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균형추는 심각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과 노사정 관계자들은 합의가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아니,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흔든 사람은 사실상 4명뿐이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 그리고 김대환 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위원장.

노사정위 노동시장구조개선특별위원회는 지난해 9월 출범했다. 노사정 협상이 본격화한 것은 같은해 12월23일 노동시장 구조개선의 원칙과 방향에 합의하면서부터다. 논의시한은 3월 말까지였다.

전문가들은 순서가 뒤바뀌었다고 지적했다. 한 나라의 노동시장 구조를 뒤흔드는 문제를 논의하는데 사전 공론화 작업도 없이 3개월 만에 합의하겠다니. 전문가들은 특히 중립성을 지켜야 할 정부가 주도하는 사회적 대화를 우려했다. 정부는 공정했다고 주장하지만 노사정 협상은 처음부터 한국노총만의 외로운 싸움이었다.

회의자료에 ‘정부(경영계)’안 표기 … 처음부터 3대 1 싸움

올해 2월27일 열린 노동시장구조개선특위 전문가 2그룹 회의. 한 공익전문가가 표를 제출했다.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통한 격차해소’ 방안에 대한 노사정 간 입장차를 정리한 표였다.<사진 참조>

그런데 내용이 희한했다. 공익전문가가 ‘정부(경영계)’를 한데 묶어 정리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노동계·경영계·정부로 구분해야 정상이다.

표에 따르면 노동계는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격차해소를 위해 원·하청 상생협력과 동반성장, 차별시정을 요구했다. 구체적으로는 기업의 초과이익 공유, 퇴직급여 조건 완화, 노조에 차별시정 대리신청권 부여를 제안했다.

반면 '정부(경영계)'는 근로조건 관련 제도와 관행, 고용·근로계약 관련 제도와 관행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근로조건(취업규칙) 불이익변경과 일반해고·저성과자 해고’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실제 정부와 경영계가 전문가그룹 논의 과정에서 하나의 목소리를 낸 것인지, 아니면 공익전문가가 정부와 경영계의 의견을 듣고 비슷하다고 판단해 그런 표를 그린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노사정 협상 결렬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사안과 관련해 정부가 재계 주장에 동의했거나, 아니면 재계가 정부 주장에 동의했다는 정황은 확인된 셈이다.

당시 전문가그룹 회의에 참가했던 이정식 한국노총 사무처장은 “해당 표가 실린 문건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며 “정부가 일방적이고 편향적으로 추진한 노사정 협상이 가진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 준 사례”라고 비판했다.

“일반해고 기준, 공론화할수록 합의 불가”

정부·재계·노사정위는 대타협 실패 책임을 한국노총에 돌렸다. 마지막 협상이었던 이달 7일 한국노총이 추가로 5개 요구안을 던졌기 때문이라고 한목소리로 지적했다. “일반해고·취업규칙 변경 요건에 대한 기준과 절차를 마련하는 것은 해고와 취업규칙 변경을 쉽게 하는 게 아니다”고 여러 차례 말했는데도 한국노총이 알아듣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과연 한국노총이 못 알아들은 것일까. 한국노총만의 책임일까. 협상 초기부터 토론회 등의 자리에서 정부개입 자제와 중립성 유지, 단계적 합의를 강조했던 정이환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사회학)는 “사회적 공감대가 부족한 상황에서 일반해고 요건에 대한 것을 정부가 밀어붙인 것이 노사정 협상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정 교수는 “노동시장구조개선특위 내에서 보수적인 공익위원들조차 통상임금 같은 3대 현안에 대한 합의를 먼저 하자고 의견을 냈는데, 정부는 기획재정부의 계획을 관철하려고만 했다”고 말했다.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 요건에 대한 문제는 사회적 공론화를 진행했더라도 합의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사회적 대화를 할 때 언론 등을 통해 공론화하는 과정은 필요하다. 그런데 일반해고 요건이나 취업규칙 변경은 공론화를 하면 할수록 반대 의견이 커지는 사안이다. 한국노총이 합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일부에서 한국노총 집행부의 지도력을 문제 삼는데, 현장 정서를 무시하고 결단한다고 해서 지도력이 높은 건 아니다.”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노사·사회정책연구본부장의 설명이다.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 요건에 관한 절차·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현장 노동자 입장에서 해고와 근로조건 저하를 쉽게 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밀어붙이기 위해 말 바꾼 노동부

