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추워도 해 드는 곳이면 살 만하다고 사람들이 말한다. 그늘 속에 가만 앉아 있는 게 뼛속 깊이 시린 일이라는 것 또한 잘 알아 누구나가 겨울이면 해바라기가 된다. 그러나 거기 빽빽하게 높은 빌딩숲 사이로 해 들 일이 적었다. 대개 사람들은 그늘에서 추웠다. 40제곱센티미터쯤 되는 은박돗자리에 앉아 핫팩을 비비고 손에 쥐고 몸에 품고 버틴다. 남극의 황제펭귄들처럼 꼭 붙어 견딜 수도 없는 시절이다. 추운 날에도 택배 나르는 사람들 옷차림이 가벼운 건 땀 때문이다. 겨울 산에 오르거나, 몸을 바삐 놀려 일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다.
하늘 우중충 무거웠고, 길은 어딜 가나 꽉 막혔다. 삿대질을 대신한 경적 끊이질 않던 도로는 젖어 검었다. 눈발 두어 개 날리나 싶더니 비가 흩뿌렸다. 눈이 오길 바랐다는 김계월씨는 농성장 난로 앞에서 지난 시간을 곱씹다 그만 눈이 붉었다. 말이 멈춘 시간 동안 그렁그렁 고인 물에 주황색 불꽃이 들어 일렁거렸다. 치열한 시간이었다고, 일상이 싸움이었다고 했다. 두 번의 겨울, 그는 여전히 길가 비닐 집에 산다. 법원의 최종 판단은 멀었고, 정년이 훌쩍 가까웠다. 부스럭 비닐 문 열고 누가 불쑥 찾아왔다. 내일 많이 추워진다고 해서
사람들 많이 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 글 목록에 지옥 얘기가 많았다. 을 봤다, 온라인으로 개봉한 연작드라마 얘기였다. 지옥에나 가라, 천수를 누리고 세상 떠난 학살자를 향한 저주였다. 지옥은 흔히 시뻘건 불구덩이 이미지로 재현되곤 하는데, 거기서도 가장 뜨거운 곳이 누구의 자리인가를 두고 많은 사람이 오래도록 상상력을 펼쳐 왔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장소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이들을 위해 예약돼 있다’는 표현 같은 것이 유명하다. 이탈리아 시인 단테의 신곡-지옥 편에 나오는 문장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 그런
가을 한창인데 한겨울 옷 미리 껴입은 사람들이 고궁 담벼락에 기대어 줄줄이 앉았다. 농성이야 어디서든 길었으니 낯설지 않았으나, 새벽이슬을 피할 비닐 한 장을 들이는 게 큰일인 것이 서럽더라고 말했다. 지키는 이 많은 그 도롯가에 바스락바스락 낙엽이 뒹군다. 사람이 굶는다. 희망찬 약속 따라 고용안정과 처우개선을 바랐지만, 4년여 제자리걸음. 되레 해고 위기라니, 말짱 도루묵이다. 돌고 돌아 도돌이표, 투쟁가는 멈출 줄을 모른다. 파업가에 이른다. 여기저기서 안 해 본 것 없다는 사람들은 이제 저 자리에서 끝장을 말한다. 찬 바닥과
개는 이쁘다. 좋은 친구다. 식구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다만 개라는 말이 참 얄궂다. 가위표 두 개 앞에 붙어 차진 그 유명한 욕이 아니더라도, 부정적인 뜻을 품는 경우가 많다. 요즘엔 여러 단어 앞에 붙어 그 느낌을 강조하는 부사 노릇을 하기도 한다. 개억울, 개멋져, 개맛있어 같은 용례가 있다. 개는 말이 없다. 다 사람의 일이다. 죄 없는 개는 그저 꼬리 흔들고 몸을 부벼 애정을 표현한다. 어느 정치인의 개 사진이 입방아에 올랐다. 개에게 사과를 주는 모습인데, 그걸 본 누구나가 사과는 개한테나 줘 버리라는 말을 떠올렸다.
