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교사 성폭력 사건이 벌어진 A조 마방. 오른쪽 미닫이 문이 마필관리사들이 평소 휴식을 취하거나 야간 당직을 설 때 자는 방이다.
▲ 2평 남짓한 마필관리사들의 방
▲ 마방 내 남녀공용 화장실의 모습. 양변기가 있는 쪽에서 샤워를 할 수 있다.

여러 조가 쓰는 공동 말간(마구간)이 된 마방은 을씨년스러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산경남경마공원 33개 마방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성적을 내던 A조의 마방이었다. 마방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각종 대회 우승기들이 A조의 화려한 성적을 짐작케 했다.

그랬던 A조가 지난달 해체됐다. 지난해 12월 이곳 조교사 B씨가 마방에서 야간당직을 서던 여성 마필관리사 C씨를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한국마사회 부산경남심판위원회는 지난달 12일 "조교사로서 품위를 손상했다"며 B씨에게 조교정지 처분을 내렸다. B씨는 현재 강간미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상태다.

B씨가 조교정지 처분을 받으면서 그와 고용계약을 맺었던 10여명의 마필관리사들과 말들은 다른 조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게 A조 마방은 공동 말간이 됐다.

지난 14일 부산 강서구 부산경남경마공원에서 만난 한 마필관리사에게 '그 사건'에 대해 묻자 "경마장 분위기가 아주 싸늘하다"며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개인(조교사)이 잘못된 행동을 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고 귀띔했다.

또 다른 마필관리사는 "공간 문제만 해결됐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직이 문제"라는 마필관리사도 있었다. 그는 "우리 (남성 마필관리사들) 자체가 열악하게 일하고 있는데, 극소수인 여성 마필관리사들이 제대로 된 대접이나 받을 수나 있겠냐"고 반문했다.

남녀공용 화장실에다 샤워장도 없어

빈번한 산업재해와 고용불안에 시달리면서 이른바 '3D 업종' 종사자로 불리는 마필관리사들. 그중에서도 극소수인 여성 마필관리사들의 처우는 상상 이상이다.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경마업계에 다부지게 도전장을 내밀며, 남성 마필관리사들과 어깨를 견주고자 했던 여성 마필관리사들은 기본적인 시설조차 없는 일터에서 성희롱과 성폭력에 노출된 채 조금씩 꿈을 접어야 했다.

서울·부산경남·제주경마공원 가운데 여성 마필관리사를 채용하는 곳은 부산경남경마공원이 유일하다. 인원은 많지 않다. 노동조건이 좋지 않고 노동강도가 세서 이직률이 높은 편이다. 지난해 2명이었던 여성 마필관리사는 성폭력 사건 이후 피해자가 일을 그만두면서 1명밖에 남지 않았다.

2007년 이진실씨가 첫 여성 마필관리사로 입사했을 때 언론은 "한국 경마 80년 역사상 최초"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마사회는 걸맞은 대우를 해 주지 않았다. 마필관리사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마방에 휴게공간은커녕 화장실이나 샤워장도 만들어 주지 않았다.

여성 마필관리사들은 눈치를 보며 마방 내 남녀공용 화장실을 쓰거나 다른 건물까지 내달려야 했다. 먼지와 땀에 젖은 몸을 바람에 말리며 퇴근시간을 기다렸다. 결혼 후 일을 그만둔 이진실씨는 "여성 마필관리사들을 위한 시설이 아예 없었다"며 "행정센터 쪽에 있는 샤워장도 처음엔 사용을 못하게 하다가 계속 요구를 한 끝에 겨우 쓰게 했다"고 말했다.

현재 부산경남경마공원의 유일한 여성 마필관리사인 임영은(가명)씨는 "남성 마필관리사들과 화장실을 함께 써서 불편했다"며 "생리기간에는 괜히 더 눈치가 보이고 신경이 쓰인다"고 토로했다.

한 마필관리사는 "2007년 여성 마필관리사가 처음 들어왔을 때 마사회에서는 공간도 없고 돈도 없으니 조교사한테 알아서 하라고 했다"며 "남자랑 여자랑 서로 조심하며 대충대충 지금까지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마방에 있는 샤워장도 말이 샤워장이지 화장실 변기 있는 곳에 샤워꼭지 하나 달아 놓은 것"이라며 "남자들이야 대충 씻고 넘어가지만 여자들은 거기서 못 씻고 집에 가서 씻었다"고 말했다.

잠금장치로 없는 방에서 야간당직

성폭행 미수사건이 발생한 장소는 마방 안에 있는 작은 방이다. 새벽 4시부터 일을 시작하는 마필관리사들은 마방을 청소한 뒤 경주마를 이끌고 놀이운동이나 훈련을 한다. 아침밥을 주는 오전근무를 마친 뒤 작은 방에서 휴식을 취한다. 야간당직을 설 때도 이곳에서 잠을 잔다. 출퇴근 시간을 줄이기 위해 아예 숙식하는 마필관리사들도 적지 않다.

2평 남짓한 공간이기 때문에 남성 마필관리사들은 새우잠이라도 자지만 여성 마필관리사들은 마땅히 쉴 곳이 없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남성들 사이에 다리를 뻗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다.

조교사가 배려를 해 주는 조의 경우 마방 한쪽에 마련된 조교사방을 여성 마필관리사에게 내주기도 하지만 조마다 사정이 다르다.

C씨는 배려받지 못한 경우다. 크리스마스날 당직이었던 C씨는 저녁 8시에 일을 마치고 작은 방으로 들어와 잠을 청했다가 새벽녘에 일을 당했다. 문에는 그 흔한 도어록도 없다. 당직을 서는 마필관리사들은 혹시 모를 말의 산통(배앓이)을 알아차리기 위해 문을 열어 놓고 자야 한다.

