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이 난 것인지, 어느 날 국회 앞 줄줄이 늘어선 경찰버스가 빈틈없는 차벽을 이뤘다. 인도는 겹겹이 설치해 둔 철제 펜스 따라 구불구불 미로였고, 그 끝을 막고 선 경찰이 지나는 시민의 관상을 살펴 문을 여닫았다. 집회시위자의 상이 따로 있느냐고, 사람들이 이유를 물었는데, 돌아오는 답이 없어 밀고 당기는 소란이 곳곳에 가끔 일었다. 해산명령이 1차 2차 또 3차에 걸쳐 득달같이 쏟아졌다. 막느라 모인 경찰이 빽빽하게 붙었고, 말하느라 작은 현수막 펼쳐 든 사람들이 서로 멀찍이 떨어져 섰다. 헬멧 차림 경찰이 시위자에 딱 붙어 해
거리를 둬야만 했던 우리는 따뜻한 방구석에 홀로 앉아서도 누구나와 연결돼 위로와 공감을 나누는 시절을 살지만 아무래도 저기 손 포개어 잡는 일을 따라갈 수는 없을 테다. 정부서울청사 앞, 다시는 거길 찾고 싶지 않았다던 문중원의 아내에게 그 마음 잘 안다고 용균이 엄마가 손 꼭 잡고 말했다. 눈 맞춰 안부 주고받는다. 껴안고 어깨에 기댄다. 눈을 감아본다. 내내 울던 사람이 그제야 웃는다. 그러니 구불구불 사연 깊은 사람들은 꾸역꾸역 길에 나와 시린 손을 비빈다. 산 사람 손을 잡는다. 더는 죽지 말자고 서로를 다독인다. 자식 앞세
찬바람 부는 때를 알아 이파리는 한바탕 요란스레 내린 빗물 머금고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겹겹이 쌓여 거기 차가운 돌바닥 위로 주단처럼 납작 누웠다. 마스크 쓴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질 못하고 팔 쭉쭉 내밀어 찰칵, 한순간도 멈출 줄을 모르는 시간을 잡아챈다. 스마트폰 속 일 년여 사진첩엔 어느덧 변화무쌍한 사계절이 다 담겼는데, 변함없이 마스크 차림이다. 내일 치우면 안 되느냐고 그 앞 밀대 든 사람에 물었지만, 답을 바란 건 아니었다. 점점 줄어드는 레드카펫 위에서 총총 뒷걸음질해 가며 연신 사진을 찍었다. 배우처럼 걸었다. 매
구조화. 사진을 찍을 때에 피사체를 파인더의 테두리 안에 적절히 배치해 화면을 구성하는 일이다. 무엇을 더 넣고 어떤 걸 빼는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 십상이다. 사진은 흔히 객관적인 기록으로 여겨지지만 거짓말도, 왜곡도 잘하는 게 또한 사진이다. 프레이밍 과정은 대개 짧은 순간에 이뤄지기 때문에 편견 혹은 관습에 기대는 일이 잦다. 주먹 쥔 손과 일그러진 표정과 붉은 머리띠 같은 것들이 흔한 경우다. 귀족노조 혹은 강경투쟁 같은 이미지가 거기에 자주 녹아든다. 주로 보수언론을 통해 퍼진 것들인데, 이 또한 프레이밍이라고 부른다
호랑이 온다 소리에도 울음 그칠 줄 모르던 아이가 곶감 준다 소리에 뚝 그쳤다는 건 옛날 얘기다. 동네 책방 마당에 감 따러 가자고 아이를 꾀어 보는데 듣는 척도 안 한다.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과 넷플릭스 시청권 따위를 내밀고서야 나설 수 있었다. 곶감보다 맛있는 게, 감 따는 것보다 재밌는 일이 널린 시절이다. 어릴 적 곶감 하나 달라고 조르면 엄마는 딱 잘라 없다고 말했는데, 어느 밤 제사상엔 분이 뽀얗게 오른 곶감이 틀림없이 올라왔다. 부엌 창고 깊숙한 곳을 뒤지다 등짝을 맞곤 했다. 클릭 한 번이면 다음날 새벽에 무엇이든 받
