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교조 조합원들이 지난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법외노조 처분 철회를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전교조 법외노조 처분은 노조설립 신고제를 허가제로 둔갑시킨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정기훈 기자
 

박근혜 탄핵 촛불이 100만개를 넘긴 2016년 11월. 알바를 하느라 촛불집회에 못 나간 20대 알바청년이 전직 야당 의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루 일당을 포기하고 촛불집회에 나가면 세상이 바뀔까요?” “야당 후보를 찍으면 야근수당을 받을 수 있을까요?”

촛불의 힘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되고, 구속됐다. 청년 노동자의 삶은 바뀔까. 대다수 사람들은 어렵다는 것을 안다. 우리 주변 적폐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은수미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근 자신의 저서 <은수미의 희망 마중-알바가 시민이 될 수 있나요?>에서 “정부의 의지와 정치권 결단의 문제”라며 알바청년의 질문에 답했다. 은 전 의원은 “헌법에 보장된 노동 3권은 정부가 시민에게 제공해야 할 기본서비스라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을 때가 많다”며 “법대로만 해도, 정부의 의무를 다하기만 해도 노조 조직률은 올라간다”고 지적했다. 이어 “비정규직이 노조에 가입하고 노조 조직률이 높아지면 알바도 노조에 가입해 야근수당과 특근수당·연장수당·휴일수당을 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노동 3권을 보장해야 노동자들의 권익과 노동조건을 향상할 수 있다는 헌법의 취지를 강조한 것이다.

비정규직·정규직, 민간기업·공공기관 가리지 않는 노동권 박탈

<매일노동뉴스>가 지난달 20일부터 31일까지 실시한 노동적폐 설문조사에 응한 노동문제 전문가들의 문제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사관계·노동조건·일자리·안전보건 등 노동 관련 전 분야에 걸쳐 쌓이고 쌓인 적폐는 다양하다. 전문가들은 이 중에서도 노동 3권 실종을 최고의 노동적폐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단결권(34명)·단체행동권(29명)·단체교섭권(26명) 실종이 1·2·4위를 차지했다.

이번 설문조사에는 학자·변호사·공인노무사 82명이 참여했는데,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 제약 중 최소한 하나를 노동적폐로 지적한 전문가는 37명(45.1%)이었다.

전문가들이 노동 3권을 제한하는 것으로 본 노동행정·제도는 수두룩하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민간기업과 공기업 노동자를 구분하지 않고 노동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 근로기준법이나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상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어도 인정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사용자들이 교섭에 응할 법적 의무도 없다.

파견·용역 같은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어 단체교섭을 요구해도 하청·파견업체들은 실질적인 권한이 없다. 원청이 협상에 나오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비정규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어 활동하려면 일자리를 잃는 불이익을 감내해야 한다. 파견·도급·위수탁 계약해지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우지연 변호사(공공운수노조 법률원)는 “노동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노동자·사용자 개념(노조법 2조)이 파견·용역,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노동 3권을 박탈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비정규직 남용·확산은 전문가들이 뽑은 노동적폐 3위에 이름을 올렸다. 전문가들은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무분별한 사내하도급 확산 등을 구체적인 적폐로 지목했다. 노조를 만드는 것조차 어려운 현실도 비정규직 문제를 심각하게 하는 주원인이 된다.

윤자영 충남대 교수(경제학)는 “노조 조직률이 하락하거나 정체하는 가운데 비정규 근로자의 조직화와 집단적 노사관계를 방해하는 법·제도 문제가 심각하다”며 “일자리 질 개선을 위해 비정규직 조직화와 집단적 노사관계 활성화를 위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공무원이나 교사 역시 노조 설립신고증을 받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해고자를 조합원으로 포함한 노조 규약을 문제 삼아 전국공무원노조의 설립신고증을 내주지 않았다. 전교조는 법외노조 처분에 직면했다. 노조 설립신고 제도가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상대적으로 노조 설립이 쉬운 대기업 정규직노조와 공공기관노조가 받는 노동기본권 제약도 만만찮다. 정리해고·민영화에 반대하는 파업은 십중팔구 불법으로 낙인찍힌다. 사용자 경영권에 속하는 사안이라거나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파업이라는 이유를 든다. 노조에게 돌아오는 것은 업무방해죄 적용과 손해배상·가압류, 그리고 가혹한 징계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의 노조설립 신고제도나 쟁의행위 정당성 판단체계가 지나치게 복잡하고 모호하다”며 “교사와 공무원에게 노조 자율설립 원칙이 구현되도록 하고, 구조조정 철회 등 근로조건과 밀접한 사안을 이유로 한 쟁의행위는 정당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와 함께 필수공익사업장 필수유지업무제도와 복수노조 간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를 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약화시키는 원인으로 꼽았다.

적폐로 지목당한 노동부 “사용자 편향에 기본권 사라져”

69년 전 제정된 헌법이 보장한 노동 3권이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전문가들은 정부 태도를 주요하게 지적한다. 고용노동부·노동행정(18명)이 단체교섭권 보장 미흡 다음 순위인 노동적폐 5위에 올랐다.