아빠는 수십년간 집 짓는 현장에서 미장 일을 했는데, 정작 가족 살 집은 얼른 마련하지 못했다. 언젠가 살던 반지하 집엔 여름철 홍수 때면 물이 넘쳐 비상이었는데, 방 한 칸을 빌려 여섯 식구가 지내던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빠 등엔 소금꽃이 사철 피어 시큼한 향기가 집 안에 가득했고, 주야 맞교대 공장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 손가락은 나날이 굵고 거칠었다. 그토록 바라던 새로 지은 아파트에 들어가던 날엔 비가 많이 내렸다. 복이라고 여겼다. 이사 다닐 걱정 없이 늙어 갈 일만 남았다 했는데, 장성한 자식들 집 마련 걱정에 두
언젠가 동네 오락실 뒷문으로 몰래 들어가 했던 게임 중에 스트리트파이터라는 대전격투 게임이 유명했다. 틈틈이 실력을 쌓았더니 끝판을 깨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옆자리 앉아 대전을 신청한 사람과의 결투가 다만 쉽지 않았다. 컴퓨터야 그 패턴이 뻔했는데,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주머니 속 마지막 100원이었으니 질 수 없는 승부였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눈치게임이 치열했다. 뒤에서 지켜보며 바둑 훈수 두듯 참견하던 사람들도 숨죽였다. 필살의 일격이 먹혔고, 유 윈! 승리했다. 흰색 도복 차림 캐릭터가 당당한 자세로 기와지붕
김계월 공공운수노조 아시아나케이오지부장이 27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복직 판결 이행”을 요구했다. 아시아나항공의 지상조업 2차 하청업체 아시아나케이오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은 26일로 거리 농성 500일을 맞았다. 중앙노동위원회도 서울행정법원도 아시아나케이오의 정리해고가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회사는 서울행정법원 판결 뒤 ‘복직 당일 퇴사’를 전제로 내걸었고, 노동자들이 이를 거부하자 항소했다.
띄엄띄엄 벽에 붙어 선 사람들이 그 앞 길어질 것이 뻔한 기자회견에서 자기 순서를 기다린다. 굵고 짧은 발언을 주문하는 사회자의 요청도 따로 없었으니 마이크 쥔 사람은 할 말이 하염없고 막힘없다. 술술 쏟아진다. 해고의 부당함과 책임 있는 자들의 무책임과 헛된 약속을 읊는 일이 두세 번째도 아닐 테니, 미리 준비한 원고 같은 게 필요하지 않았다. 해고 생활이 길었다. 물 빠진 낡은 조끼엔 어느 참전용사의 훈장처럼 주렁주렁 배지가 많이 달렸다. 연대할 곳도, 기억할 것도 그간 많았다. 서는 곳마다 치열한 전선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전
가을볕 눈부신 아침, 같은 옷차림 사람들이 국회의사당역 에스컬레이터 상행 방향을 탄다. 그 앞 둥근 지붕 건물 앞에서 할 말이 많았다. 거기 경찰이 많았다. 횡단보도는 철제 폴리스라인에 막혔다. 눈에 잘 띄라고 골랐을 형광 티셔츠에 새긴 구호가, 조끼와 모자며 또 그 위에 묶어 둔 붉은 머리띠가 문제라고 막아선 경찰이 말했다. 집회 금지며 방역법 위반이라는 경고방송이 요란스러웠다. 그 일대 경찰버스가 줄줄이 많았다. 지나던 시민은 무슨 큰일이 난 모양인가 싶어 두리번거렸다. 실은 별일도 없어 거기 모인 사람들 띄엄띄엄 서서 현수막
