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차례 전체회의(공청회 제외), 여섯 번의 공직선거법 심사소위원회, 공청회 세 번, 그리고 단 한 건의 법안 통과. 올해 3월18일 출범한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100여일 동안 거둔 성적표다. 헌법재판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해 10월과 올해 2월 각각 기존 선거제도의 틀을 바꿀 만한 파격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헌법재판소는 선거구별 인구수 편차를 3대 1까지 허용하는 현행 선거제도가 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며 국회에 이를 2대 1로 줄이라고 통보했다. 중앙선관위는 총 300석의 의석 중 비례대표를 100석으로 하고, 의석을 정당 득표율에 따라 배분하는 내용의 정치관계법 개정 의견을 국회에 제출했다.

대통령 직선제와 소선거구제를 골자로 한 현행 선거제도는 87년 민주화 운동의 산물이다. 하지만 선거가 단일 거대 여당 대 다수 군소 야당 구도로 반복적으로 치러지면서 부작용이 드러났다. 지역구 중심의 소선거구제에서는 어느 지역에서 누굴 찍었느냐에 따라 유권자 사이의 표 가치가 현격히 갈리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 결정과 중앙선관위 의견은 이를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유례없이 선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이번이 '30여년 만에 찾아온 정치개혁의 적기'라는 기대까지 나왔다. 그런데 정치개혁특위는 활동이 반환점 훌쩍 지난 현재까지도 이렇다 할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정치개혁특위의 활동 시한은 8월31일 마무리 된다. 무엇이 문제일까.

국회, 헌재 판결 반대입법에 헌법소원까지

“미안한 말씀이지만, 개별 의원님들의 이름으로 나와 있는 안은 헌법재판소 결정을 전면으로 위배하고 있습니다.”

이달 11일 열린 정치개혁특위 산하 공직선거법 심사소위원회에서 박범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한 발언이다. 이날 심의 테이블에 오른 장윤석 새누리당 의원과 같은 당 황영철 의원이 각각 발의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두고서 나온 얘기다.

장 의원은 인구수와 관계없이 선거구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자치구·시·군의 수가 3개를 초과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을, 황 의원은 3개 이상의 자치구·시·군이 하나의 선거구를 구성할 때는 인구수 편차를 예외로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구수만을 기준으로 선거구를 획정할 경우 상대적으로 인구밀도가 낮은 농어촌 지역의 피해를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각각의 법안은 헌법재판소의 헌법 불합치 판결이 내려진 후인 올해 1월과 3월 발의됐다. 지역대표성 보다는 표의 등가성이 우선적인 가치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 취지와는 정반대의 논리다. 법안이 통과되기도 힘들 뿐더러 통과되더라도 위헌 논란이 일 게 뻔하다.

여야 의원 13명으로 구성된 국회 농어촌지방주권지키기 의원모임은 이달 1일 헌법재판소에 현행 공직선거법 25조1항에 대해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선거구획정 기준을 “인구·행정구역·지세·교통 기타 조건을 고려해 조정한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표현하고 있어 농어촌 지역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심판 청구의 핵심 내용이다.

의원모임 간사를 맡고 있는 황영철 의원은 “헌법재판소의 인구편차 기준만으로 선거구를 획정할 경우 선거구 왜곡 현상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우회적으로 표현했지만 헌법재판소 판결을 수용할 수 없다는 의견이다. 따지고 보면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불복해 다시 위헌 소송을 제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헌법재판소 판결은 단심제다. 이것이 공식적인 정치개혁 논의 시한을 두 달여 남겨 둔 국회의 현주소다.

굼뜬 정치개혁특위, 선거구획정위 발목 잡아

문제는 선거구획정을 둘러싼 이런 황당한 국회의 움직임이 가장 최근에 벌어진 일이라는 점이다. 헌법재판소의 판결과 직결되는 선거구 관련 사안을 다루기까지 무려 3개월을 허송세월한 것이다. 공직선거법 심사소위는 그동안 핵심 의제인 인구수 편차 문제를 논의에서 배제해 왔다. 무거운 내용이니 효율적인 의사진행을 위해 이견이 적은 가벼운 이슈부터 정리하자는 의도였다.