노동부를 적폐로 본 전문가들은 “자본과 기업 편향적인 노동행정”을 비판했다. 권동희 노무사(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는 “노동부는 노동자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기업의 입장에서 법·제도를 운영해 왔다”며 “노동감수성과 인식이 없는 저들이 앉아 있는 한 노동자 삶을 개선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눈에 띄는 대목은 노동부의 행정이 되레 노동 3권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이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한국에서 노동자들의 기본권이 사라진 배경에는 노동부의 심각한 편향이 존재한다”고 했고, 한 국책연구기관 학자는 “정부가 앞장서 비정규직과 공무원·교사의 노동기본권을 제약하고 노조를 약화시키고 있다”고 했다. 부당노동행위에 관대하고 노조설립 신고제도를 사실상 허가제로 전락시킨 노동부의 책임이 크다는 얘기다.

노동부를 적폐로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근로감독을 포함한 노동행정의 미비를 적폐로 간주한 전문가들이 적지 않았다. 이정희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있는 법조차 작동되지 않고 있다”며 “사법경찰권을 가진 몇 안 되는 부처 중 하나인 노동부는 근로감독행정 강화를 제1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사용자에 편향된 것은 노동부와 노동행정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노동법제와 정책 자체가 사용자에게 기울어져 있다는 것(공동 8위)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김장호 숙명여대 교수(경제학)는 “지금까지 한국의 노사관계 정책기조는 사용자를 우선시하는 경제적 효율성을 편향적으로 강조해 왔다”며 “과다한 격차와 불평등이 이런 편향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했다.

사용자 편향적인 정책·제도에는 '부당해고나 부당노동행위로부터 노동자를 구제하는 제도'까지 포함된다. 문성덕 변호사(한국노총 중앙법률원)는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에서 노동위원회는 입증책임이 노조나 노동자에게 있다는 이유로 지극히 소극적으로 부당노동행위를 인정하고, 노동청 역시 매우 소극적으로 수사를 한다”고 말했다.

“양극화의 뿌리는 노동 비하 인식”

노동기본권 실종과 사용자 편향적인 노동행정·정책의 이면에는 노동·노조에 대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배제·비하·적대감(공동 8위)이 자리 잡고 있다. 노동과 노조를 보는 인식이 부정적인 상황에서 노동 3권을 보장받거나 공정한 정책 시행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노동 없는 노동정책, 노동 없는 민주주의라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문호 워크인연구소 소장은 “노동정책 대상이 노동임에도 지금까지 노동의 참여 없이 노동정책이 발표되면서 예외 없이 사회적 갈등을 초래했다”고 밝혔다. 채준호 전북대 교수(경영학)는 “한국의 노동시장 양극화, 소득 양극화의 뿌리는 일하는 사람(노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라며 “노동적폐 해소는 이런 인식을 전환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노조에 대한 한국 보수정치세력과 보수언론의 강한 적대감은 무지라기보다는 악의에 가깝다”며 “보수도 헌법에서 보장한 노동 3권의 의미를 인식하고 수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ILO 핵심협약 비준으로 여건 조성, 산별교섭·이익대변제도로 보완해야”

노동적폐에 대한 전문가들의 인식은 ‘이번 대선에서 반드시 포함돼야 할 노동공약’에도 반영됐다.

1·2·3위는 △비정규직 대책 △저임금 해소 △노동시간단축이 차지했다. 정부의 정책 변화나 법 개정을 통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노동문제다. 4위는 노조 만들 권리 보장, 공동 5위는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 보장이다.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이 공동 9위에 오른 것도 관심을 끈다. 이 부분을 강조한 전문가 8명은 하나같이 ILO 핵심협약 중 87호(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와 98호(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원칙의 적용에 관한 협약) 비준을 요구했다.

이들 협약은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문제와 필수공익사업장 필수유지업무, 해고노동자 노조가입, 사내하청 노동자와 특수고용직 등 비정규직의 노조활동 보장, 교사·공무원의 노조가입과 단체교섭권 보장, 노조 설립신고 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ILO 87호 협약과 98호 협약은 노조법과 공무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공무원노조법),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교원노조법)과 충돌한다. 정부는 “협약비준은 사회적 정서에 위반된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협약 비준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문이다. 엄진령 노무사(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는 “노동관계법을 부분적으로 바꾸기 전에 논의 틀 자체를 바꾸고 수준을 올려야 한다”며 “핵심협약 비준이 계기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문가들이 주장한 대선공약 순위 7위(초기업노조 체계 확립, 단협효력 확장)와 9위(노동자 이익대변제도 강화)도 노동기본권 보장과 무관하지 않다. 노동기본권을 제약하는 환경을 보완하기 위해 제기된 의제들이다.

초기업노조 교섭체계를 확대하는 것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포함해 양극화 해소 차원의 의미가 크지만 노동권 보장 의미도 적지 않다. 기업별노조 체계로는 비정규직 같은 취약계층 노동자들을 흡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은 “노조할 권리를 보장하려면 노조설립을 초기업노조로, 단체협약 보호를 초기업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사협의회 제도개선과 노동자 경여참여를 위한 노동이사제 확대, 노동회의소 제도 도입처럼 노조가 아닌 기구를 통한 노동자 이익대변제도 강화도 마찬가지다. 안정화 고용노동연수원 교수는 “우리나라는 노조 조직률이 낮은데 노조 경영참여를 터부시하는 등 노동자 이해를 대변하는 제도조차 미비하다”며 “낮은 노동대표권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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