오토바이엔 두 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 뒤쪽에 앉았던 사람이 가게 앞까지 날아왔다고 바퀴 고치던 자전거가게 사장님이 말했다. 바퀴에 바람 넣느라 그 앞에 섰던 사람들은 넘어진 오토바이에서 뜯겨 나간 잔해와, 배달통을 튀어나와 날아간 포장음식 따위를 살펴보다 혀를 찼다. 거길 지나던 동네 사람들에게 사고의 경위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틈틈이 인도 한편 구석에
얼마 전 수동변속기 트럭을 운전해 봤다. 20여년 만의 일이었는데 용케도 몸이 기억했다. 흥미로운 경험이었지만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았다. 불편했다. 공동현관 자동문을 열고 들어서면 자동으로 거실 조명이 켜지고 음악이 흐르며 아침이면 자동으로 커튼이 열리는 이른바 ‘스마트홈’이 이제 낯설지 않다. 한 전기차 업체는 얼마 전 완벽한 수준의 자율주행 전기차를 공
오늘 주문하면 내일 받아 본다는 건 이제 인터넷 쇼핑하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당일 배송도 더는 낯선 일이 아니다. 넓지 않은 땅덩어리와 촘촘한 물류망과 거기 붙은 온갖 첨단 자동화 시스템 때문이라고 하던데, 배달노동자의 근력과 잰걸음과 저녁 없는 삶, 갖은 노하우 덕이라고도 한다. 언젠가 드론이 날 것이라지만, 지금은 사람이 뛴다. 몸을 갈아 넣
사진은 자주 관습에 기댄다. 노동자의 붉은 머리띠와 노조 조끼, 구호 외치는 팔뚝 같은 것이 그렇다. 머리띠를 질끈 묶는 장면 같은 것은 투쟁 의지를 보여준다고 여겨졌고 흔히 사진으로 담겼다. 오래도록 많은 이들이 그랬으니 관습으로 여길 만했다. 대규모 집회는 물론 기자회견 자리에서도 머리띠가 빠지지 않았다. 상징이었다. 요즘 머리띠 보기가 어렵다. 마스크
길에서 오래 싸운 사람들은 돌고 돌아 서울 서초동 대법원 건물 앞에 선다. 거기 벽에 새겨진 자유·평등·정의 세 문구를 대놓고 의심하는 자는 없었으니 앞자리 모인 누구나가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현수막은 두 개를 준비했다. 카메라 앞에서 읽어 내릴 기자회견문도 두 가지였다. 오래 묵은 오만가지 표정은 꾹꾹 눌러 담은 채 선고를 기다린다. 울고 웃는다. 지
민주노총이 31일 ‘전태일 3법’ 쟁취를 위한 하반기 투쟁을 선포했다.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를 포함해 16개 지역본부는 이날 동시다발 기자회견을 열고 “코로나19 재난 시기 모든 노동자가 해고당하지 않고 일할 권리, 근로기준법으로 보호받을 권리, 누구나 노동조합을 할 수 있는 권리, 일하다 다치거나 죽지 않은 권리를 위해 투쟁하겠다”며 “전태일 3법 입법을
오랜 큰 비 그치니 폭염, 땡볕이 따갑다. 어쩔 수도 없어 길에 선 사람들은 가쁜 숨 내쉬어 가며 그저 견딘다. 물기 잔뜩 머금어 무겁던 종이 상자가 다 말라 할매는 그나마 짐을 덜었다. 기근을 버텨낸 노인들이 유모차를, 바퀴 덧대어 개조한 손수레를 부지런히 밀고 끈다. 밀린 밥을 번다. 미룰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고개 숙인 채 느릿느릿 도로가를 거슬러 간
거북이 등껍질 같은 가방을 멘 라이더는 토끼처럼 빨라야 했다. 재빨리 눈을 굴려 콜을 확인해야 했고, 밥이 식기 전에 자전거와 오토바이 타고 내달려야 했다. 신호등 붉은빛은 밥 식는 신호였고, 평점 깎이는 표시였다. 차와 차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좁은 틈이 갈 길이었고, 살길이었다. 세차게 쏟아지던 장맛비 속에서도 페달 질을, 액셀러레이터 당기는 일을
