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설노조

2만2천900볼트 고압전류를 만지다 백혈병에 걸려 숨진 전기원 노동자가 최근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전기 노동자의 암 질환이 직업병으로 인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자파가 암 발병에 영향을 준다는 국내 첫 판정이다. 근로복지공단은 "전자파와 성인 백혈병 간 연관성을 증명할 증거가 부족하다"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역학조사 결과를 뒤집었다.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노동자 산재사건에서 "(역학조사로) 사실관계가 규명되지 않으면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정황으로 참작하는 게 마땅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산재 판단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산재를 판단할 때 역학조사 결과를 '거스를 수 없는 기준'으로 삼았던 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판단 관행이 바뀔지 주목된다.

역학조사 한계 인정한 서울질판위

1일 고용노동부·공단·건설노조에 따르면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2015년 5월31일 백혈병으로 사망한 장아무개(사망 당시 54세)씨 질병이 업무상재해에 해당한다고 지난달 27일 판정했다. 장씨는 한국전력 협력업체 소속으로 순천지역에서 26년간 배전설비 보수업무를 했다. 고무장갑만 끼고 전류가 흐르는 전선(활선)을 다루는 무정전 직접 활선작업을 했다.

평소 건강한 체질이었던 장씨는 2015년 1월29일 병원에서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장씨를 치료한 전남대병원은 "저주파에 의한 백혈병을 의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장씨는 투병 4개월 만에 사망했다. 유족은 같은해 7월21일 공단 여수지사에 산재 유족급여와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다. 전기원 노동자가 "전자파로 인해 백혈병에 걸렸다"며 산재를 신청한 첫 사례였다.

공단은 업무와 질병의 상관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작업환경과 관련한 역학조사를 의뢰했다. 공단은 역학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산재 여부를 판단한다.

연구원은 지난해 1월부터 11월까지 활선작업장 8곳(직접활선·임시송전공법·직접송전공법)에서 일하는 전기원 28명과 사선작업장 두 곳에서 일하는 전기원 9명을 대상으로 극저주파 자기장 노출 정도를 측정했다. 연구원이 올해 1월 공개한 '활선작업자 건강상태 및 관련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전기원 노동자들의 자기장 노출량은 다른 직업군에 비해 훨씬 많았다.<본지 2018년 1월11일자 2면 산업안전보건연구원 활선작업자 역학조사 결과 "작업자 기준치보다 높은 전자파에 상시 노출" 참조>

측정 결과 작업시간 동안 단 한 명을 제외한 37명이 10마이크로테슬라(μT)가 넘는 자기장에 노출됐다. 변전소 근무자(0.43μT)·용접작업자(0.95μT)·반도체공장 노동자(0.78μT)·LCD공장 노동자(0.51μT)의 자기장 평균 노출수준보다 크게 높다. 100마이크로테슬라를 초과하는 자기장에 노출된 작업자가 24명(65%)이었고, 1천마이크로테슬라를 초과하는 작업자도 두 명이나 있었다.

그런데 연구원은 "전자기장 노출이 활선작업자들의 건강장해에 영향을 미치는지 확증적 증거가 부족하다"고 봤다. 역학적 증거와 실험연구가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연구원는 "11개 연구논문 중 4개 논문에서는 극저주파 전자기장과 백혈병이 상관관계가 있다는 결과를 제시한 반면 나머지 7개 논문에서는 극저주파 전자기장과 성인 백혈병 간 역학적인 연관성이 없다고 발표했다"며 "문헌고찰 내용을 종합하면 소아 백혈병을 제외한 성인 백혈병의 경우 극저주파 전자기장과 백혈병의 연관성은 아직까지 그 결과가 일관성이 없다"고 밝혔다.

재해자 입증책임 완화 판례, 서울질판위에 영향 줬나

“문헌상 업무관련성이 밝혀진 바 없다”는 연구원 보고서와 서울질판위 판단은 달랐다. 외국에서는 우리나라 같은 직접활선 작업이 아니라 '스틱'을 이용한 간접활선 작업을 한다. 우리나라와 작업방식이 완전히 다른 외국의 부정적 연구 결과만 보고 업무관련성 여부를 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비판이 제기된 배경이다.

주평식 노동부 산재보상정책과장은 "엄밀히 보면 업무관련성이 낮은 게 아니라 의학적 인과성이 밝혀진 게 없는 상황"이라며 "의학적으로 밝혀진 바 없지만 개연성·유발성·유병률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장씨의) 백혈병과 업무관련성이 없다고 보기 어렵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서울질판위 판정은 직업성질환 관련 대법원 판례 경향과 일치한다. 대법원이 지난해 8월29일 원심을 파기하고 삼성전자 LCD사업부 천안공장에서 일하던 이아무개씨의 다발성경화증을 산재로 인정한 판결이 대표적이다. 대법원은 "첨단산업 분야에서는 직업병에 대한 경험적·이론적 연구 결과가 없거나 부족한 경우가 많다"며 "근로자에게 발병한 질병이 첨단산업 현장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유형에 해당하고 그 연구 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승현 건설노조 노동안전국장은 "자세한 내용은 판정문을 읽어봐야 알겠지만 서울질판위가 재해자 입증책임을 완화한 대법원 판례 경향과 전자기파 노출강도나 기간, 감전위험 때문에 극도로 긴장된 상태에서 일하는 전기원 작업환경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2016년 신청 10명 산재사건도 영향권
노동부 "사실관계 확인해 신속히 처리"


노조는 서울질판위 판정이 또 다른 전기원 노동자들의 산재 인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노조는 2016년 2월부터 석 달간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했고, 같은해 6월 암이나 뇌실혈관계 질환에 걸린 조합원 11명이 산재를 신청했다. 현재 10명이 남아 질판위 판정을 기다리고 있다.

석원희 노조 전기분과위원장은 "서울질판위 결정으로 볼 때 조합원 10명의 산재도 인정될 것"이라며 "한국전력이 전기원 노동자 작업환경 개선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노조에 따르면 한전 협력업체에서 일하는 전기원 노동자는 4천여명으로 추산된다. 주평식 과장은 "업무상질병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고 있다"며 "한 번 판단된 사건에 대해서는 신속하게 사실관계만 확인한 뒤 처리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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