민의의 전당 국회 정문 앞, 철제 폴리스라인이 이리저리 꼬여 미로 같은 길을 낸다. 어디 가는지를 묻는 날카로운 눈초리를 여러 번 거치면 네모난 공간에 이른다. 기자회견장소 간판이 달렸다. 그 자리 한 사람만 설 수 있어 일행은 철제 펜스 밖에서 서성인다. 회견을 청한 사람은 그 앞 많지 않은 기자 앞에서 저마다의 다급한 사정을 풀어내 보인다. 어쩌다 사람이 겹칠 땐, 그 앞 많이도 지켜선 경찰이 집회 금지를 경고한다. 마이크 주고받아 다음 주자가 이어 달린다. 현수막을 잡고 설 사람도 없어 새롭게 준비한 입식 선전판이 그 자리 휑
혼자 밥 먹는 걸 혼밥, 혼자 술 마시는 걸 혼술이라고 부른다. 1인 가구가 늘어난 데다 코로나19 위기 상황까지 겹쳐 흔한 말이 됐다. 혼행(홀로 떠나는 여행), 혼공(혼자 공연 관람) 등 곁가지가 자꾸 는다. 이뿐인가. 요즈음 나 홀로 기자회견이며 1인 시위가 잦다. 종종 1인 집회라는 표현도 등장하던데, 형용모순을 피할 길 없다. 주로는 동시다발을 앞에 붙여 그 의미를 강조한다. 혼견, 혼시라고 하면 되려나. 그 방식을 두고는 길에서 다툼이 잦다. 일행과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며 더 멀리 이동할 것을 경찰이 요구하면, 괜한 방해
기자회견 자리에 더는 기자가 없다. 그러나 요즘 마이크 잡은 사람들은 어딜 보고 말해야 하는지를 잘 안다. 스마트폰에 적어 둔 메모를 보면서 틈틈이 앞자리 세워 둔 스마트폰 카메라를 향해 눈을 맞춘다. 홀로 서거나 앉은 채로 할 말을 마치면 다음 사람과 자리를 바꾼다. 모일 수는 없지만 말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어 사람들은 기어코 방법을 찾는다. 어디에선가 화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거기 채팅창에 투쟁, 투쟁, 투쟁, 구호를 적어 동참한다. 1인 릴레이 온라인 기자회견 풍경이다. 가상의 공간에 모여 현실의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건 어
국민건강보험 고객센터 노동자가 21일 서울 청계천 전태일다리에서 청와대로 향하는 1인 도보행진을 시작하기에 앞서 기자회견문을 읽고 있는 모습이 오토바이 거울에 비쳤다. 행진은 거리 두기 방역지침에 맞춰 매일 진행된다. 이들은 콜센터 노동자가 처한 열악한 노동환경이 열사가 분신 항거한 50년 전과 다름없다며 전태일동상 옆에 선 이유를 밝혔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선언 이행을 대통령에게 촉구했다. 건강보험공단의 직접 고용을 요구하는 무기한 전면파업이 장기화하고 있다. 노조는 23일 국민건강보험 원주 본사 앞에서 결의대회를 예정하고
여름이면 넓은 잎 무성하게 호박이 잘도 자란다. 어디 붙들 것만 있으면 필사적으로 감고 오른다. 부들부들한 잎 따다 쪄 내고 강된장 올려 싸 먹으면 입맛 떨어진 여름철 밥 두 공기 뚝딱이다. 호박잎 쌈 파는 가게가 흔치 않던데 인터넷엔 그게 다 있다더라. 누가 줘서 맛있게 먹고는 문득 시골집 생각이 났다. 오랜만에 엄마에게 전화해 밭 한 귀퉁이 호박잎이 잘 있느냐고 안부를 물었다. 한 번 와야 먹지 않겠냐고, 택배 부치려니 요즘 날씨에 상할까 무섭다고, 엄마는 말했다. 가야지요. 코로나 좀 잠잠해지거든. 택배가 왔다. 고추와 마늘과
