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우 변호사 민변 노동위원회

1. 평소 방송제작현장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던 터라 직장갑질119 산하 방송계갑질119에서 활동하고 있다. 짧은 기간이지만 방송현장 비정규직의 다양한 실태와 문제의 심각성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방송현장은 그야말로 비정규직 고용형태 백화점이다. 기간제·단시간 노동자와 불법파견 등 간접고용·노동자, 프리랜서라는 이름의 특수고용 노동자까지. 고용형태는 물론 문제 양태도 다양하고 심각하다. 노동자냐 아니냐라는 근본적인 문제부터, 다단계 착취구조·장시간 노동·안전보건 불감증·불공정계약·불법파견·임금체불 등 문제 양태가 다양하고 뿌리 깊다. 하나씩 들여다보자.

2. 하나의 방송프로그램(드라마·비드라마 모두)은 방송사가 직접 제작하기도 하지만 외주제작을 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방송사가 직접 제작하는 경우에도 방송사 소속 직접고용 노동자만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 노동자들이 제작에 참여한다. 이 중 프리랜서로 호명되는 다양한 직군의 종사자들, 즉 작가·피디·스태프 등이 방송제작에 참여한다.

그러나 프리랜서라는 호칭과 달리 이들의 근무실태는 전혀 ‘프리’하지 않다. 이들은 모두 방송사의 기획과 스케줄, 구체적인 업무지시, 방송사 소속 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유기적인 협업 구조 속에서 자신들에게 지시된 업무를 종속적인 지위에서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 정도와 양태는 조금씩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본질적으로 사용자에 종속된 노동자 지위에 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장기간 방송사에 종속돼 근무하거나 소수 인력으로 프로그램 제작을 진행하는 지역 방송사의 경우 그 종속성 정도는 매우 심각하다. 사실 정규직 노동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근무실태를 보인다. 법원도 MBC <뉴스 후> 피디 판결, 교통방송 객원피디 판결, VJ 판결, 방송연기자노조 판결, 대구 CBS 프리랜서 아나운서 판결, KBS FD와 스크립터 판결 등에서 모두 이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이들을 프리랜서라는 이름으로 왜곡할 것이 아니라 실태에 부합하게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그리고 이에 합당한 노동법적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3. 한국의 방송 제작시스템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는 다단계 하도급구조, 즉 다단계 착취구조다. 다단계 구조로 인해 착취가 꼬리를 물고, 책임회피가 일상화하고 있다. 방송현장 비정규 노동자들의 다양한 문제가 상당 부분 이러한 착취구조, 무책임 구조에서 기인한다. 프로그램 제작은 방송사 또는 제작사를 정점으로 다양한 하청·재하청 업체들 소속 노동자들이 같은 공간에서 피디 한 명의 총지휘하에 제작에 임하는 구조이므로 대부분 불법파견에 해당한다. 고용은 하지 않고 프로그램 제작에 복무하는 다양한 직군과 소속 노동자들을 사용하면서 법적 책임을 회피하는 구조다. 이러한 제작현장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방송사 또는 제작사는 방송현장에 종사하는 다양한 노동자 직군들에 대해 철저한 ‘갑’의 위치에서 군림한다. 이러한 갑질은 최소한의 형식성도 갖추지 않고 노골적으로 작성된 계약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정부 부처가 다양한 유형의 표준계약서를 제시한 바 있으나 현실에서는 유명무실하다.

4. 방송제작현장은 근로기준법 59조에 따라 근로시간 제한 특례업종으로 분류돼 근로자대표와의 서면합의로 무제한 노동이 가능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그러나 방송현장이 과연 근기법상 ‘영화제작 및 흥행업’에 포함되는지는, 근로자대표와의 서면합의를 전제로 무제한 노동이 이뤄지고 있는지는 상당한 의문이다. 방송현장 노동자들이 가장 심각하게 호소하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 문제인데, 장시간 노동은 노동자들의 건강권 침해와 잦은 사고로 귀결되고, 제대로 된 임금보전이 이뤄지지 않아 결과적으로 임금착취와 노동착취로 귀결된다. 방송현장을 근기법 59조에서 배제하는 법 개정이 시급한 이유다.

5. 최근 방송현장 관련 상품권페이 논란이 심각하게 제기된 바 있다. 방송사와 제작사는 노동자들의 임금조차 ‘갑’의 위치에서 상품권으로 강제 지급하는 파렴치한 수준에 이르렀다. 가장 기본적인 노동법 조항조차 방송현장에서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방송현장 노동자들은 프로그램 제작에 성실히 참여해도 해당 프로그램이 결방되면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결방에 대한 책임은 방송노동자들이 아닌 사용자에게 있음에도 사용자들은 자신들의 임금지급 의무를 스스로 면책하는 희귀한 현상이 방송현장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재현되고 있다. 또한 방송현장 비정규 노동자들은 임금·상여금과 각종 복리후생은 물론 주차비·출입증 발행에 있어서도 심각한 차별에 시달린다.

6. 이처럼 방송제작현장은 노동법 사각지대, 무법천지 그 자체다. 그럼에도 문화체육관광부·고용노동부·방통통신위원회 등 관련 부처는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고 수수방관해 방송현장의 뿌리 깊고 노골적인 문제를 양산했다. 노동존중 사회를 표방하는 문재인 정부는 노동법 사각지대인 방송제작현장에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심각한 현실이 시급히 개선될 수 있도록 하루빨리 법·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착취의 단물을 먹고사는 방송사와 제작사에 이와 같은 개선을 기대할 수는 없다. 현장에서 매일매일 문제의 심각성을 체험하고 있는 비정규 노동자들 스스로가 자기 조직화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2018년, 방송제작현장 노동자들의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원년이 되기를 기대한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