그토록 3월 내 일괄타결을 요구했던 노동부의 태도는 노사정 협상 결렬 직후 돌변했다. 한국노총이 협상 결렬을 선언한 다음날인 이달 9일 이기권 장관은 기자브리핑을 갖고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 요건 논의 철회 등) 한국노총이 협상재개 선결조건으로 요구하는 사항들도 노사 간에 근본적인 시각차가 있는 사안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완전합의를 이루기까지는 그 기일을 기약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괄타결이 가능하다"에서 "기일을 기약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태도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노사정 의견이 접근된 근로시간단축이나 통상임금 범위에 관한 입법을 먼저 추진하겠다는 게 노동부의 주장이다. 이 장관은 13일에는 지방노동청장들을 불러 놓고 “노동시장 구조개선은 앞으로 2~3년 걸릴 것”이라며 “그때까지 빅딜과 스몰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3개월 만에 노동시장 구조개선에 합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전문가 의견을 외면한 노동부가 노사정 협상이 결렬되자 그 책임을 한국노총에 돌린 뒤 스몰딜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 장관은 불과 일주일 전인 이달 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의제를) 분리하거나 연장하는 일은 없다. 일괄타결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3개월 안에 합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부 계획을 강행하기에 앞서 명분을 쌓으려고 노사정 대타협을 추진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일반해고·취업규칙 변경 요건과 관련한 가이드라인 마련 여부는 노사정이 합의에 실패한 사안이다. 그럼에도 노동부는 5~7월 안에 가이드라인과 지침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전문가와 노사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그럴 거면 단계적 합의를 하지 그랬나. 한국노총은 이미 가이드라인에 반대한다고 했는데 무슨 의견을 수렴하냐”는 취재진 질문에 이 장관은 이렇게 답했다.

“아쉬운 대목이기는 하다. 처음부터 큰 틀을 정해 놓다 보니 중간에 (의제를) 떼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현장에 답을 줘야 하는 집행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노동계 요구처럼) 철회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발표할 가이드라인을 3개월 동안 80여 차례나 힘들게 논의한 셈이다. 역시 사회적 대화는 명분 쌓기에 불과하다는 의심을 남기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해 이 장관이 21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업무보고에서 한 해명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국노총이 협상 결렬을 선언하면서 전체를 한꺼번에 합의하는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부분부분 시행할 것은 시행하고, 방향이 모아진 것은 입법하면서 논의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일괄타결은 불가능하다는 대다수의 예상을, 이 장관만 협상이 결렬된 뒤에야 깨달았다는 걸까.

회의록도 없는 사회적 대화기구

합의에 실패한 것만큼이나 노사정 대화의 위상을 떨어뜨린 것은 ‘의견접근 논란’이다.

정확하게 89개 세부과제 중 비정규직 문제와 일반해고·취업규칙 변경 요건, 최저임금제도 개선안, 주말근무 수당 할증 방법을 빼고는 의견접근을 하거나 공감대를 이뤘다는 것이 노동부와 노사정위 주장이다. 반면 한국노총은 이를 부인했다.

그런데 처음 조정안(의견접근안)을 만들었다는 이달 2일을 포함해 7일 8인 연석회의와 대표자회의 회의록이 없다. 노사정위 운영세칙에 따르면 사무처장(상임위원)은 각급 위원회 회의 결과 보고서와 회의록을 작성하게 돼 있다.

최영기 상임위원은 국회 업무보고에서 “8인 연석회의와 4인 대표자회의는 공식회의가 아니고 일종의 협상팀”이라며 “거기서 오가는 얘기를 회의록에 남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고 답했다. 최 상임위원은 “회의 결과는 (9일 마지막 특위회의에) 합의초안으로 보고됐다”고 말했다.

협상팀이라서 회의록이 없어도 된다는 말은 쉽게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다. 더구나 16명의 특위 위원들 중 대표자회의나 8인 연석회의에 참가해 본 적이 없는 10명의 위원들은 전체회의에서 일방적으로 보고된 합의초안만 믿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협상 막판에 특위는 허수아비로 전락했다”며 “연석회의와 대표자회의에 들어가지 못한 우리는 경총으로부터 정보도 원활히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법에 따라 운영되는 대통령소속 사회적 대화기구의 현실이다.
 

"사회적 대화기구 전면개편" 목소리 커져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노동시장구조개선특별위원회 협상이 불발되면서 노사정위 개편을 비롯해 사회적 대화의 얼개를 새로 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국회에는 2013년 10월 김성태 새누리당 의원과 김경협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각각 발의한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법 개정안이 계류돼 있다. 청년과 비정규직·시민사회단체·중소 영세상인 대표를 참여시키고 논의구조를 단순화하는 것이 골자다. 정부와 노사정위는 개정안이 통과되면 협상단체의 대표성이 격상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개정안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민주노총과 취약계층을 참여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민주적인 정책협의를 구현하도록 사회적 대화기구를 전면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사정위 공익위원들이 정부 입장에 가까운 인사들로 채워지면서 사회적 대화가 정부가 짠 계획대로 움직이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이 교수는 “노동시장 구조개선 논의에서 대표자회의 밀실협상이나 회의록 부재 논란이 발생한 것도 노사정위 공식 회의체계가 형식에 그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당분간 중앙 차원의 사회적 대화보다는 산업별·지역별 대화에 주력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와 98년 노사정위 합의를 제외하고 사회적 대화는 15년 동안 정부의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정당화하는 수단이었다”고 비판했다.

한국노총은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헌법기구인 국민경제자문회의를 사회적 대화기구로 만들고, 지금의 노사정위는 사무국 역할을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노사가 노사발전재단에서 주요 의제를 먼저 논의한 다음 노사정위와 국민경제자문회의로 이어지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것이다. 정문주 한국노총 정책본부장은 “사회적 대화기구의 예산·인력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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