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명 위원장 등 한국노총 관계자들이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기 앞서 지난달 희망퇴직 직후 극단적 선택을 한 한국머크 노동자를 위한 묵념을 하고 있다. 한국노총

독일계 제약회사인 한국머크는 지난해 전국에 있는 순환기내분비사업(GM)부 소속 직원 35명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문아무개씨도 희망퇴직 대상자에 포함됐다. 몸이 아픈 아내를 돌보며 어린 아이를 키우는 그는 마지막까지 고심하다 지난해 11월27일 희망퇴직 접수 만료일에 신청서를 냈다. 회사는 희망퇴직자에게 구직활동을 지원한다며 올해 5월까지 본인이 퇴직일을 선택하도록 했다. 하지만 문씨의 삶은 희망퇴직 신청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조영석 한국머크노조 위원장은 문씨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억했다.

“지난달 10일 전화가 왔어요. 펑펑 울면서 힘들다고, 끝까지 못 싸워서 미안하다고 말하더군요. 그리고 다음날 극단적인 선택을 했어요. 회사는 ‘고인의 죽음에 최대한 예우를 갖추겠다’면서도 회사 책임은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 희망퇴직을 끝까지 거부한 11명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십니까? 지방에 있는 집을 놔두고 서울로 올라와 반지하 방에 살면서 책상도 없이 다른 부서 업무보조를 두 달씩 돌면서 일해요. 회사를 나가라는 얘기나 다름없죠. 이들 대부분 40대입니다. 회사는 이들 대신 저렴한 임금으로 30대를 채용해서 쓰고 싶어 합니다. 지난해 1천2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한국머크는 정리해고를 할 수 있는 요건이 되지 않으니 이런 식으로 희망퇴직을 받아서 40대 직원들을 내보내는 겁니다.”

고인이 된 문씨 역시 40대였다. 노동시장에서 40대 취업자가 끝도 없이 추락하고 있다. 한국노총은 12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40대 취업자 감소 원인은 정리해고와 권고사직, 휴·폐업 같은 비자발적 사유로 일자리에서 밀려나기 때문”이라며 “해고제한법을 도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노총은 이날 기자회견을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와 함께 열었다.

노동시장에서 소리 없이 퇴출되는 40대

40대나 50대에 정년퇴직한다는 ‘사오정’, 50~60대까지 회사 다니면 도둑이라는 ‘오륙도’는 고릿적 얘기가 아니다. 쉬운 해고가 40대 노동자를 거리로 내몰고 있다. 수원에서 20년간 형틀목수로 일한 남궁태 건설산업노조 현장분과 경기남부지부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얼마 전 해고된 조합원들 사례를 전했다. 평택시 고덕지역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조합원 26명이 휴대전화 문자로 해고통지를 받았다. 문자메시지에는 “근로계약일이 만료돼 근로계약 해지 통보를 발송한다”며 “근로계약 종료로 노무비 지급을 불허하며 현장 출입을 금하니 양해 부탁드린다”고 적혀 있었다.

남궁태 지부장은 “문자 어디에도 해고사유가 없다. 노동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하다가 하루아침에 쫓겨났다”며 “보통 서너 달 정도 현장에서 일하는 건설노동자들은 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 판정을 받더라도 돌아갈 사업장이 사라져 아무런 구제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용이 불안하니 건설현장에 젊은이들이 오지 않는 것”이라며 “70대 고령자와 외국인 노동자만 남은 건설현장에서 40대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숨 지었다.

글로벌 기업인 한국화이자제약 노동자들도 고용불안에 떨고 있다. 한국화이자제약은 2018년 12월 특허가 만료된 약품만 판매하는 사업부와 특허를 유지하는 약품 판매 사업부를 분할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회사는 “글로벌 화이자 비지니스을 위해 필요한 절차”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5월 특허유지 사업부가 분리돼 한국화이자업존이라는 법인이 설립됐다. 그런데 회사는 법인 분할 두 달 만에 화이자업존을 마일란이라는 회사와 합병하겠다고 밝혔다. 합병기업 이름은 비아트리스로 독립법인으로 운영한다. 비아트리스는 2023년까지 연간 1조2천억원 규모의 비용절감 프로젝트를 실시한다는 계획도 함께 발표했다. 말이 합병이지 사실상 매각이나 다름없는 결정이다. 회사 방침에 따라 화이자제약 노동자는 화이자업존으로 전적할 수 있지만 이미 화이자업존에 소속된 노동자는 화이자제약으로 옮길 수 없다.

강승욱 한국화이자제약노조 위원장은 “회사가 법인분할을 결정하고 전적을 요구하면 노동자는 거부할 길이 전혀 없다”며 “화이자업존 노동자들은 회사에 대한 배신감과 상실감·두려움이 가득하다”고 말했다. 화이자업존 노동자는 대부분 30대 후반부터 40대다. 회사를 나가게 될 경우 새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조건이다. 강 위원장은 “합병회사가 2023년까지 비용절감을 위한 프로젝트에 돌입하겠다고 밝힌 만큼 가장 손쉬운 방법인 희망퇴직을 통한 인건비 절감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자영업에 뛰어는 40대 사정도 마찬가지다. 이호준 한국편의점네트워크 사무총장은 “고용시장에서 떨어져 나와 창업을 하는 이는 대부분은 40대”라며 “특별한 기술이 없으면 프랜차이즈 업종을 선택할 수밖에 없고 대기업과 가맹계약을 맺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불공정한 가맹수수료에 대해 전혀 모르는 채 창업시장에 뛰어든 40대 사장님들은 기대만큼 수익이 나지 않아 폐업에 직면하게 된다. 이호준 사무총장은 “결국 또 다른 프렌차이즈로 이동하거나 더 열악한 고용시장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저임금 굴레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다”고 토로했다.

40대 고용대책 준비하는 정부
한국노총 “해고제한법 만들자”


정부도 40대 고용부진에 한숨이 깊다. 정부부처 합동TF를 구성해 다음달까지 40대 고용대책을 내놓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한국노총은 해고제한법 같은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문주 정책본부장은 “40대 취업자 감소의 근본문제는 임금노동자의 고용불안과 자영업자에 대한 대기업 갑질, 과당경쟁인데 정부가 검토 중인 대책에는 40대 임금노동자 고용안정이나 불공정거래행위 근절 같은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고 창업지원, 고용서비스 확대 프로그램만 나열하는 수준”이라고 꼬집었다. 한국노총은 40대 노동자가 정년까지 주된 일자리에서 일할 수 있도록 조기퇴직 예방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희망퇴직이나 권고사직 같은 조기퇴직 절차와 요건으로 △90일 전 퇴직 예고, 3개월분 이상 퇴직예고수당 지급 △집단동의 또는 노동부 인가 절차 마련 △전직지원 서비스 지원을 포함하라는 요구다.

고용형태 공시제를 50명 이상 사업장까지 확대하고 고용불안 기업에는 고용부담금을 부과하거나 고용보험상 경험요율제를 도입해 마련한 재원으로 구조조정 희생자 구제와 퇴직자 지원에 활용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구조조정 수단으로 악용되는 회사 합병·분리·사업양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양수인에게 포괄적으로 고용승계의무를 부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은 “더 이상 구조조정 희생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며 “다가오는 4·15 총선에서 정치권이 노동자의 절박한 요구를 받아 해고제한법을 입법하고 고용안정을 도모해 달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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