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가랑비가 내리던 2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이주민들을 위한 문화예술공간 '프리포트(Freeport)'는 이주노동자들과 활동가들의 웃음소리로 왁자지껄했다. 이들이 이날 이주노동자들의 ‘항구’로 불리는 프리포트를 찾은 이유는 각별했다. 대법원이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조(이주노조)의 노조 설립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이날 미등록 이주노동자라 하더라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상 노동자로 노동 3권이 있다고 판결했다. 2007년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이 있은 지 8년4개월 만이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인 우다야 라이 이주노조 위원장도 활짝 웃었다. 2005년 노조 설립신고서를 낸 지 10년 만에 노조 지위를 얻게 됐으니 찾아온 이주노동자들과 활동가들은 날 새는 줄도 모르고 노조 만들던 얘기며 쫓겨난 동료 얘기에 빠져 들었다. '옛날' 얘기에 국외로 추방된 아노아르 후세인·림부 토르너·미셸 카투이라 위원장 이름이 빠질 리 없다. 조합원들은 "이 자리에 정말 있어야 할 사람들인데 (추방돼) 없어서 아쉽다", "보고싶다"고 말했다.

"전 세계 이주노동자 승리한 날"

“오늘은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 이주노동자들이 승리한 날이예요.” 미셸 카투이라 전 노조 위원장은 대법원 판결 소식을 접하자마자 그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글을 남겼다. 그는 2006년 한국에 입국해 경기도 부천에서 일하다 2009년 7월 이주노조 4대 위원장에 당선됐다. 2012년 필리핀에서 인천공항을 통해 재입국했지만 출입국사무소에서 입국 규제자라는 이유로 강제 출국시켰다. 그는 현재 필리핀의 이주노동단체에서 근무하고 있다.

미셸 전 위원장은 <매일노동뉴스>에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인 노동자들처럼 노동기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대법원의 결정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다”며 “예상하지 못했던 대법원의 판결을 접하고 믿기지 않았고,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한 모든 사람들에게 필리핀에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한국·필리핀 등 각국의 SNS 이용자들이 미셸 전 위원장에게 축하 메시지를 남겼다.

사실 이주노조 위원장들은 강제출국을 감내하며 활동을 벌였다. 역대 이주노조 위원장과 간부들이 하나같이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의해 강제로 추방됐다. 국제앰네스티가 강제추방과 관련해 한국 정부에 여러 차례 항의했지만 매번 같은 일이 반복됐다.

이주노조 세 번째 위원장인 네팔 국적의 림부 토르너 전 위원장도 26일 전화인터뷰에서 “한국에서 노조 활동을 하느라 고생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SNS를 통해 이틀에 걸쳐 받았다고 했다. 그는 2008년 이주노조 위원장이 된 지 한 달 만에 출입국사무소 직원에게 붙잡혔다. 그리고 연행된 지 13일 만에 한국에서 추방됐다. 2004년 이주노동자의 강제추방 저지를 요구하며 380여일 동안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현재 홍콩의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토르너 전 위원장은 “한국에 있는 동안 이주노조가 합법화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는데 추방당했다”며 “한국에 남아 있는 조합원들이 20년이 걸려도 이주노조 합법화 투쟁을 이어갈 것이라고 믿었는데 지금이라도 법적지위를 얻게 돼 기분이 정말 좋다”고 말했다. 이어 “이주노조 조합원들의 지속적인 투쟁과 한국 노동·시민단체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주노조 합법화도 어려웠을 것”이라며 고마움을 전했다.

법적 지위 얻은 이주노조, 과제 산적

대법원이 이주노조의 법적지위를 인정하면서 공은 다시 고용노동부로 넘어갔다. 노동부는 “노조설립 요건이나 규약에 문제가 없는지 설립신고증을 새로 심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노조 설립신고증을 받으면 합법노조로 활동할 수 있게 된다. 설립신고증을 받더라도 사용자와 단체교섭을 진행하거나 사업장별로 지부·지회를 설립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고용허가제에 따라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동 횟수가 3회로 제한돼 있고, 일할 수 있는 업종도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사용자에게 노조 조합원 신분을 드러내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경우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적발되면 곧바로 추방된다.

이주노조는 현재 1천100명 수준인 조합원수를 대폭 늘리고, 이주노동자들이 근무하는 공단 사용자들을 만나 근로기준법과 산업안전보건법 등 법규를 준수하는 내용의 노사 합의문 채택을 요구할 계획이다.

박진우 이주노조 사무차장은 “이전에는 이주노동자를 한 명 한 명 만나 노동상담을 하고, 노조 가입을 권유했다”며 “앞으로는 상담 위주의 활동에서 벗어나 사용자를 직접 만나 안전한 사업장을 만들고 근무환경 개선을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노총 등 노동·사회단체가 구로공단의 노동환경 실태를 조사해 개선을 요구한 것처럼 이주노조도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있는 공단의 노동환경 개선을 추진할 수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동을 제한하는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외국인고용법) 조항을 바꾸는 것도 이주노조의 숙제다. 사업장 이동 제한조항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양산한다. 또 사용자들의 악용사례가 빈번하게 확인되면서 대표적인 인권침해 조항으로 비판받고 있다. 이주노동자의 퇴직금인 출국만기보험금 지급시기가 '출국 후 14일 이내'로 변경되면서 발생한 불합리한 차별도 개선할 점이다. 출국만기보험금 지급시기가 바뀌면서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장을 이동하더라도 출국 전까지 퇴직금을 받을 수 없게 됐다. 이 또한 외국인고용법 개정이 필요하다.

박 사무차장은 “고용허가제는 사회적 합의와 국민 여론이 개선돼야 바뀌는 문제라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중장기적인 목표였던 이주노조 합법화가 이뤄진 만큼 제도개선에 집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우다야 라이 위원장은 “임기 내에 법적 지위를 얻기를 간절히 바랐다”며 “더 많은 이주노동자를 조직하고 이주노동자의 노동권을 보호하기 위해 열심히 투쟁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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