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저는 여러분의 휴대전화를 만들다가 시력을 잃고 뇌손상을 입었습니다.” 말이 끝나자 턱을 괴고 있거나, 허리를 숙이고 있던 이들이 통역기를 자신의 귀에 가져다 댔다. 2017년 6월 오전(현지 시각) 스위스 제네바 유엔 인권이사회 본회의장에 앉은 김영신씨의 연설은 이렇게 시작했다.

삼성·엘지전자 휴대전화에 들어가는 부품을 만들던 노동자 김씨를 비롯해 7명이 메틸알코올(메탄올) 급성중독으로 시력을 잃거나 시력 손상을 입은 사실이 2016년 드러났다. 5명의 피해자가 드러났던 2016년 초, 고용노동부는 메탄올을 사용하는 전체 3천100여개 사업장을 전수조사한 끝에 “추가 피해자는 없다”고 발표했다. 발표가 나온 지 6개월 뒤인 같은해 10월 경기도 부천과 인천 남동공단 휴대전화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노동자 2명이 메탄올에 의한 시력손상 피해를 본 사실이 드러났다. 한 명은 2015년에 2월, 다른 이는 2016년 1월 피해를 봤다. 두 사람이 일하던 업체는 메탄올 중독으로 시력을 잃은 노동자가 발생해 논란이 일었던 곳이다. 노동부는 전수조사를 어떻게 했기에 이들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일까. 낮에는 에틸알코올(에탄올)로 밤에는 메탄올로 작업한다거나, 근로감독관과 안전보건공단 관계자가 오기 전에 연락을 받고 작업환경을 바꿨다는 등의 제보가 노동단체로 날아들었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김씨는 주어진 2분 동안 미리 준비한 연설문을, 통째로 외웠던 연설문을 유엔 인권이사회 참석자들에게 알렸다. 기업이 책임져야 한다고 호소했다. 발언이 끝나자 눈물을 닦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다. 자기 앞에 놓인 휴대전화를 지긋이 바라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메탄올 실명’ 전근대적 참사 왜 못 막았나
산재예방 정책 쏟아 냈지만 사망만인율 제자리걸음


산업안전보건청 설립 논의가 되살아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초대 노동부 장관 출신인 김영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22일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하면서다. 환영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한 해 10만명이 다치거나 병을 얻고, 2천여명이 목숨을 잃는 산업재해 문제는 노동부 산재예방보상정책국에서 담당한다. 예방 정책을 수립하고, 산재 통계와 산재보험을 관리하고, 안전 관련 인증제를 운영하는 등 산재 정책 모두를 공무원 70여명이 맡고 있다. 현장에서 발로 뛰는 산업안전감독관은 현재 550명이다. 감독관 한 명당 평균 사업장 4천개를 담당한다. 이 정도 규모로 산재예방 정책 수립과 감독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2008년 1월과 12월 두 차례 화재로 노동자 48명의 목숨을 앗아 간 산재사고는 2020년 똑같이 재현했다. 올해 5월 경기도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센터에서 38명이, 7월 용인 SLC 물류센터에서 5명의 노동자가 숨졌다.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되고 새로운 산재예방 정책이 매년 쏟아져도 효과는 ‘글쎄올시다’다. 노동자 1만명당 사망자를 보여주는 사망만인율은 2015년 1.01명에서 2018년 1.12명, 지난해는 1.08명으로 제자리걸음했다. 전문가들은 현 산업안전보건행정 체계로는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산업안전보건청 설립 논의가 시작한 지는 오래됐다. 2005년 정부 차원에서 사실상 반대한다는 공식 입장을 낸 적이 있다. 2010년 한국산업안전공단(현 안전보건공단)과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산업안전보건 행정조직 및 집행체제의 선진화방안’을 주제로 연구용역을 진행하면서 안전보건청 설립을 긍정적으로 검토했고, 2012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현 경제사회노동위원회)도 ‘산업안전보건 행정조직 및 집행체제의 선진화방안’을 주제로 논의를 했다. 올해 4월에는 경사노위 의제별위원회인 산업안전보건위원회에서 노사정이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을 포함해 시스템을 개편하자고 합의했다.

