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한다.”
13일 오후 대법원 2호 법정. 재판부의 선고는 짧았다.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법정을 가득 메운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재판부의 선고를 듣고도 선뜻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러더니 이내 체념한 듯 하나둘 법정을 나서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말이 없었다. 허탈한 표정으로 허공을 올려 보거나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무려 6년을 끌어온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의 결말은 비극이었다.
◇정리해고 하려면 회계장부에 손대라?=대법원 3부(주심 박보영 대법관)는 2009년 단행된 쌍용차의 대규모 정리해고가 유효하다고 보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해고자 153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해고무효확인 소송 상고심에서 재판부는 “회사에 정리해고를 할 수밖에 없는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었고, 당시 회사가 해고회피 노력을 다하지 않은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시했다. 올해 2월 나온 서울고법의 판결을 180도 뒤집은 결정이다.
대법원은 특히 서울고법의 2심 판결에서 쟁점으로 제기된 쌍용차의 회계조작 논란과 관련해 철저하게 회사측의 손을 들어줬다. 쌍용차가 정리해고 전년인 2008년 재무제표상 유형자산 손상차손을 과장하는 방법으로 경영위기를 부풀렸다는 해고자들의 주장은 배척됐다.
대법원은 “원심은 피고(쌍용차)가 손상차손 인식의 대상이 된 유형자산에서 생산될 차량의 예상 매출수량을 부당하게 과소 추정함으로써 해당 유형자산의 손상차손이 과다 계상됐다고 봤으나, 미래에 대한 추정은 불확실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점을 고려할 때 피고의 예상 매출수량 추정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가정을 기초로 한 것이라면 그 추정이 다소 보수적으로 이뤄졌다고 하더라도 그 합리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판결했다. 기업들이 정리해고를 손쉽게 하기 위해 회계장부에 손을 대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뜻으로 풀이되는 대목이다. 이는 앞으로 정리해고의 유효성을 다투는 소송에서 노동자들이 승소할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회가 정리해고 요건 강화와 관련해 손을 놓고 있는 사이 법원 판결은 보수적인 색채를 더해 가고 있다.
재판부는 이 밖에 △경기불황·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세제혜택 축소·정유가격 인상에 따른 계속적 구조적 위기로 해고를 단행할 긴박한 경영상 필요가 존재했고 △인원감축 규모가 비합리적이거나 자의적이라고 볼 수 없으며 △회사가 정리해고에 앞서 부분휴업·임금동결·순환휴직·사내협력업체 인원 축소·희망퇴직 등 해고회피 노력을 다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법정 밖으로 나온 노동자들은 말문을 열지 못했다. 공장으로 돌아가겠다는 단 하나의 희망을 품고 재판 결과에 모든 기대를 걸었던 노동자들은 길을 잃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멍하게 서 있는 해고자들 앞에서 먼저 울음을 터뜨린 쪽은 밀양에서 올라온 송전탑 반대 할머니들이었다. 울음이라기보다는 통곡에 가까웠다. 한옥순 할머니는 “이 세상에 법이 있으면 이런 판결이 나올 수는 없다”며 “대통령·재벌·법관들이 죄다 한통속이 돼 국민보고 죽으라고 한다”고 목놓아 소리쳤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대변인을 맡아 수없이 많은 기자들을 상대한 이창근 정책기획실장도 결국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이 실장은 “오늘은 전태일 열사 44주기가 되는 날”이라며 “숨 쉴 곳 없는 이 사회에 한줄기 빛이 되는 판결이 나오기를 바랐는데, 결국 재판부는 전관예우와 친재벌의 속성을 버리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회사측이 대법관 출신 변호인을 선임한 것이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다.
지부로서는 이번 판결이 몰고 올 파장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판결 하나만 보고 험난한 복직투쟁을 감내한 노동자들이 이날 대법원 판결을 보고 받았을 충격과 좌절을 보듬어야 하는 숙제까지 떠안았다.
김득중 쌍용차지부장은 “어젯밤 (판결 결과에 따라) 누군가 우리 곁을 떠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잠을 설쳤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김 지부장은 "우리는 반드시 공장으로 돌아갈 것이고 끝까지 싸울 것"이라며 "절대로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