이로 인해 다섯 차례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기표소 외부의 투표용지 촬영 허용 여부나 재외선거인 등록신청 간편화, 점자형 선거공보 작성 방안이 논의됐다. 이 과정에서 여야가 집행유예 상태에 있거나 1년 미만 실형을 살고 있는 수형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기로 합의한 것이 그나마 성과라면 성과다. 하지만 '정치개혁'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인구수 편차 문제는 이달 열린 6차 회의에서 처음으로 논의됐다. 다행인 것은 선거구획정위원회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내용의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5월 임시국회에서 처리됐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선거구획정위는 국회 산하에서 중앙선관위로 소속이 변경됐다. 개정 공직선거법은 선거구획정위가 마련한 안을 국회가 수정할 수 없도록 했다.

이달 20일 중앙선관위에 선거구획정위 지원조직이 출범했다. 다음달 9일까지 국회 추천 8인과 중앙선관위원장 추천 1인으로 위원회가 구성되면 20일부터 공식 활동에 착수한다. 하지만 정치개혁특위가 선거구획정의 기초가 될 선거구별 인구수 편차에 대해 윤곽조차 정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난항이 예상된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인구수 편차나 비례대표 비율, 선거방식 등이 정해져야 선거구획정위가 구체적인 활동에 나설 수 있다”며 “지금은 국회 논의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시간이 많지 않다. 선거구획정위는 올해 10월13일까지 선거구획정안을 제출해야 한다.

기득권에 멀어지는 정치개혁, 되레 비례대표 감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국회가 정작 ‘정치개혁’이라는 타이틀에 어울리는 의제들을 회피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비례대표 확대나 정당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다. 모두 중앙선관위가 헌법재판소의 판결 취지를 현실 정치제도에 반영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다.

그런데 전체회의 현안질의나 공청회에서 간혹 언급될 뿐 실질적인 제도개선을 논의하는 공직선거법 심사소위에서는 좀처럼 논의되지 않고 있다. 정치개혁특위가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위주로 구성돼 있는 만큼 이들이 기존의 정치적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논의를 애써 피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정치개혁특위는 두 정당 소속 의원 19명에 비교섭단체 1명으로 구성돼 있다.

최태욱 한림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이와 관련해 “정치개혁특위가 시간 끌기에 나선 것”이라고 비판했다.

혹시라도 중앙선관위의 제안이 현실화할 경우 지역 중심의 소선거구제에 기대 활동해 온 소속 정치인들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으니 논의 자체를 꺼린다는 분석이다.

최 교수는 인구수 조정을 통한 선거구획정과 선거제도 개편이 병행되지 않을 경우 정치가 되레 후퇴할 것이라는 취지의 주장도 했다. 그는 “기존 지역구를 모두 보장하는 것을 전제로 인구수 편차를 2대 1로 맞출 경우 전체 지역구 의석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며 “권역별 비례대표제나 총 의석수 증가 없이 인구수 편차에 맞춰 선거구를 획정하려 한다면 비례대표 의석을 줄여 지역구로 가져오려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권역별 비례대표제도 껄끄럽기는 마찬가지다.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정당 득표율에 따라 전체 의석이 배분되면 각 당이 소속 지역구 당선자에게 우선적으로 의석을 부여하고, 나머지는 비례대표로 앉히는 방식이다. 정당 득표율이 그대로 의석으로 이어져 사표를 최소화할 수 있지만 소수 정당에게 유리한 측면이 있어서 거대 정당 중심의 정치개혁특위는 논의를 피하고 있다.

강남훈 혁신더하기 연구소장은 “헌법재판소와 중앙선관위 판단의 요지는 유권자들이 행사한 표의 가치를 최대한 동등하게 만들기 위한 것으로 정당명부식 권역별 비례대표제에 핵심적으로 녹아 있다”며 “만약 정치개혁특위가 이를 외면한 채 활동을 마무리 짓는다면 시민·사회단체는 또다시 헌법소원을 제기할 것이고, 국회는 원점에서 정치개혁을 논의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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