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누리당과 정부가 기다렸다는 듯이 노동계의 뒤통수를 치고 나섰다. 노동시장 구조개선 노사정 합의문이나 협상 과정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은 내용을 노동관련법 개정안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노사정이 추후 논의하기로 한 사안에 대해서도 당초 정부안 중 노동계가 긍정적으로 평가한 내용을 빼 버린 채 법안을 발의했다. 향후 노사정 협상이나 여야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새누리당은 16일 오전 의원총회를 열고 지난 14일 나온 노동시장 구조개선 관련 노사정 합의문을 토대로 5대 노동개혁 입법안을 발의했다.
5대 입법안은 △근로기준법(통상임금·근로시간)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비정규직)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비정규직) △고용보험법(실업급여 보장성 강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출퇴근재해 인정, 감정노동자 보호)과 고용보험 및 산업재해보상보험의 보험료징수 등에 관한 법률(고용산재보험료징수법) 등 6개 개정안으로 구성돼 있다.
차별시정 신청대리권 쏙 빠져
이날 새누리당이 발의한 법안 중 비정규직과 관련한 기간제법에는 비정규 노동자의 차별시정신청을 노조가 대리하도록 하는 내용이 빠졌다. 그간 정부는 차별시정신청 대리권에 대해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차별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강조했다. 노동계 역시 긍정적으로 평가해 왔다.
그런데 당정협의를 거친 새누리당 입법안에서 해당 내용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재계 반발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차별시정 대리 범위에 대해 노사 이견이 많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후속논의를 거쳐 법안심사시 반영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파견 허용업무와 관련해 용접·금형을 포함한 뿌리산업에도 파견을 허용하기로 한 부분도 논란이 되고 있다. 뿌리산업은 파견법에서 파견을 금지하고 있는 직접생산공정에 속한다.
이 역시 정부가 발표한 비정규직 종합대책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내용이다. 정부는 고소득 전문직과 고령자에 한해서만 파견규제를 완화할 예정이었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뿌리산업에 대한 파견확대는 사실상 제조업 직접생산공정까지 파견을 확대하겠다는 뜻”이라며 “노사정 합의를 위반해 전면적으로 파견규제를 해체시키겠다는 의도”라고 비판했다.
노동시장 구조개선 관련 노사정 합의문에 따르면 비정규직 관련 제도개선은 노사정이 실태조사를 거친 뒤 합의한 내용은 정기국회 법안 의결에 반영하기로 했다. 추후 논의 결과에 따라 다시 반영될 여지가 남아 있다. 그럼에도 새누리당이 기존 정부안보다 후퇴하거나 노사정 합의에 없는 내용을 개정안에 포함한 것이다. 향후 협상에서 교환카드로 쓰려는 의도로 분석된다. 예컨대 차별시정 신청대리권을 허용하는 대신 파견을 확대하거나 기간제 사용기간을 시행하자고 제안할 수 있다.
휴일근로 할증률은 법원 판례 무시
근로시간단축과 관련한 근로기준법 개정안도 논란이다. 노사정 합의문은 휴일근로를 연장근로에 포함시켜 일주일 근로시간 상한을 52시간으로 제한하되, 기업규모별로 단계적으로 실시하고 특별연장근로를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휴일근로시 가산수당 할증률에 대해서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최근 판례에 따르면 휴일에 주간근무를 하면 통상임금의 100%를 가산수당으로 지급해야 한다.
그런데 새누리당은 8시간 이내 근무는 50%, 8시간을 초과한 근무는 100%로 한정했다. 여야 협상 결과를 지켜봐야겠지만 올해 4월까지 최대 75% 가산임금을 제안했던 정부 입장에서 후퇴한 것이다. 새누리당은 비정규직 관련 차별시정 신청대리권은 노사 이견을 이유로 개정안에서 빼더니, 노사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휴일근로 할증률은 일방적으로 개정안에 담는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협상용이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 입법이다.
조삼모사식 실업급여 확대 … 지급조건 까다롭게
노사정 합의가 나오기도 전에 박근혜 대통령이 약속한 실업급여 확대 방안에는 노사정이 그간 논의하지 않았던 내용이 포함됐다. 역시 노동자들에게는 불리한 내용이다.
구직급여 지급수준을 퇴직 전 평균임금 50%에서 60%로 올리고, 지급기간을 90~240일에서 120~270일로 확대한 것은 그간 정부가 발표한 대책과 같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고용보험법 개정안에서 현행 '퇴직 전 18개월 동안 180일 이상 가입'인 실업급여 수급조건을 '24개월 동안 270일 이상 가입'으로 상향했다. 단기간 일하는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 노동자는 실업급여 혜택을 못 받을 수도 있다. 새누리당은 "단기근속이나 실업급여 반복수급을 우려했다"고 주장하지만 이 또한 노사정 협상 과정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내용이다.
결과적으로 합의시한 내에 노사정이 합의하지 않으면 실업급여 확대를 없던 일로 하겠다고 압박하던 정부와 여당이 조삼모사식 법안을 제시한 셈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실업급여를 반복수급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농림어업이나 건설업·공공행정에서 일하는 이들로 단기간 근속이 불가피한 업종에서 일하거나 정부 정책 때문에 단기간 일하는 노동자들”이라며 “정부 책임은 모른 체하면서 비정규직과 청년노동자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