 까만색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나타났다. 수면부족과 스트레스로 얼굴은 뒤집어지고 입안은 3주째 헐어 있었다. 가는 병원마다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하는데, 스트레스를 풀 방도가 없다.

“피로감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피부가 뒤집어지고 혓바늘이 났어요. 같은 증상이 반복되는데 약을 먹어도 낫지를 않아요. 스트레스가 문제라는데 그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요? 내 마음을 까 놓고 보여 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트라우마 치료를 할 때도 의사는 제 마음속 깊은 곳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라고 하는데 한계가 있더라고요. 치료 횟수가 늘어날수록 할 말은 없어지고. 마음의 상처를 꺼내 보여 줄 수도 없고.”

사고 후 다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로 향했던 그다. 10년 가까이 조선소에서 일한 영환씨가 현장으로 복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조선소에서 익힌 기술을 써먹을 곳이 없다”며 “사고 이후 평택 등지로 떠난 사람들이 있지만 일을 계속해야 했기에 사고 열흘 뒤에 현장으로 복귀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사고 난 현장에 인력을 투입하지 않았어요. 현장으로 들어가더라도 사고를 목격하지 않은 사람들을 선별해서 보냈는데, 나중에는 작업을 빨리 해야 하니까 저도 사고현장에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보다 먼저 현장에 들어간 동료들에 따르면 핏자국이나 사고 흔적이 고스란히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사고를 목격하고 동료를 잃은 노동자들에게 사고현장에서 일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영환씨와 함께 현장에 복귀한 초등학교 동창은 이를 악물고 일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친구에게 조선소 일을 권했던 것도 영환씨였다. 친구는 사고 충격으로 밤마다 울며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먹고살아야겠기에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일터로 향했다. 그런 친구에게 산업재해 신청을 권했지만 혹시라도 있을 불이익을 우려해 친구는 이마저 포기했다. 지금 영환씨의 친구는 수많은 노동자가 그랬듯 조선소를 떠났다.

영환씨는 사고 직후 자신이 느낄 만큼 작은 것에도 민감해했다. 지나가는 자동차 경적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점점 과격해지더니 부부싸움이 잦아졌다. 담장을 넘는 싸움소리에 경찰이 출동한 적도 몇 번 있다고 한다.

“2017년 9월쯤이었을 거예요. 집에서 부부싸움을 크게 했는데, 누구 하나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동생이 와서 치료를 권하더라고요. 그전에도 치료를 받으러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거든요. 약물치료로 과연 나아질 수 있을까 의문이 들더라고요. 다행히 주위 도움으로 산재를 신청하고 치료를 받게 됐어요. 약에 내성이 생겼는지 요즘은 효과가 썩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약마저 끊어 버리면 내가 더 난폭해질 것 같아서…. 나락으로 떨어지면 안 되잖아요.”

 

▲ 2017년 5월1일 발생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크레인 사고 피해자 김영환씨.<정기훈 기자>

끝을 알 수 없는 나쁜 생각
“내가 왜 사나 싶어요”


2년이 지났다. 당시만 해도 사고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이렇게 깊고, 오래갈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나마 치료를 받으며 조금씩 나아졌지만 전문적이고 집중적인 치료가 이뤄지지 않다 보니 회복을 위해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약에 대한 내성마저 커지는 상황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담금질하기를 수백 수천 번이다. 철희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의 마음을 다독인다. 사고로 동생을 잃은 그는 피해자이자 유가족이다. 그에게 그날의 사고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됐다.

“먼저 간 동생에게 가장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죠. 그런 마음이 계속 있으니 힘들 때면 동생과 내가 입장이 바뀌었으면 어땠을까 생각도 들고, 심할 때는 자살도…. 이런 마음을 가족에게 말하면 너무 힘들어질 것 같아 혼자 풀어내려고 해요.”

감정은 전이된다. 사고 트라우마는 피해자는 물론이고 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사고 당시 아내와 아이를 대구에 둔 채 홀로 거제에 머물렀던 영환씨는 사고 후 사람들을 피해 경기도 부천으로 이사했다.

“사고 직후였으니 제 증상이 지금보다 훨씬 심했어요. 동네에서 아는 사람들을 마주치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사람들을 피해 도망치듯 부천으로 올라왔어요. 그래도 여기엔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처음에는 서울로 상담을 다녔는데, 갈수록 집 밖을 나가는 게 힘들어지더라고요. 자꾸 부정적인 생각이 듭니다. 그날 사고로 죽은 사람들이 부럽더라고요. 그때 내가 깔려 죽었다면 가족에게는 미안하지만, 보상금으로 집이라도 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갈수록 움츠러들어요. 내가 왜 사나 싶기도 하고.”

억울했다. 책임을 져야 할 삼성중공업은 사과 한 번 하지 않았다. 형식적인 설문조사만 했을 뿐 피해자들의 고통은 외면했다. 그사이 사고 피해는 노동자 개개인에게 전이됐다. 그들의 삶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억울함이 분노가 되는 시간이었다.

