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노동판에서는 이미 이름만으로 유명해져, 독일 노동개혁의 전도사로 불리는 페터 하르츠(Peter Hartz) 박사가 한국에 왔다. 그가 개인적으로 어떠한 보상을 받고 어떠한 목적에서 왔느냐와 무관하게, 그는 이미 한국에서 노동시장 유연화를 하자는 사람들의 지주 내지 아이콘처럼 돼 있다.

사회민주주의자인 그가 독일과 판이하게 다른 한국 노동시장의 상황을 공부하고 나서 과연 그러한 의견을 지닐 것인지 의심스럽지만, 그들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다. 한국에 대한 무지의 공간에 그가 머물고 있는 동안 하르츠의 상징성은 그렇게 임의로 그려지고 팔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나는 경영학 박사인 그가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이 부분에 대해 더욱더 명확한 답을 제시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럴 경우 그를 초대한 주체들의 의도와 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대략 두루뭉술하고 일반론적 의견만 설파하다 가려는 것 같고, 그걸 놓고 해석가들은 기존 프레이밍을 굳히는 자원으로 사용하려는 듯하다.)

왜곡된 노동개혁 상징 ‘하르츠’

지금 한국 공론장의 주류는 “하르츠 개혁이 독일 부흥의 견인차였고, 그러한 개혁의 핵심은 노동시장 유연화였으며, 한국도 하르츠 개혁처럼 노동시장을 유연화해서 일자리 창출과 경제의 재도약을 이뤄야 한다”는 식의 판에 박힌 논리를 설파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독일에서는 하르츠 개혁이 독일 부흥의 견인차라는 의견 이상으로 그에 대한 이견이 존재한다. 하르츠 개혁의 핵심은 노동시장 유연화, 그것도 우리가 하려는 수량적 유연화에 있다고 보기 힘들다. 노동시장 유연화가 그 안에 없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 한국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핵심은 그게 아니다. 게다가 하르츠 식 노동시장 유연화에 대해서는 그 부작용을 놓고 독일 내에서 강력한 비판이 쇄도하고 있기도 하므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현재 한국에서 하르츠에 대한 해석은 그가 독일의 맥락에서 십수년간 수행한, 보다 의미 있는 개혁의 내용을 너무 협소하고도 편향되게 소개하고 있고, 그러면서 거의 소설에 가까운 논리적 비약을 자의적으로 행하기까지 한다. 이 역시 독일이라고 하는 먼 나라에 대한 한국 대중들의 무지의 공간에 정책지식 유통업자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포장지를 씌워 내용물에 대한 편향된 해석을 강요하는 꼴이다. 응당 그 배후에는 한국 사회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고 싶어 하는 이들의 이해(interest)가 숨어 있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권력(power)의 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페터 하르츠는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10여년간 독일 사회를 풍미한 인물이다. 그가 유명해진 계기는 폭스바겐(Volkswagen) 노동이사(Arbeitsdirektor)로 재직하던 시절, 그가 행한 기업 내부 인력운용 방식상의 개혁이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 그 방향성은 분명 유연성의 극대화였지만, 그 목표는 철저한 고용안정의 실현이었다. 더불어 그 속에서 그는 혁신을 통한 생산성 향상까지 도모해 보려 했다. 산술상 3만여명이 해고돼야 하는 심각한 경영악화 속에서 단행된 이 개혁에서 해법은 주당 근로시간을 28.8시간까지 내리는 것, 그러니까 주당 사흘 반 정도 일하고, 보너스 등 급료의 일부분만 삭감되도록 하면서 고용은 유지하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독일의 조업단축(Kurzarbeit) 제도를 기업 자체적으로 응용해 활용했다. 여기에서 끝난 게 아니다. 평범한 조업단축만이 아니라 그와 결부시켜 다양한 혁신안을 동시에 구현하고자 했다. 이를테면 다기능화와 수평적 팀제의 강화, 고령자와 청년의 릴레이식 고용, 노동시간구좌(Arbeitszeitkonto)의 도입 등 참신한 방안이 골고루 다양하게 도입됐다. 하르츠가 고안한 창의적인 방안들은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그가 집필한 3부작 저서에 잘 소개돼 있다. 그 제목은 각각 <모든 일자리에는 얼굴이 있다> <숨 쉬는 기업> <일자리 혁명>이다. 실업자 신규채용 프로젝트인 ‘아우토5000’도 그가 아이디어를 보탠 것이었다.