2003년 현대차 아산공장에서 한 노동자가 월차를 쓰겠다고 했다가 관리자에게 떠밀려 머리를 다쳤다. 그 관리자는 병원에 실려 간 노동자를 찾아가 식칼로 아킬레스건을 그었다. 이른바 ‘식칼 테러’ 사건이다. 월차를 쓰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을 더는 참지 않겠다며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이틀간 공장 라인을 세웠다. 이를 계기로 아산과 울산, 전주 공장에
금속노조 조합원들이 22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열린 ‘불법고용·불법파견 방조하는 고용노동부 규탄대회’에서 비정규직 철폐 구호를 외치고 있다. 대법원은 2010년 7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이라고 판결했다. 이후 사내하청 불법파견에 대한 법원 판결이 잇따르고 있지만, 이들은 노동부가 근로감독과 시정명령 등 행정조치에 나
거기 새길 말이 많아 팻말이 크다. 할 말이 또한 많아, 기자회견이 길다. 그러니 뒷자리 팻말 든 사람들은 오래 벌을 선다. 거기 새긴 말이라곤 법원 판결에 따른 정규직화 실시하라, 불법행위 중단하라 같은 것이었는데, 상식에 드는 뻔한 말을 재차 하느라 마이크 든 사람들 목에 핏대가 선다. 팻말 든 사람들 팔을 덜덜 떤다. 기어코 노동청 앞에 천막이 섰고,
소처럼 일하던 사람을 여럿 잃고서야 일터를 고친다. 영정 앞 굳었던 약속은 금세 흐지부지되기 일쑤여서 오늘 산 사람들은 어제 죽은 자의 일터에서 분초를 다툰다. 퇴근을 미루고 끼니를 미루고 여름휴가를 미뤄 가며 밥을 번다. 닮은꼴 죽음이 잇따랐다. 일터를 바꾸는 것을 더는 미룰 수 없다며 길에 선 사람들이, 고개 숙여 명복을 비는 것으로 말을 시작한다. 어
한 기업 오너가 4년간 재판받는 게 정상이냐고 어느 국회의원이 묻는다. 기업활동에 차질을 빚을까 걱정하는 목소리가 뉴스페이지 곳곳에 높다. 경제가 어려운데, 기업이 어려운데, 어느 돌림노래 후렴구 같은 말이 앞선다. 최저임금을 삭감하자고 나선다. 도대체 멈출 수는 없는 것인지, 이 와중에도 꼬박꼬박 일터에서 사람이 죽어 간다. 코로나19 위기 비상시국에 일
저기 허리 굽힌 노동자들은 인천국제공항으로 출근해 그곳을 쓸고 닦고 가꾸지만 지금 누구도 저들이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일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 감히. 눈 돌리는 곳마다 비정규직이다. 그건 지금의 상식이다. 오래전 어느 공장 구내식당에서 밥 짓던 엄마는 그 회사 직원이었다. 그 또한 상식에 속했다. 몇 년 근속 기념으로 상패와 작은 금붙이를 받아 오
포스코 광양제철소 하청업체 성암산업 노동자들이 금속노련(위원장 김만재)과 함께 24일 낮 서울 강남구 포스코센터 앞에서 분사 없는 매각 약속 이행을 요구하는 결의대회를 열었다. 노조는 분사 매각이 전형적인 노조 무력화 전략이라면서 △조합원 고용보장 △임금·복지 저하 없는 작업권 이양 △분사 금지 △임단협 승계를 요구하는 투쟁을 이어 가고 있다. 오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