철희씨는 최근 진주에서 발생한 방화사건을 언급하며 “두렵다”고 했다. “혹시라도 뉴스 속 인물처럼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면 너무 힘들어요. 두렵습니다.”

3개월마다 반복되는 산재 요양기간 연장심사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치나요?”


철희씨와 영환씨는 평균 2주에 한 번꼴로 병원을 찾는다. 트라우마로 산재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받을 수 있는 치료다. 그런데 환자가 많은 종합병원이다 보니 이들에게 주어지는 상담과 치료시간은 고작 10~15분에 불과하다. 2주간 어떻게 지냈는지, 상태가 어떤지를 이야기하고 나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2주간 먹을 약을 받아 집으로 돌아오는 게 그들의 일상이 돼 버렸다. 이것 역시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다. 3개월마다 반복되는 산재 요양기간 연장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더 이상 치료도, 휴업급여도 받을 수 없다. 당장 생계가 막막해진다. 철희씨는 산재 요양기간 연장심사 때마다 느껴야 하는 불안감과 모욕감을 털어놓았다.

“일을 못 하니까요. 괜히 놀면서 나랏돈 몰래 받아먹는 것 같은 비굴함도 들고. 돼지고기나 소고기처럼 등급판정을 받는 기분이 들었어요. 내가 얼마나 아픈지를 스스로 증명해야 치료를 계속 받을 수 있으니까요. 이런 기분 아무도 모릅니다.”

영환씨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요양기간이 종결되는 3개월째가 되면 항상 불안하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연장이 될까…. 마음의 상처를 꺼내 보여 줄 수도 없고. 나는 여전히 아픈데 당장 치료도 받아야 하고. 우리 가족에게 산재 휴업급여는 생존의 문제예요. 3개월마다 치료 종결 여부를 따지는 게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치는 것 같아 너무 화가 납니다.”

산재 요양기간 연장 여부는 전문의 의견서로 결정된다. 최근 3개월 산재 요양기간 연장을 승인받은 철희씨는 전문의 의견서 외에도 근로복지공단을 찾아가 추가진단을 받아야 했다. 15~20분 동안 의사들 앞에서 현재 상태와 환영·환청 정도를 설명했다. 길을 가다 크레인을 보면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길을 돌아가고, 두려움에 지하철을 탈 수 없다는 이야기도 했다.

“3개월마다 산재 요양기간을 연장하고 있습니다. 지난달에 추가진료를 신청했는데 승인이 안 나오더라고요. 공단 고양지사를 방문해 전문의들 앞에서 심사를 받고서야 인정됐어요. 다행히 7월까지 계속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죠.”

▲ 2017년 5월1일 발생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크레인 사고 피해자 박철희씨.<정기훈 기자>

“2017년 5월2일을 살고 싶어요”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피해자이자 목격자인 이들에게 휴업급여는 가족 생계를 꾸려 나갈 마지막 보루다. 철희씨도 영환씨도 가족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섰지만 기업들은 산재 인정자를 꺼렸다. 2주에 한 번 치료를 받기 위해 일을 쉬어야 하는 이들의 상황을 이해해 줄 회사는 없었다. 트라우마를 가지고 조선소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누구보다 일상으로의 복귀를 원하는 철희씨는 근로복지공단 문을 두드렸다.

“3개월마다 돌아오는 요양기간 연장심사 기간이 되면 공단에서 직업재활 프로그램 참여 소개 문자가 와요. 새로운 직업을 가지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공단에 전화를 했죠. 하지만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로 산재를 인정받은 노동자들은 장해등급 중에서도 가장 낮은 14등급을 받아요. 공단 직업재활 프로그램은 장해등급 12등급까지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저는 참여조차 할 수 없습니다.”

철희씨는 “동생을 위해서라도 예전처럼 땀 흘려 일하는 평범한 가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트라우마는 결국 화병이에요. 동생 죽음이 너무 억울해서. 억울함이라도 좀 풀렸으면 좋겠는데…. 이젠 제 마음을 속 시원히 풀어놓을 수도 없어요. 치료 초기에 보건소 자살예방센터 상담사가 매주 한 번씩 집으로 찾아와서 상담을 해 줬는데, 그때 마음이 많이 풀린 것 같아요. 환영과 환청도 호전됐고요. 한데 보건소에서 받는 치료는 산재처리를 할 수가 없어 중단했죠. 트라우마는 치료기간을 확정할 수 없어요. 반복증세가 심해지는 이유이기도 하죠. 제 아픔을 이해해 주는 사람과 전문적으로 깊게 상담하고, 다시 사회로 복귀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해요.”

2017년 5월1일 크레인 사고 후 수많은 사람이 현장을 찾았다. 그리고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비슷한 사고를 예방하겠다며 대책을 쏟아 냈다. 2년이 지난 지금, 피해자들과 함께하겠다던 이들은 더 이상 그들 곁에 없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약속했던 수많은 목소리는 허공으로 사라졌다. 영환씨는 말한다. “2017년 5월2일을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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