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이미지투데이

4년차 방송작가 김미래(26·가명)씨는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올림픽 기간 동안 기존 방송이 특별편성으로 대체되면서 본인이 맡은 프로그램도 결방이 예정됐기 때문이다. 통상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난 뒤에 편당 임금을 받는 방송작가에게 결방은 곧 임금손실을 의미한다. 주 1회 방송 기준으로 50만~70만원을 받는데 2~3주에 걸쳐 결방이 되면 100만~210만원을 평소보다 못 벌게 되는 셈이다. 김씨는 남북미 정상회담으로 특별편성이 잦았던 2년 전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주변에서는 쿠팡 물류센터 단기 아르바이트에 뛰어드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김씨는 “방송작가는 방송이 ‘죽으면’ 당연하게 임금을 못 받는 신세”라며 “몇 달간 안 쓰고 모아 둔 돈으로 이번 결방을 버틸 생각”이라고 말했다.

도쿄올림픽 개막이 코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방송계 비정규 노동자들이 결방에 따른 임금손실로 생계 위협을 겪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방송사 사정으로 편성이 변경된 것인데도 그 피해는 고스란히 제작에 참여한 비정규 노동자 몫으로 전가됐다.

제작 완료했어도 76% “임금 못 받아”
결방돼도 무급노동 내몰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지부장 김기영)는 20일 작가·PD 381명을 대상으로 지난 1일부터 11일까지 결방 피해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를 발표했다. 381명이 모두 “방송사의 편성 변경으로 결방된 적이 있다”고 답했는데, 결방 횟수가 ‘연 5회 이상’이라고 답한 응답자도 31.8%나 됐다. 결방 사유로는 올림픽 같은 스포츠 이벤트가 73.5%로 가장 많았고, 명절(44.9%)·채널별 특별방송(37%)·국가 정상회담(24.4%)이 뒤를 이었다.

편당 임금을 받는 작가나 피디의 경우 결방시 10명 중 9명은 “임금을 못 받는다”고 답했다. 제작이 진행 중이든 완료됐든 임금 지급 여부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결방이 되기 전 제작이 진행 중이었을 때는 87.6%가 “임금을 못 받는다”고 답했고, 제작이 완료됐을 때도 76.4%가 “못 받는다”고 답했다. 제작이 완료된 경우 결방시 임금을 “전액 지급받았다”는 응답자는 7.9%에 불과했다.

현재 케이블방송에서 작가로 일하는 임지민(29·가명)씨는 지난해 말 다른 방송사에서 50여만원의 편당 임금을 지급받았다가 결방을 이유로 반환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임씨는 “황당했지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며 “방송 시작 1시간 전에 편성이 바뀌거나 촬영을 찍다 되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했다.

비정규 노동자에게 ‘결방=휴가’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았다. 편당 임금을 받는 작가·피디는 결방이 결정되고 나서도 10명 중 6명은 “일한다”고 답했다. ‘스톡’이라고 부르는 예비용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데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급노동에 내몰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고 노동자들을 입을 모았다. 김미래씨는 “시의성이 중요하지 않으면 제작한 프로그램을 2~3주 뒤에 내보내도 되지만 시의성이 중요하면 갑작스러운 결방으로 제작을 마친 해당 프로그램을 폐기하고 다시 새로 만들어야 한다”며 “노동력은 두 배로 들지만 임금은 한 번만 받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상파 방송프로그램 메인작가로 일하는 이윤희(37·가명)씨는 “쉬는 김에 기획안을 써 오라거나 새로운 아이템을 구상해 오라는 식”이라고 증언했다.

“방송 비정규 노동자
쓰고 버릴 수 있다는 인식에서 기인”

이러한 관행이 지속된 데에는 작가와 피디가 대부분 불안정한 고용형태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송사나 제작사와 프리랜서 계약을 맺고 일하는 PD나 작가는 ‘갑’인 방송사 결정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프로그램 완성이 아닌 방영 여부에 따라 임금이 지급되는 시스템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묵인되고 무급노동에 내몰리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이유다.

김기영 지부장은 “올림픽 같은 이벤트는 방송사가 미리 계획을 할 수 있는데도 갑작스럽게 일방적인 결방 통보를 하는 일들이 반복되는 것은 방송비정규 노동자를 편한대로 쓰고 버릴 수 있다는 인식에서 기인한다”며 “방송비정규 노동자를 노동자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부는 “모든 방송사에 도쿄올림픽 방송 등 방송사의 사정으로 결방되는 프로그램의 비정규 노동자들에 대한 생존권을 보장하고 이미 제작된 프로그램의 방송 스태프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급할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지부는 결방대책 촉구를 위한 1인 시위를 서울 여의도 KBS 앞에서 21일부터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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