하르츠는 분명 기업 내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추구했다. 하지만 그것은 비정규직을 남용하는 외적 수량적 유연성(external nummerical flexibility)과는 거리가 멀었다. 임금의 유연성, 근로시간의 유연성, 그리고 작업조직의 유연성 등 사람을 비정규직으로 만들거나 해고를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유연성에만 초점을 뒀다. 개혁 추진 결과 폭스바겐은 단 한 사람도 해고하지 않고 위기를 무난히 넘겼다. 그 이후 유럽 최대 자동차 메이커이자 세계시장을 선도하는 실력 있는 다국적 기업으로 도약했다. 기간제 비정규직을 더 만들거나 늘리고 해고요건을 완화해 기업의 부담을 줄이자는 식의, 한국 노동시장 구조개혁론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이들의 주장과 비교해 보면 하르츠는 정반대의 길을 갔다.

주안점은 고용서비스 개편

90년대 자신이 주도한 개혁으로 승승장구한 하르츠는 2000년대 초 친분이 있던 게르하르트 슈뢰더 당시 총리의 부름을 받아 전국적인 노동시장 개혁의 선봉장으로 나서게 된다. 하르츠가 한창 기업개혁의 수장으로 활약할 당시 슈뢰더는 폭스바겐이 있던 니더작센주의 주지사를 역임했다. 폭스바겐 지분의 상당 부분을 니더작센주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두 사람의 오랜 친분관계는 쉽게 상상 가능하다. 슈뢰더는 하르츠로 하여금 그의 주도하에 전문가 위원회를 꾸리게 했다. 하르츠를 포함해 각계에서 15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른바 하르츠 위원회(Hartz-Kommission)가 만들어졌다. 단시간의 위원회 활동 결과 13개의 개혁모듈을 담은 하르츠 보고서가 나왔다. 하르츠는 보고서 제목처럼 ‘노동시장의 현대적 서비스를 위한 개혁’을 도모하려 했다. 15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노사정 대표자들로 봐서는 곤란하다. 교수들과 기업경영인들, 2명의 노조 리더, 일부 주정부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하르츠 위원회는 임의로 구성된 전문가들의 위원회였을 뿐이다.

여러 방안이 복합적으로 담긴 하르츠 개혁안의 내용을 중심으로 이후 네 가지의 법안이 만들어져 순차적으로 실행됐다. 그중에는 미니잡(Mini-Job)처럼 사회보험 의무를 의도적으로 제거한 가벼운 일자리를 도입하는 내용도 있었고, 실업수당·실업부조·사회부조로 삼분돼 있던 실업자 지원방식을 이원화해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실업자들의 구직행위를 강도 높게 유도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이른바 취업성공패키지로 명명되는 우리나라의 구직자 지원제도는 사실상 하르츠 개혁안에서 차용한 측면이 크다. 그러한 것들 못지않게 주안점으로 삼았던 것이 또 있다. 바로 고용서비스 체계의 현대화다.

애초에 하르츠가 개혁 논의의 중심에 등장하게 된 계기는 60년대 말 창설돼 독일 지역 곳곳에까지 직업알선과 교육훈련을 중심으로 한 고용서비스를 제공해 온 핵심기관인 연방고용청(BA)의 수장이 정치적 스캔들에 연루됐기 때문이었다. 하르츠는 연방고용청의 굼뜬 관행이 실업자들을 신속하게 고용으로 이끌지 못한 주된 원인 중 하나라는 여론을 형성하고 BA의 대대적인 개혁을 도모했다. 그 결과 연방고용청은 연방고용공단(agency)으로 이름을 바꾸고, 관료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고객 중심적 서비스를 능동적이고 효율적으로 제공하는 쪽으로 변모해 갔다. 요컨대 하르츠 개혁에서는 실업자라는 개념을 없애고 일체의 실업자들을 모두 구직자로 정의하는 등 그들을 옥죄었지만, 그들에게 고용서비스를 전달하는 공급기관 자체도 대대적으로 혁신했다. 이것을 최대 모토로 내세웠다. 하르츠 보고서 13개 모듈의 첫 번째가 바로 이 내용이다.

