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조선산업이 허물어지고 있다.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이른바 '조선 빅3'는 승승장구하는 반면 중소조선소들의 경영상태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조선산업 노동시장도 급변하고 있다. 실직 위기를 맞은 중소조선소 노동자들은 대형조선소 하청노동자로, 하청노동자들은 이른바 ‘물량팀’으로 불리는 2차 하청업체로 분화하고 있다. 노동계는 “조선산업의 고용유발 효과가 자동차산업보다 크다”며 조선산업이 공중분해되기 전에 정부가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매일노동뉴스>가 위기에 놓인 조선산업의 실태와 해법을 세 차례에 걸쳐 모색해 본다.
[게재 순서]
1. 연쇄도산 중소조선소
2. 쫓겨나는 노동자, 퇴로가 없다
3. 산업 구조조정 나침반이 필요하다
“용접기가 부족해 서로 가져가려고 싸운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년째 줄줄이 쌓아 놓고만 있네요.”
강병국 금속노조 신아SB지회 부지회장이 텅 빈 도크 위에 족히 100여대 넘게 줄 맞춰 서 있는 용접기를 가리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노동자의 손길을 잃은 용접기들은 운이 좋으면 다른 공장으로 대여돼 또다시 불꽃을 피울 것이고, 운이 나쁘면 고철로 팔려가 용해로에서 녹아 사라질 것이다. 신아SB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용접기뿐만 아니라 배를 짓기 위해 쓰이던 각종 철판이며 비계 같은 자재들이 원래 주인인 선박을 대신해 도크 위를 점령하고 있다.
탁 트인 통영 앞바다 위에는 신아SB의 유일한 해상크레인이 떠 있다. 강 부지회장은 “하루 대여료만 2천만원을 헤아리는 장비인데 가동을 멈춘 지 오래”라고 입맛을 다셨다. 해상크레인 오른편에는 비루한 조선소와 대조되는 화려한 콘도와 비치호텔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왼편은 올해 2월 파산선고가 떨어진 삼호조선소의 크레인들이 멈춰 서 있다. 삼호조선은 20억원이 없어 90% 공정이 진행된 배를 끝까지 건조하지 못했다. 바다 위에는 용접을 위해 세운 앙상한 철골들로 둘러싸인 선박이 폐가마냥 떠 있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8일 찾은 경남 통영 신아SB 조선소는 2008년 이후 4년간 단 한 척의 배도 수주하지 못했다. 오는 12월 마지막 남은 두 척의 배를 선주에게 인도하면 조선소 문을 닫아야 할 위기에 놓여 있다.
긴 불황터널 속 죽을 고비 맞은 중소조선소
조선업계 불황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세계 1위’ 타이틀을 가진 우리나라 조선업은 2009년 미국발 경제위기로 해운산업이 침체되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경제위기가 유럽으로 옮아가면서 발주가 취소되거나 연기되는 사례가 속출했다. 이미 계약한 선박도 취소되는 사례가 이어졌다.
장기불황으로 선박발주량이 줄어들고 수주단가가 하락하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 지식경제부와 한국조선협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전 세계 선박발주량은 전년 동기 대비 58.9% 감소했다. 전 세계 선박발주량이 줄어들자 국내 조선사들의 1분기 상선 수주잔량 역시 총 6천557만7천GT(총톤수)로 2010년보다 18.7% 감소했다.
발주가 줄면서 선주사들의 가격 후려치기도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클락슨에 따르면 5월 현재 클락슨 선가지수는 135.3으로, 2008년 4월(134) 이후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선가지수가 낮을수록 컨테이너선 등 상선시장이 악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8천만달러를 호가했던 상선 가격이 4천만달러로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이를 두고 조선업계 관계자들은 “요즘 같은 시기에는 수주를 안 하는 게 남는 것”이라고 할 정도다.
덩치가 큰 대형조선소는 해양플랜트 등 사업다각화로 그나마 살 길을 찾았지만 위기대응력이 떨어지는 중소조선사는 줄도산 위기에 처했다. 신아SB 바로 옆에 위치한 삼호조선에서는 이미 청산절차가 진행 중이다. 2000년대 중반까지 500여명이 일하고, 수주잔량 기준 세계 100대 조선소에 오를 정도로 호황을 누렸으나 깊은 불황의 터널을 끝내 넘지 못했다. 삼호조선과 나란히 위치한 21세기조선과 신아SB는 워크아웃 상태다.
중소조선소들이 타격을 받으면서 조선기자재 제조업체들도 하나 둘 문을 닫고 있다. 2010년 영업이익 131억원을 기록했던 선박용 구조물 전문업체인 오리엔탈정공은 빌린 돈을 갚지 못해 3월 초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선박엔진을 제조하는 두산엔진 창원4공장도 잠정적으로 가동을 중단했다.