전국경마장마필관리사노조 부산경남경마공원지부 관계자는 "여자는 야간당직을 빼 주든가 아니면 최소한 안전장치라도 해 놓고 당직을 서야 한다"며 "아무것도 안 해 주고 의무만 다하라고 하다 이 사달이 난 것"이라고 씁쓸해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막말로 여성 마필관리사 혼자 당직을 서는데 남성 마필관리사나 조교사들이 술 먹고 문 열고 들어오면 어떻게 되겠냐"고 되물었다.

현재 마필관리사들 사이에서는 여성 마필관리사를 야간당직에서 빼야 한다, 야간당직을 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야간수당이 걸린 민감한 사안인 데다, 누구 하나를 당직에서 빼면 다른 사람의 노동강도가 높아지는 문제를 무시할 수도 없다. 지부 관계자는 "쉽게 결정할 사안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야간당직이 무용하다는 것에는 상당수 마필관리사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예컨대 밤새 말들이 산통을 겪거나, 드러누워 사욕(모래목욕)을 하다 일어나지 못해 질식사하는 경우를 예방하기 위해 야간당직을 서는데, 이는 사전예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 제주경마공원과 서울경마공원은 각각 지난해 1월과 2월에 야간당직을 폐지했다. 서울경마공원은 정년퇴직한 마필관리사들을 채용해 야간 순찰조를 돌리고 있다.

"마사회, 마필관리사 노동환경 개선해야"

성폭력 사건 이후 변한 것이라고는 남아 있는 여성 마필관리사 임영은씨가 속한 마방에 여성 화장실이 만들어졌다는 정도다. 공동화장실에서 남자 소변기를 떼어 내고, 문 앞에 '여자 화장실' 스티커를 붙여 놓은 게 전부다. 마방 내 조교사 방을 사용하고 있는 임씨는 "화장실을 만들어 주는 김에 방문에 도어록도 달아 달라"고 마사회에 요구했지만 "개인 돈으로 해야 한다"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노조는 마사회에 여성 마필관리사들을 비롯해 전체 마필관리사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이해경 노조 정책실장은 "마사회는 경마장의 모든 시설을 관리·유지·보수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마사회가 조교사들에게 마방을 대여해 주는 만큼 시설을 개선해 줘야 하는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마사회가 조교사들에게 책임을 떠넘겨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당장 조교사들 사이에서 "어디 신경 쓰여서 여성 마필관리사들을 쓰겠냐"는 얘기가 나오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해경 실장은 "여성 마필관리사들의 고용불안은 물론이고 채용기회 자체가 사라질 가능성도 있다"며 "공기업인 마사회가 여성 일자리 창출 측면에서라도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에 대해 마사회 부산경남경마공원 관계자는 "시설에 미진한 부분이 있긴 하다"면서도 "부산경남경마공원으로 발령받은 지 얼마 안 돼 자세한 상황은 잘 모르겠다"고 답변을 피했다.

박봉철 노조 위원장은 "여성 마필관리사들이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는 기본적인 시설조차 만들어 주지 않고 있는 마사회에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경마산업 재해대책협의회' 뜬다

마사회-민주당 을지로위원회-마필관리사노조 참여



마사회가 마필관리사의 처우 문제에 아예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몇 차례 마필관리사들의 처우개선 요구를 받아들여 실행한 적도 있다. 그런데 대부분 마필관리사 사망사고가 일어난 뒤거나 언론의 관심이 쏟아질 때 '입막음용'으로 진행됐다. 그마저도 실효성 있는 대책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마필관리사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마필관리사노조에 따르면 2009년 2월 마필관리사 김용진씨가 새벽 출근 중 교통사고로 차량이 강으로 추락해 숨졌다. 이후 마사회는 통근버스를 운행했다. 하지만 통상 새벽 4시부터 일을 시작하는 마방에서 새벽 5시에 경마공원에 도착하는 통근버스를 조교사들은 마뜩지 않아 했다. 심지어 조교사들은 통근버스를 이용해 출근하는 마필관리사들의 월급을 깎는 등 불이익을 줬다. "남들보다 1시간 늦게 온다"는 이유에서다. 마필관리사들의 통근버스 이용실적은 급락했다.

2010년에는 부산경남경마공원에서 조교사의 상습적 폭언에 시달리던 여성 기수가 자살했다. 언론의 질타를 받은 마사회는 '경마환경 개선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당시 마사회는 기수들에 대한 처우개선과는 별도로 마필관리사들의 복지 개선을 위해 경마공원 안에 40여개의 숙소를 짓기로 했다.

그런데 숙소 부지 지반침식을 이유로 마방 내 마필관리사 방을 복층으로 개조하는 데 그쳤다. "냉·난방비가 많이 나온다"며 복층 사용을 금지하는 조교사들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필관리사들의 요구를 대부분 무시했던 마사회가 올해부터는 타의에 의해서라도 변화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민주당 을지로위원회와 마사회, 마필관리사노조는 다음달 중으로 '경마산업 재해대책협의회'를 꾸린다.

을지로위는 지난해부터 마필관리사들의 산재문제와 처우개선을 위해 마사회의 전향적 태도변화를 요구했다. 몇 차례 의원 간담회를 거친 뒤 마사회가 을지로위의 중재안을 수용했다. 마사회는 경마장별로 경마산업 재해대책협의회를 설치·운영하고, 노조가 참여하는 경마산업 재해대책중앙협의회를 상시적으로 운영할 방침이다.

노조 관계자는 "이제껏 마사회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미봉책으로 일관해 왔다"며 "재해대책협의회 구성을 계기로 마사회가 근본적이고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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