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동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실장
(변호사)

지난 12일 우연히 라디오 채널을 돌리다 교육방송을 듣게 됐다. “책 읽어 주는 라디오 이비에스”라는 프로그램이었다. 놀랍게도 소개되는 책이 <전태일 평전>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낭독자였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전순옥 민주당 의원이 오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전 의원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12세에서 16~17세 되는 어린 보조 여공들이었어요. 하루 16시간이 넘도록 일했습니다. 흐릿한 불빛 아래서 일하기 때문에 대부분 안질을 겪었어요. 작업공간도 다락방이라 허리를 펼 수가 없었습니다.” 전 의원은 당시 평화시장 모습을 담담한 어조로 풀어냈다.

뒤이어 요즘 노동현장의 모습도 크게 나아진 것이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꼬박 12시간씩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일하는 노동자들이 적지 않다”며 “40여년 전 전태일 오빠가 돌아가실 때보다 나아지지 않은 오늘의 노동현실은 노동 3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교육방송 프로그램 예를 들었지만 사실 각 언론에서는 전태일 열사 43주기를 맞아 나름의 논평을 내거나 오늘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대부분의 논조는 이렇다. “청년 전태일은 43년 전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면서 산화했다. 그러나 43년이 지난 오늘을 살아가는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이 처한 상황도 별반 나아진 게 없다”는 투다.

이런 글에 물론 동의한다. 정말이지 오늘의 현실은 많이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뭔가 이런 논조의 평가는 식상하다. 아니 매년 11월이 오면 어김없이 열사를 기리지만, 지난해보다 그래도 조금은 살기 나아졌다는 말을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의 모습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나름의 고민은 올해가 아니라 다가올 내년, 후년으로 넘어간다. 내년에도 같은 논조를 반복한다면 정말 문제이지 않겠나. 너무나도 익숙한 반성문에 그치지 않고 “작지만 지난해보다는 나아졌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시작에 관해 생각해 봤다.

전 의원의 말처럼 오늘의 노동현실은 노동 3권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왕이라 했던가. 열사가 가신 이후 매번 호랑이가 떠나자 언제나 여우는 또 다른 모습의 호랑이로 탈바꿈했다. 그 시대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은 언제나 가혹했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이 넘어야 할 상대방은 변한 게 없었다.

40년 넘게 상대방은 같은 모습이었는데 노동자들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해답을 40년 넘게 찾지 못했다는 말도 된다. 상대방이 내놓는 질문이 매번 바뀌었다면 변명도 해봄 직하다. 그러나 똑같은 질문을 풀지 못했다면 근본 원인을 고민해야 한다. 혹시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에게 문제해결 의지나 능력이 없었던 건 아닌지.

노동자 내부에서 나타나는 한계와 풀어 나가는 방법에 관한 연구는 수십 년 동안 수없이 제시되고 있다. 그중 핵심 벼리는 뭘까. 아마도 노동자들 간의 ‘연대’가 아닐까 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노동자 계층 내 분열과 갈등을 오늘의 노동계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 달리 말하면 노동자 간 이해관계를 달리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단일한 목소리를 낼 수 없고 그래서 상대방은 노동자를 분열되고 강력하지 않다고 평가한다는 것이다.

과거 정권의 노동계에 대한 지배·개입과 영향력을 약화하기 위해 산별노조를 기업별노조로 강제한 결과라는 불만도 있다. 틀린 주장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이 같은 불만에 계속 매여 있을 셈인가.

혹시 오늘의 상황에 안주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 계층화된 노동시장에서, 그 상층을 누리고 있지나 않는지 말이다. 조직화된 노동자들로서 조직화되지 않은 이들을 위해 얼마만큼의 관심을 가졌는지, 상대조직에 대해서는 상급단체가 다르거나 하는 일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용자보다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답해 보자.

“저에게 책을 읽어 주는 오빠는 참 따뜻한 분이었어요.”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열사는 누이 전순옥과 비슷한 또래 여성노동자들이 일하는 모습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22세의 청년 전태일은 자신이 처한 현실 또한 고통스러웠지만 누이와 같은 여성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을 차마 넘길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나보다 못한 노동자들을 향한 연대가 아닌가.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실장(변호사) (94kimhy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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