독일 사회에 논란과 갈등의 씨앗 뿌려


미니잡의 도입도 분명 의미가 없지 않았다. 400유로(현재 450유로)짜리 허드레 일자리를 부업으로 활성화시켜 공식적인 일자리로 만들었던 이 시도는,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는 큰 확대를 보이지 않았지만, 초기 2년여 동안은 수십만명이 급증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니잡은 사실 이미 독일에 존재해 있던, 사회보험이 면제된 일자리들이 탈법적으로 음성화돼 있던 것을 적극적으로 양성화시킨 것이었다. 초기에 미니잡 고용규모가 확대됐던 것은 아마도 기존에 존재해 있던 그러한-우리로 말하면 알바노동 식의-일자리가 자연스럽게 양성화된 결과로 보인다. 다만 이는 우리가 말하는 양질의 시간제 내지 시간선택제 일자리와는 거리가 먼 부업용 일자리에 불과하다.

하르츠가 주도해 만든 개혁안은 독일 복지국가의 오래된 기틀을 개념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었지만 그에 대한 정치적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그것은 100년 정당인 사회민주당에서 그러한 방향의 개혁에 반대하는 전통좌파들이 상당수 떨어져 나와 독자적으로 좌파당(Die Linke)을 만들게 된 주요한 계기가 됐다. 그때까지 지지율 30~40%를 구가하는 국민정당(Volkspartei)이었던 사민당은 그 이후 지지율 20%대의 정당으로 약화됐다. 또한 하르츠 개혁에도 2년간 실업자 감소가 이뤄지지 않자 슈뢰더 수상은 내각을 해산하고 총선을 다시 실시하는 초유의 선택까지 감행했다. 실업자들에 대한 압박이 인권침해 수준에까지 이르자, 동독 민주화 당시 자발적으로 조직됐던 월요시위가 독일 전역 주요 도시에서 조직되기까지 했다. 이렇게 하르츠 개혁은 독일 사회에서 논란과 갈등의 원천이 됐다.

하르츠가 2005년 불미스런 스캔들에 연루돼 현직에서 불명예스럽게 물러나게 된 이후 독일 사람들은 하르츠 개혁을 때론 칭송하고, 때론 비판했다. 하지만 하르츠라는 인물을 다시 찾지는 않았다. 2013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그는 독일의 변방지역인 자를란트(Saarland)에 작은 사무실을 두고 조용히 지내고 있다. 독일에서 이렇게 두문불출하며 지내는 그가 한국에 와서 영웅대접을 받는다면, 한편으론 스스로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민망한 일이다.

독일적인, 지극히 독일적인

한국을 찾은 하르츠가 한국 노동의 현실에 대해 제대로 알고 발언했으면 좋겠지만 그건 아마도 어려울 것 같다. 대신 우리가 먼저 하르츠라는 인물과 그의 개혁에 대해 제대로 짚고 해석했으면 한다. 이때 하르츠가 위원회를 통해 만들어 낸 13개 방안이든 그가 3부작을 통해 구축해 낸 폭스바겐 개혁안이든 모두 독일적 맥락에 뿌리를 두고 자신의 현재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려 한 시도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맥락천착성과 창의성이 있어야 개혁에 힘을 더해 주는 참신함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문제의 핵심을 온전히 짚고 우리의 맥락에 맞는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독일의 맥락에서 이뤄진 개혁의 의미와 결과에 대한 총체적 진단 없이 단지 그러한 개혁의 방향성에만 협소하게 시선을 두면서 우리도 그러한 방향을 답습하자는 식의 논리는 무책임하고 게으르며 음험하기까지 한 발상에 불과하다.

지금 한국은 과도한 복지, 과도한 사회적 시민권의 강조가 경제 활력을 저하했던 10여년 전 독일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맥락에 처해 있다. 당시 독일은 정부와 사회가 400만~500만명의 실업자들을 부양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러하기에 하르츠가 제시했던 처방은 우리의 맥락에 맞게 발본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굳이 하르츠로부터 무언가를 배워야겠다면 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르츠는 분명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강조했지만, 편향된 수량적 유연성에만 집착한 인물이 아니었다. 필자는 우리의 맥락에서 하르츠 개혁의 함의는 노동시장 서비스의 절대적인 강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단 독일 수준으로 고용서비스의 양적인 증대부터 할 필요가 있다. 고용과 복지의 연계를 논하든 아니든 여하튼 이 부분에서 공급과 효율을 증대시키는 것은 절체절명의 과제다. 미니잡 도입도 그것이 탈법고용을 양성화하면서 일자리 질 강화에 기여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전국 곳곳에 인권을 침해당하는 알바노동이 존재한다. 더 이상 그들을 방치하지 말자. 근로감독을 강화하고 노조를 통한 단체교섭을 활성화해 알바노동을 무규제 상태에서 탈출시켜야 한다. 적어도 근로계약서 쓰는 관행부터 의무화하고 보편화해야 하지 않을까.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