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노동시간은 예측이 불가능해지고, 집중노동은 더욱 강화한다. 이를 위해 노조와 노동자의 힘은 뺀다. 12일 미래노동시장연구회가 발표한 권고문이 가리키는 정책 방향과 목표는 이 문장으로 요약된다.

연장노동시간 관리단위 확대
선택근로제·탄력근로제 확대
“노동시간 유연화하자” 물량 공세

전문가의 입을 빌린 윤석열 정부의 노동정책 밑그림이 나왔다. 노동시장연구회는 이날 오전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노동시간·임금체계 개편 내용을 담은 권고문을 발표했다. 권고 내용은 지난 7일 있었던 ‘당·정 정책 현안 간담회’에서 공유했던 것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연장근로시간 관리단위를 현행 ‘주’ 단위에서 ‘월·분기·반기·연’ 단위로 늘릴 것을 권고했다. 연구회 권고가 나오기 전 이미 정부 차원에서 대책마련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 연구회였다는 비판은 더욱 피해가기 어렵게 됐다.

노동시간과 관련해 연구회가 내놓은 권고는 크게 다섯 가지다. 연장근로시간 관리단위를 늘리고,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기간과 적용 대상을 확대하고, 탄력적 근로시간제 효율성을 높이고,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를 도입하고, 고소득 전문직 등에는 근로시간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 방안이다.

현재 1주 단위로 12시간의 연장노동시간을 허용하는 제도를 월 단위 이상으로 바꾸면 어떤 일이 가능해질까. 월 단위면 사용자는 52.2시간의 연장노동을 한 주에 몰아서 시킬 수 있다. 연구회가 건강권 보호 방안이라며 제시한 근로일 간 11시간 연속휴식을 부여하더라도 하루 11.5시간, 주 6일 근무할 때 69시간까지 장시간 노동이 가능해진다. 분기면 3개월에 156.6시간을, 반기는 313.2시간을, 연 단위는 626.4시간의 연장노동을 특정 시기에 몰아서 시킬 수 있다. 연구회는 관리단위가 길어지면서 초래할 수 있는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분기는 140시간(90% 수준), 반기는 250시간(80% 수준), 연 단위는 440시간(70%) 수준으로 연장근로시간 총량을 감축하라고 권고했다. 선의를 담아 총량 감축을 권고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간담회에 참석한 엄상민 경희대 교수(경제학)는 “사업장의 연장근로 활용을 살펴봤더니 가장 많이 일한 달 대비 3개월의 평균 노동시간은 사업체 평균의 90%, 6개월 중 가장 많이 일한 달 대비로는 평균 80%가량이었다”며 “사업체들이 하는 행태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에서 하라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선택근로제는 근로자대표와 서면합의를 하면 일정 기간 단위로 정해진 총노동시간 범위에서 하루 노동시간을 노동자가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제도다. 현행 1개월인 정산기간 평균 연장근로시간이 1주 12시간을 넘지 않으면 무제한 노동을 할 수 있다. 24시간 일하고 이틀을 내리 쉬는 형태의 근무가 가능하다. 연구회는 연구개발 업종 외 1개월로 제한된 적용 대상을 전 업종에 적용하고, 정산기간도 3개월로 늘리자고 권고했다.

탄력근로제 활용성을 높일 방안을 강구하라는 권고도 포함했다. 연구회는 “현행 3개월 이내 탄력적 근로시간제는 사전에 근로일별 근로시간을 명시하게 돼 있어 활용이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실효성 제고 방안을 마련하라고 제안했다. 장시간 노동 예방 등을 위해 근로자대표와 서면합의로 대상 노동자 범위와 단위기간, 근로일, 근로일별 노동시간과 유효기간을 사전에 정하도록 한 현 제도를 개편해 더 쉽게 사용할 수 있게 하라는 취지다.

근로자대표제 정비 없는 노동시간·임금체계 개편 권고

이 같은 연장근로시간 관리단위 확대, 선택근로제 정산기간·적용 대상 확대, 3개월 이내 탄력근로제 활성화 방안은 이름은 제각각이지만 현실화하면 노동시간이 극도로 유연화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 가지 권고 중 하나만 도입되더라도 비슷한 효과가 나타난다.

임금체계 과제로는 직무·성과급제를 제시했다. 공정한 평가와 보상이 가능하도록 직무평가와 기준, 평가 도구를 개발·보급하라고 권고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을 목표로 원·하청, 고용형태에 따른 임금 격차 완화를 위한 직무·숙련 중심의 임금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도 주문했다.

이런 노동시간 유연화·임금체계 개편을 현실화하기 위해 연구회가 내놓은 방안은 근로자대표제 활용이다. 사업장에 새로운 노동시간제도를 적용하려면 반수 이상 조직된 노조나 근로자대표와 합의해야 한다. 지난해 노조 조직률은 14.5%에 불과 85.5%의 노동자는 노조가 없다. 유명무실한 근로자대표를 통해 노동시간을 사용자 입맛에 맞게 개편하는 사업장이 나올 수 있다. 연구회는 “근로자대표의 민주적 정당성 강화를 위한 선출 절차 등을 마련하라”고 권고했지만 노동시간·임금체계 권고 부문이 아니라 ‘추가 주요 과제’로 넘겼다. 근로자대표제 개선을 노동시간·임금체계 개편의 전제조건으로 규정하지 않은 셈이다.

반면 권고 현실화에 걸림돌이 되는 근로자대표제 부분은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구회는 임금체계에 직무·직종·직군의 다양성이 반영될 수 있도록 취업규칙 변경 동의 주체 범위를 명확히 하는 법·제도 개선방안을 모색하라고 대안을 제시했다. 직무·직종별로 임금체계를 개편하기 위해 노동자집단을 쪼개는 등 부분 근로자대표제를 도입하자는 얘기다.

연구회는 이날 권고문 발표로 활동을 종료한다. 16일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권고문을 전달할 예정이다. 노동부는 권고문을 중심으로 이행 방안을 수립한다. 노동시간과 근로자대표제 분야는 입법이 필요해 국회 논의로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 여소야대 국회이지만 입법 논의가 촉발할 가능성은 있다. 노동자·사용자 개념을 확대하고 쟁의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내용의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 논의 과정에서 여당이 권고문을 반영한 관련 법안의 논의를 요구할 수 있다.

노동계는 연구회 권고가 정부 청부로 이뤄진 용역결과물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한국노총은 이날 입장문에서 “권고는 노동자의 자율적 선택보다는 노동시간에 대한 사용자 재량권을 확대시켜 장시간 노동체제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며 “향후 임금체계 개편과 관련한 모든 활동과 계획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민주노총은 “임금체계 개편안은 평생을 적게 받고 많이 일하라는 것”이라며 “역대 어느 정권도 노동개악을 밀어붙이고 성공한 적이 없다는 것을 다시 상기시켜 준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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