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1996년부터 한국 노사관계에서 가장 큰 쟁점 중 하나였던 노조 전임자임금 지급금지 제도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까.

고용노동부는 지난달 31일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중 결사의 자유와 단결권·단체교섭 관련 협약 비준을 위한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안에는 노조 전임자임금 지급금지 조항을 삭제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ILO의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 협약(87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 협약(98호)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전임자임금 지급이나 고용노동부 장관이 고시한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한도 초과를 요구하는 쟁의행위를 금지한 조항은 사라졌다.

노동부는 사용자가 노조의 자주적인 운영이나 활동을 침해할 위험이 없는 운영비를 지원하는 것은 부당노동행위로 보지 않는 조항을 개정안에 신설했다. 노동자 후생자금 또는 경제상 불행을 막거나 구제하기 위한 기금 기부와 최소한 규모의 노동조합 사무소 제공 같은 행위다.

정부 입법예고안은 지난해 11월과 올해 4월 두 차례 나온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 공익위원안을 바탕으로 한다. 정부가 노조 전임자임금 지급금지 조항이 노사 자율과 노조 자주성 보장이라는 기본원칙, ILO 협약에 위배된다는 노동계와 전문가들의 주장을 22년 만에 수용한 것이다.
 

도입 후 13년 유예, 시행 9년 만에 폐지 수순

4일 노사정에 따르면 노조 전임자임금 지급금지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97년 3월이다. 국회에서 기존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을 합쳐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을 만들었다. 노조 전임자에게 급여를 주는 행위를 부당노동행위로 금지했다.

노조 전임자임금 지급금지가 쟁점이 되기 시작한 것은 96년 5월 발족한 대통령 자문기구 노사관계개혁위원회 때부터다. 노개위에서 복수노조 허용 문제를 논의했는데, 재계는 “복수노조가 생기면 기업의 전임자임금 비용이 늘어난다”며 전임자임금 지급금지를 요구했다. 당시 노동조합법에는 사용자가 노조 운영비를 원조하는 행위를 부당노동행위로 보는 조항만 있었다. 노조 전임자에게 임금을 주는 것이 부당노동행위인지에 대해서는 별도 규정이 없었다.

노사가 이견을 좁히지 못하자 같은해 11월 노개위 공익위원안이 나왔다. “노조의 재정자립 원칙을 선언적으로 명문화”하고, “복수노조 전면 허용시 전임자급여 문제는 2차 제도개혁 과제로 계속 논의한다”는 내용이었다.

96~97년 노동계 총파업을 거쳐 여야가 97년 3월13일 국회에서 통과시킨 지금의 노조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정안)에는 재계 요구가 대폭 반영됐다. 사업장 단위까지 복수노조를 도입하는 대신 전임자임금 지급을 금지하고 이를 부당노동행위로 처벌하는 지금의 조항을 넣었다. 다만 준비기간을 거쳐 5년 뒤인 2002년 1월1일에 시행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전임자임금과 관련해 “노사가 자율로 해야 한다”는 노동계 요구와 “즉시 시행해야 한다”는 재계 주장이 맞부딪혔다. 복수노조 허용과 전임자임금 지급금지 조항이 패키지로 묶여 버린 것이다. 시행은 2007년 1월로, 다시 2010년 1월로 두 차례 유예됐다.

결국 2009년 12월 노사정 합의와 이듬해 1월1일 국회 의결로 전임자임금 지급금지는 2010년 7월부터,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는 2011년 7월부터 시행했다. 대신 노조활동을 할 때 근로시간을 면제해 주는 제도를 도입했다. 노조법상 노조 전임자임금 지급이 금지된 지 13년 만의 일이었다. 그래 놓고 정부는 시행 10년도 안된 지난달 31일 제도를 폐지하는 입법예고를 했다. 노조 전임자임금 지급금지를 노조법에 명시할 때부터 무리였다는 점을 뒤늦게 인정한 셈이다.

타임오프로 노조활동 위축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노사가 자율로 정해야 하는 노조 전임자임금 문제를 제도로 규율하는 것은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 했다”고 비판했다. 정문주 한국노총 정책본부장은 “ILO는 노조 전임자임금 문제에 국가가 개입하지 마라고 수차례 지적했다”며 “2010년 노조법이 개악된 뒤 현장 노조활동이 급격하게 위축됐다”고 말했다.

노사정은 2001년 2월9일 옛 노사정위원회에서 2002년 1월부터 시행하기로 했던 전임자임금 지급금지와 복수노조 허용을 5년 유예하는 것에 합의했다. 당시 노사정위 홍보자료를 보면 “ILO에서도 98년 3월과 11월, 2000년 3월에 노조 전임자급여 지원 문제는 입법적 관여의 대상이 아니라며 관련 규정 삭제를 권고했다”고 밝히고 있다. 노조법에 관련 조항이 생긴 직후부터 ILO가 문제 삼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ILO 결사의 자유위원회는 2007년에도 같은 권고를 했다.

정부는 ILO 권고를 외면하면서 22년 동안 노조 전임자임금 지급금지를 추진했다. 노동부는 전임자임금 금지제도를 놓고 노사정이 힘겨루기 했던 2009년 11월 당시 보도자료에서 “전임자급여 지원금지는 ILO 기준에 전적으로 부합한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했다. “전임자임금을 금지하더라도 ILO 노동자대표 보호협약(135호)과 동시에 제정된 권고(143호)에 따라 근로자대표에게 적절한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한도 넘으면 부당노동행위? "또 국가 개입" "조삼모사"

현재로서는 노동부 입법예고안이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국회에서 노조법 개정안을 의결해 시행하더라도 노조활동을 옥죄었던 전임자임금 지급금지 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정부 입법예고안에는 노동부 소속으로 돼 있는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를 독립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옮기는 내용이 담겨 있다. 상대적으로 정부 입김에서 자유로운 곳에서 노사단체와 전문가들이 타임오프 한도를 결정하라는 취지로 해석된다.

그런데 타임오프 한도를 초과하는 노사합의를 무효로 보고 부당노동행위로 간주하는 조항이 추가됐다. 노동부는 “국가가 직접 개입하는 것을 최소화하고 지나치게 많은 전임자임금을 지급하는 것을 예방하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전임자임금 문제로 노사갈등이 격화할 수 있고, 과도한 급여지원이 노조 자주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노동계는 이에 대해 “입법예고안 역시 전임자임금 문제에 국가가 개입하지 마라는 ILO 협약에 위배된다”고 반발했다. 이주호 민주노총 정책실장은 “노동부가 노조 전임자임금 지급금지 조항을 폐지하겠다고 했지만 조삼모사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병훈 교수는 “정부 입법예고안이 시행될 경우 위축된 노조활동에 숨통이 트일지 예상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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