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시 동구에 가면 현대중공업 담벼락을 따라 정형외과들이 줄지어 있어요. 병실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진 환자들이 가득한데, 백이면 백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죠. 그런데 희한한 건 산재환자는 드물다는 거예요. 산재가 나면 하청업체에서 사정을 합니다. 산재신청 하면 회사 망하니 제발 공상으로 처리하자고. 산재환자가 3명 이상 나오면 원청과 계약이 해지되니까 어쩔 수 없이 산재은폐가 되는 거죠."

14일 서울 정동 금속노조 사무실에서 <매일노동뉴스>와 만난 하창민(42)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장의 말이다. 조선소 산재은폐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9월30일 현대중공업 해양사업부 사내하청 노동자 황아무개(47)씨가 공장 탈의실에서 쓰러졌다가 구급차가 아닌 트럭에 실려 병원으로 가는 길에 사망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조선소 하청노동자의 산재은폐 문제가 심각해지자 금속노조가 나섰다. 노조는 이날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조선산업 하청노동자 산재은폐와 중대재해에 대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3아웃 퇴출제'로 하청업체 산재 숨기기 급급



하 지회장은 "현대중공업 하청업체의 산재은폐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설명한다. "산재발생이 3번 이상 나면 하청업체는 원청과 계약이 해지되기 때문에 하청업체 스스로 산재를 숨기기 급급하다는 지적이다. 이른 바 3아웃 퇴출제다. 하 지회장은 "하청노동자가 산재를 신청하려면 해고를 각오해야 한다"며 "지난해 안전장치 없이 배 위에서 페인트칠을 하다가 추락사고를 당한 31살의 하청노동자가 1년간 공상으로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업무복귀 이후에도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어 다시 산재요양 신청을 한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연세대사회발전연구소가 2007년 7천개 제조업체의 산업재해율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근로시간보다 고용형태가 산업재해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원청업체보다 사내하청업체의 산업재해율이 더 낮았다. 연구소는 "상당수 하청업체는 산재발생건수가 일정수준을 넘어설 경우 재계약이 어려워질 것을 우려해 산재 보고건수를 고의로 낮추거나 은폐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는 올해 6개 업체에서 발생한 9건의 산재은폐 건을 고용노동부 울산지청에 고발했다. 노동부는 수사를 벌여 이날 현재까지 산재은폐 혐의가 드러난 3개 업체에 2천만원이 넘는 벌금을 부과했다.



다단계 하도급 '물량팀' 급증… 산재은폐 부추겨



세계적인 조선경기 불황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다단계 하도급 구조도 조선소 하청 산재은폐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최근 조선소마다 이른 바 '물량팀'으로 불리는 노동자들이 급증하고 있다. 물량팀은 건설업으로 치면 십장 같은 제도다. 8~10명의 노동자들이 조선소 사내하청업체로부터 물량을 받아 일했다. 도급단가의 13% 가량을 받아 동료들과 나눠 갖는다. 유보임금(일명 쓰메끼리) 25일치를 깔아 놓는 것도 건설업과 유사하다.

과거 물량팀은 파워공 같이 선박건조 업무 중 고숙련이 필요한 분야나 오작업 보수업무 등 갑작스러운 초단기 돌발작업에 투입되는 돌발팀 같은 형태로 운영됐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중소조선소가 난립하면서 고숙련 업무뿐만 아니라 취부·용접·사상 등 대부분의 공정에서 물량팀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2009년 세계 금융위기 기점으로 물량팀이 단기·일회성 하청에서 상시·고정적 재하청의 양상으로 자리 잡는 상황이다.

금속노조 경남지부에 따르면 통영 중소조선소의 경우 하청업체 1곳당 최소 4개, 최대 10개 가까운 물량팀을 운영하고 있다. 올 초까지 성동조선소·SPP조선소 등에서 하청노동자로 일한 이승호 금속노조 경남지부 미조직비정규부장은 "과거에는 공기를 앞당기려고 특수한 경우에만 물량팀을 썼는데 지금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일상적으로 물량팀을 쓴다"고 설명했다. STX조선을 비롯해 경남지역 중대형 조선소는 하청노동자가 새로 입사할 때 개인사업자등록증을 제출하지 않으면 아예 일을 안 시키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나타나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해양사업팀 중심으로 물량팀이 크게 늘었다가 경기 위축으로 다시 줄어든는 추세다.

문제는 재하청업체인 물량팀은 4대 보험 가입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부장은 "물량팀은 특수고용직 형태여서 4대 보험은커녕 임금이 체불돼도 어디에 하소연할 곳이 없다"고 전했다.

지난달 말 바지선 가스폭발사고가 발생해 2명이 사망한 대불산단 사고 역시 중대형조선소→블록제작 공정 위탁 → 공정별 하도급업체 제작 → 물량팀으로 이어지는 3~7단계 재하도급 관행이 문제로 지적됐다.

금속노조는 "조선소에서 무차별적으로 확산되는 다단계 하도급을 금지하고 산업재해에 대한 원청의 책임을 강화하도록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