노동부 전문성·독립성 부족으로 컨트롤타워 역할 못해

현 행정체계의 무엇이 문제이기에 오랜 시간 공론화가 이어지고 있을까. 크게 세 가지가 지목된다. 노동부 산재예방보상정책국이 질적·양적·구조적 문제에서 한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안전보건행정은 유해·위험 설비나 화학물질 등을 취급하는 사업장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을 주 업무로 한다. 당연히 담당자인 공무원에게 높은 전문성이 요구된다. 산업이 고도화·대규모화하고 복잡·다양해지는 점도 공무원에게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게 하는 배경이다. 행정능력이 산업 고도화나 복잡성을 따라가지 못하면 불화수소 누출사고나 가습기 살균제 사태 같은 사고를 초래하거나 대형화하게 만든다. 노동부 체계로는 이런 변화를 따라잡기 힘들다. 노동부 모든 공무원을 대상으로 순환보직이 이뤄지면서 산업안전 분야의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는 전문가를 키울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강태선 세명대 교수(보건안전공학)는 “전세버스 교통사고의 원인이 운전기사 장시간 노동에 의한 과로로 분석되는 등 산업안전보건 영역은 넓어지고 있지만 공무원은 이런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며 “노동자 안전보건에 대한 전문적이고 독립적인 책임행정을 하지 못하면 산업재해 사망자를 절대 줄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효과적인 산재예방 정책을 위해 이론을 뒷받침하고 현장을 뛰어다니는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점도 문제로 꼽힌다. 산업안전감독관은 550명, 안전보건공단 직원 중 인증원·연구원 등을 제외하고 현장에 나갈 수 있는 인력은 500명가량이다. 공단 직원은 컨설팅 업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감독 업무를 하는 산업안전감독관은 절대 부족하다. 공단 관계자는 “공단은 사업장을 속속들이 볼 수 있는 정보나 데이터베이스(DB)를 분석하고 정책을 수립하는 기능이 취약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이라며 “미국 노동부 외청인 산업안전보건청(OSHA)은 감독관 외 본부 인력 1천명이 정책을 기획하고 수립·분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산업안전보건 업무가 노동부 내 다른 업무와 매우 이질적인 구조적 특성이 있어 채용·교육훈련·경력관리 면에서 특수성을 별도로 부여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고용정책, 노사관계에 노동부의 업무역량이 집중되기 때문에 형사사건 범주에 들어가고 전문적 영역인 산업안전보건 업무가 소외당할 개연성도 크다.

산업안전감독에 대한 기업측 불신도 풀어야 할 숙제다. 안전보건공단은 민간부문의 컨설팅과 유사한 업무를 맡고 있지만 노동부의 업무를 보좌하는 것도 주된 역할로 삼고 있다. 비전문가인 근로감독관이 공단 직원에 의탁해 사업장 감독을 하는 상황이 일반화해 있다.

대기업 안전보건담당자 A씨는 “사업장에 산업안전감독관이 뜨면 탈탈 털린다고 생각하고 감독관과 공단 직원 눈치를 본다”며 “현장에서 안전보건 조치가 잘 작동하지 않으면 개선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 줘야 하는데 노동부·공단은 적발하고 처벌하려고만 한다”고 토로했다. 그는 “노동부가 규제기관으로서 역할을 한다면 공단은 사업장과 기업현실에 맞는 안전보건 정책을 제안하고 지원해야 하는데 지금은 감독기관 기능만 살아 있다”며 “규제와 기술지원이라는 안전보건행정이 잘 작동하도록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순영 동의대 부교수(인간시스템디자인공학)는 “산업안전감독을 하면 점검과 안전지도보다는 서류작성 검토만 하다 간다는 불만이 누적하고 있다”며 “민간 안전보건 전문인력들은 노동부·공단이 자기들보다 산업안전에 대해 더 모르면서 지도하러 나오고 개선에 도움을 전혀 주지 않고 있다고 토로한다”고 설명했다.

“청 설립은 산재예방정책 개혁 필요조건, 정부 의지 보여주는 것”

산업안전보건청이 설립되면 이 같은 우려는 모두 불식될까.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안전공학)는 “필요조건은 된다”고 말했다. 그는 “산업안전보건업무가 전문성을 바탕으로 강력한 추진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부서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행정구조로 보장할 필요가 있다”며 “산재예방 행정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고 정부의 강력한 해결 의지를 사회적으로 공표하는 신호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산업안전보건청이 설립되면 산업안전보건 분야에 대한 독자적인 업무를 관장할 수 있게 된다. 청장은 소속공무원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갖는다. 산업안전 사고에 대응하거나 정책을 수립할 때 타 기관 간섭 없이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이러면 국토교통부의 건설안전, 행정안전부의 교통안전, 산업통상자원부의 광산·전기·가스 등 에너지안전 업무 등 부처별로 산재해 있는 산업안전 관련 정책을 총괄해 관리할 수 있게 된다.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에 대한 당사자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고 있다. 노동부 관계자는 “안전보건공단·근로복지공단이 가진 집행기능을 노동부 산재예방보상정책국에서 조정하고, 감독관 전문성을 강화해 안전보건공단의 기술적 조언에 의지하지 않고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여부를 스스로 판단할 체계를 만드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며 “질병관리본부와 유사하게 규모를 키워 가면서 실력을 쌓는 게 좋겠다고 내부 의견이 정리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두용 안전보건공단 이사장은 “산업안전·노동안전 문제가 노동부 1개 국과 공단 현장인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왔다”며 “국민의 의식이 산업안전보건을 권리로 인식하는 데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정부 대응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환경청을 설립했을 때 한국환경공단이 커졌고, 중소벤처기업부가 만들어지니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이 커졌다”며 “산업안전보건청이 설립하면 안전보건공단도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안전보건공단노조는 “현행 조직 운영에 대한 성과와 문제점에 대한 분석, 반성과 함께 기존 조직을 발전·고도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청 설립에 반대하고 있다.

산업안전보건청 설립 논의는 내년 하반기 대선 국면에서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김영주 의원실 관계자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빨리 국회를 통과하면 좋겠지만 불가능하다면 다음 대선 국면에서 논의를 활성화하는 것도 차순위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의원이 지난 4일 개최한 산업안전보건청 설립 입법공청회에는 당대표 경선 중인 이낙연·김부겸·박주민 후보와 행정부 조직개편을 담당하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서영교 위원장이 축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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