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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비준-후 입법' ILO 협약도 판문점선언처럼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는 판문점선언처럼 처리하면 된다.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비준을 의결한 뒤 소관 부처가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면 된다. 비준을 동의할지, 관련 법령을 고칠지, 비준안 실천에 필요한 국가재정을 허용할지는 국회가 알아서 할 일이다. 행정부는 행정부가 할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다. 국회가 입법한 후에야 행정부가 비준 절차를 개시할 수 있다는 논리는 비준하지 말자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헌법 60조는 "(국회가)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또는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고 밝히고 있다. 국회가 가진 것은 비준권이 아니라 행정부 비준에 대한 동의권이다. 비준에 관한 권한과 책임은 행정부가 지는 것이다. 입법부가 지는 책임은 대통령이 행사한 비준에 대한 동의이지, 비준 자체가 아니다. 이를 혼동하면 안 된다. 또한 국회가 입법을 하지 않는다고 대통령의 비준 행위가 무효가 되는 것도 아니다. 국민에게 약속한 공약을 실천하는 '비준'이라는 정치적 행위와 '법률적 보완'이라는 기술적 형식이 일치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국회를 구성하는 여야 정당들이 '정치'를 통해 해결하면 된다.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남북관계발전법) 21조가 명시한 남북합의서 체결·비준을 살펴보자. "1항, 대통령은 남북합의서를 체결·비준하며, 통일부 장관은 이와 관련된 대통령의 업무를 보좌한다. 2항, 대통령은 남북합의서를 비준하기에 앞서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3항, 국회는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남북합의서 또는 입법사항에 관한 남북합의서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 4항, 대통령이 이미 체결·비준한 남북합의서의 이행에 관해 단순한 기술적 절차적 사항만을 정하는 남북합의서는 남북회담대표 또는 대북특별사절의 서명만으로 발효시킬 수 있다."

판문점선언은 대통령이 공약한 남북 화해와 협력을 이행하는 과정의 일부다. 국가 수반이자 행정부 수장이 평화통일이라는 헌법적 의무를 다하려는 정치적 노력이기도 하다. 남북관계발전법의 관련 조항에서 '남북합의서'를 'ILO 협약'으로 바꾸면 ILO 협약을 비준하는 주체와 진행 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통령은 ILO 협약을 체결·비준하며, 소관 장관은 이와 관련된 대통령의 업무를 보좌한다→대통령은 ILO 협약을 비준하기에 앞서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국회는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ILO 협약 또는 입법사항에 관한 ILO 협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대통령이 이미 체결→비준한 ILO 협약에 관해 단순한 기술적 절차적 사항만을 정하는 ILO 협약은 고용노동부 대표 또는 외교부 대표의 서명만으로 발효시킬 수 있다→국회의 동의 또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친 ILO 협약은 법령 등 공포에 관한 법률(법령공포법) 규정에 따라 대통령이 공포한다."

ILO 기본협약(87호 결사의 자유·98호 단체교섭권)은 헌법이 보장한 노동 3권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헌법적 가치에 완전하게 일치하는 국제법을 비준하자는데 헌법 하위에 있는 법령들과 내용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비준할 수 없다는 발상을 하는 자들을 어떻게 자유민주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선 비준-후 입법'이 국제조약 비준에서 대한민국의 일반적인 절차이자 관행인데도 헌법이 명시한 노동기본권에 관련된 ILO 기본협약에 대해서만큼은 '선 입법-후 비준'을 고집하는 자들을 어떻게 법치주의자라 부를 수 있을까.

'선 입법-후 비준'을 주장하는 법기술자들은 ILO 기본협약과 국내법과의 충돌 문제를 부각하지만, 이것은 본질이 아니다. 헌법과 하위법령의 충돌 문제가 더욱 심각한 문제다. 헌법은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보장하고 있음에도, 하위 법령으로 헌법을 깔아뭉갠 지난 70년에 대한 반성과 시정은 ILO 기본협약 비준이라는 정치적 행위에서 시작한다. 이를 입법적 완성으로 이끌 주체는 국회지, 행정부가 아니다. 행정부가 비준을 서둘러 하루빨리 국회에 공을 넘겨야 한다. 입법을 이유로 비준을 미루는 행정부의 지금 모습은 수비수가 공격수도 하려는 '오버액션'에 다름 아니다.

'선 입법-후 비준'론자들이 하는 소리가 있다. "개별 ILO 협약은 비준시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입법 절차와 동일한 단계를 거쳐 비준을 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비준시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는 말도 근거가 없고, 그래서 입법 절차와 동일한 단계를 거쳐 비준을 하게 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이들이 또 다른 근거로 내세우는 게, 입법형성기 국가들은 '선 비준-후 입법(이행)' 방식을 채택하고, 입법완성기 국가들은 '선 입법(이행)-후 비준' 방식을 채택한다는 주장이다. 전자의 예로 남수단·아르메니아·감비아·몰디브를 든다. 이 역시 거짓말인데 일본은 98호 협약을 1953년 10월 비준했고, 87호 협약을 1965년 6월 비준했다. 이후 비준한 협약과 국내법 충돌 문제를 ILO와 꾸준히 협의하고 있다. 더군다나 노동기본권에서 대한민국은 '입법완성기'가 아니라 '입법형성기'를 지나고 있다.

현실적으로도 '선 입법' 꿈은 빨리 깨는 게 정신건강에 유익하다. 여소야대 상황이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와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도 자유한국당이 장악했다.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부정하는 정당, '노동귀족'이 원내대표와 환노위 간사인 정당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노동기본권을 천시하고 거부하는 태도에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라고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선 입법-후 비준'이라는 기괴한 논리에 갇혀 1991년 ILO 가입 이후 27년을 허비했다. 이런 논리라면 '선 입법(이행)' 후에 ILO에 가입해야 될 일이었다. 입법과 이행이 제대로 안 되고 있기에 방향을 잡는 등대이자 이행을 독려하는 디딤돌로 비준을 하는 것이다. 입법이 다 돼 있고 이행도 잘되는 것을 애써 따로 비준할 이유가 없다. 판문점선언만이 아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따져 보면 '선 비준-후 입법(이행)'이었다.

인더스트리올 컨설턴트 (industriallyoon@gmail.com)

윤효원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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