장맛비 잠시 멈춘 한여름, 청년 알바노동자가 얼음 모형 안에 들어 습한 더위를 견딘다. 코로나 시대에 얼어붙은 것이 수없다는데, 별 수도 없이 거기 갇힌 사람들 탄식이 영화 겨울왕국 속 얼어붙은 안나의 마지막 입김 같다. 얼음을 녹일 진정한 사랑 같은 건 동화 속 이야기였나. 마법 같은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주식과 코인 열풍이라면 좀 달랐을까, 큰 수익을 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떠돌았지만 내 얘기는 아니었다. 판타지다. 얼어붙은 처지가 변함없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북극의 빙하만이 잘도 녹아내렸다. 여름이면 사람들 줄을
사람 몸 어디고 다 중요하다지만, 그중에 꼽으라면 머리다. 학습하고 추론하고 지각하고 언어를 이해하는 등 핵심적인 능력이 거기서 비롯되기 때문일 테다. 헬멧과 안전모 따위로 꽁꽁 둘러싸 최우선으로 보호하는 이유다. 시선이 닿지 않는 뒤통수가 특히 취약한 곳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뒤통수를 친다는 말은 배신의 관용구로 흔히 쓰인다. 사람의 머릿속 능력을 모방한 인공지능은 곧잘 빠르고 합리적인 답을 내어줄 것이란 믿음이 있다. 그렇지 않다고, 오히려 불합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플랫폼 업체의 인공지능 배차 시스템에 따랐더니 업무효
이라는 오래전 드라마에는 키트라고 하는 똘똘한 인공지능 자동차가 나오는데,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손목에 찬 무전기에 대고 “키트!” 하고 부르면 주인공이 있는 곳까지 스스로 달려오는 차를 보면서 환호성을 지르곤 했다. 먼 미래의 일이라고만 여겼는데, 훌쩍 가까운 것만 같다. 비록 그 앞에 ‘반’자를 달고 있지만, 자율주행은 요즘 흔한 말이다. 인공지능은 온갖 것 앞에 그럴듯한 수식어로 붙는다. 로봇청소기 같은 것들이 특히 그렇다. 그것만 사면 집 청소를 비롯한 온갖 귀찮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란 꿈에 부풀곤
코로나 시대, 노동조합하면서 할 말 많은 사람들 설 자리가 유난히 비좁다. 기자회견이 그나마 숨 쉴 구멍이었으니, 아홉 명 너비 천을 찍어 대느라 현수막장수가 요즘 바쁘다. 돋보이길 바라는 마음 간절한 기획자는 현수막 문구와 뒤편 쭉 들고 선 팻말로는 부족했던지, 이런저런 상징의식을 준비한다. 퍼포먼스라고 흔히 불린다. 매번 똑같아 보이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색다른 그림을 찾는 사진이며 영상기자들의 바람과도 맞아떨어진다. 한때 겨울이면 뭔가를 불태우고, 여름이면 얼음을 망치로 깨곤 했다. 대형 현수막을 찢는 일도 흔했다. 팻말 목에
오랜만에 세차했고,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흙먼지 잔뜩 머금은 빗방울 자국이 온 데 선명했다. 익숙한 일이었다. 하루걸러 먹구름이 짙었고, 장마철인 듯 비가 잦았다. 기온은 큰 폭으로 널뛰었다. 이게 다 기후위기 때문이냐고, 날씨가 대체 왜 이러냐고 투덜대던 사람들이 틈틈이 마스크를 고쳐 썼다. 김 서린 안경을 티셔츠 아랫단으로 쓱쓱 닦아 다시 썼다.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이 맑았다. 꽤 반가운 일이었다. 햇볕 따라 불쑥 찾아든 한여름 더위는 반갑지 않았다. 꼭꼭 챙겨 쓴 마스크는 바이러스와 미세먼지를 막았지만 흐르는 땀과 열기엔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