회생 위해 발버둥 치는 신아SB
중소조선소들이 밀집해 있는 경남 통영도 휘청이고 있다. 파산한 삼호조선 맞은편, 줄지어 선 수백 미터의 식당가는 한두 곳만 빼고 모조리 문을 닫았다. 조선소 뒤편에 몰려 있는 원룸가도 텅텅 비어 가고 있다. 통영고용센터 관계자는 “대형조선소가 몰린 거제는 구인업체들이 줄을 서는데 중소조선소가 대거 들어선 통영은 구직자들로 넘쳐난다”며 “실직한 통영지역 조선 기능인력들을 거제에 있는 삼성·대우 협력사에 취직할 수 있도록 알선하고 있지만 출퇴근 거리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김민재 신아SB지회장은 "원·하청 합쳐 2010년 3천500여명이던 노동자수가 올 들어 1천300여명으로 절반 이상 줄었다"며 "사원 기숙사도 텅텅 비고 주변 상권이 모두 무너졌다"고 전했다. 조선업이 호황이던 시절 통영 신도시 아파트 분양값은 수도권과 비교될 정도로 높았지만 다 지난 이야기다. 그때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산 조선소 노동자들은 요즘 이자를 내지 못해 허덕이고 있다고 김 지회장은 안타까워했다.
신아SB는 통영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파란만장한 길을 걸어왔다. 1948년 ‘최기호조선소’로 출발한 신아SB는 78년 대우그룹에 편입됐다. 89년 조선업계 불황으로 대우조선에 합병됐다가 대우그룹이 신아SB 자산을 매각하면서 450명 중 300명이 퇴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남은 직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100% 종업원지주제 기업으로 재탄생했지만 우리사주조합과 회사의 경영비리 등으로 위기에 봉착했다. 그런 가운데 2006년 SLS중공업이 신아SB를 사들이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그러나 사세가 확장되던 것도 잠시, 이국철 SLS그룹 회장이 스스로 정권 실세에 로비했다고 폭로하면서 2009년 워크아웃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회장이 검찰수사를 받는 동안 불어닥친 조선산업 위기는 신아SB를 회생 불가능할 정도의 경영위기로 몰아넣었다. 2008년 당시 수주받은 100척의 선박 가운데 70척의 계약이 취소됐다. 남은 30척의 물량으로 4년을 버텼는데, 이제 마지막 배 두 척을 건조하고 있다.
파산 기로에 선 신아SB에 지난달 실낱같은 희망이 날아들었다. 유럽의 선주와 6척의 건조의향서를 체결한 것이다. 신아SB는 이달 4일 본계약을 체결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부가 발목을 잡았다. 선박은 건조기간이 길기 때문에 금융기관이 선수금 환급보증(RG)을 해야 수주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신아SB 지분의 65%를 갖고 있는 무역보험공사가 ‘적자 수주’를 이유로 RG를 발행하지 않고 있다. 신아SB는 이달 말까지 RG 발행이 되지 않으면 사실상 회생이 불가능한 실정이다.
김 지회장은 “6천만달러짜리 선박을 3천200만달러에 수주해 반토막이 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채권단은 1척당 100억원의 적자가 우려된다고 하지만 회사는 실제 원가의 97% 수준에서 건조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계약취소된 선박의 자재를 활용하면 저가수주로 피해 받는 부분을 충분히 상쇄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 지회장은 “6척으로 회사가 정상화될 것이라고 보지는 않지만 6척이 없으면 그 다음도 없다”며 “우리가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라고 말했다.
“채권회수에 골몰하는 산업 구조조정 정책 중단해야”
문제는 정부의 태도다. 정부는 2008년 조선산업 구조조정 정책을 발표한 이후 중소조선소의 위기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이상우 금속노조 정책국장은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중소조선소의 연쇄도산은 노동자와 가족의 밥줄이 달린 심각한 문제인데도 정부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다”며 “조선산업은 자동차보다 고용유발 효과가 큰데도 일자리 창출을 외치는 정부가 이를 수수방관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 지회장도 “노동자들이 나서 RG 발행을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고 있지만 무역보험공사 등 채권단은 채권회수에만 관심을 보일 뿐 회사의 명운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비판했다. 업계 전문가들은 “조선산업에서 과잉·중복 투자의 거품은 걷어내더라도, 회생가능성이 있는 중소조선사에는 과감한 금융지원 등 정책적인 배려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앞으로 3년 뒤인 2015년은 불황에 빠져 있는 세계 조선산업의 시황이 개선될 것으로 점쳐지는 시기다. 정부가 때늦은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 결단이 필요한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