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조선산업이 허물어지고 있다.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이른바 '조선 빅3'는 승승장구하는 반면 중소조선소들의 경영상태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조선산업 노동시장도 급변하고 있다. 실직 위기를 맞은 중소조선소 노동자들은 대형조선소 하청노동자로, 하청노동자들은 이른바 ‘물량팀’으로 불리는 2차 하청업체로 분화하고 있다. 노동계는 “조선산업의 고용유발 효과가 자동차산업보다 크다”며 조선산업이 공중분해되기 전에 정부가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매일노동뉴스>가 위기에 놓인 조선산업의 실태와 해법을 세 차례에 걸쳐 모색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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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 순서]

1. 연쇄도산 중소조선소
2. 쫓겨나는 노동자, 퇴로가 없다
3. 산업 구조조정 나침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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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수록 억울하고 분통해서 잘 수가 잠이 안 와요."

30년간 조선소 밥을 먹은 황영식(51)씨는 요즘 뜬눈으로 밤을 샌다. 황씨는 지난해 10월부터 경남 통영의 SPP조선소에서 사상작업(용접부위를 다듬는 작업)에 투입됐다. 올해 4월2일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출근한 황씨는 깜짝 놀랐다. 그가 다니던 회사가 사라지고 다른 회사 소속 직원들이 그가 하던 일을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씨는 SPP조선소 사내하청업체 HDM기업 소속 물량팀 팀장이다. 조선소의 물량팀은 건설업으로 치면 십장 같은 제도다. 황씨는 동료 8~10명과 함께 조선소 사내하청업체로부터 물량을 받아 일했다. 도급단가의 13% 가량을 받아 동료들과 나눠 갖는다. 유보임금(일명 쓰메끼리) 25일치를 깔아 놓는 것도 건설업과 유사하다.

황씨는 올해 2월과 3월에 받지 못한 임금을 달라고 SPP조선소를 찾아갔지만 원청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고용노동부 통영지청에도 갔지만 소용없었다. 개인사업주로 등록돼 있는 황씨는 동료들의 임금을 지급해야 할 '사장'이었던 것이다.

"조선소 하청업체들은 원청과 도급계약할 때 공탁금을 내도록 돼 있어요. 보통 2억원 정도 합니다. 하청업체가 망하면 공탁금에서 밀린 임금이 나오는데, 체불임금을 100% 다 받는 것은 꿈도 못 꾸죠. 한 70% 정도 받아요. 그런데 우리가 다닌 하청업체는 공탁금도 1억원 정도밖에 안 내고 있더라고요. 그마저도 7천100만원을 가불해 썼더군요. 현재 체불임금 2천145만원이 남아 있어요. 얼마 전 1천만원 정도 빚을 냈습니다. 나만 믿고 따라온 팀원들마저 굶길 수는 없으니까요."

이승호 금속노조 경남지부 미조직비정규직부장은 “올 들어 황씨처럼 하청업체 도산으로 임금을 떼였다고 찾아오는 물량팀(재하청) 노동자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며 “이들은 체불과 실직으로 고통 받고 있지만 법적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체당금이나 실업급여 같은 최소한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하청노동자

조선경기가 악화일로를 걸으면서 노동자들이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다. 18일 한국조선협회에 따르면 2000년대 들어 수직상승하던 조선인력이 2010년 처음으로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협회가 발간한 ‘2011 조선자료집’을 보면 현대중공업 등 9개 대형조선소와 SPP조선 등 7개 중형 조선소에서 일하는 원·하청 노동자는 2000년 7만9천여명에서 2009년 16만2천여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가 지난해 15만3천여명으로 9천여명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노동자가 감소한 것은 외환위기 이후 11년 만의 일이다.

인력 감소는 비정규직에게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협회는 “지난 1년 새 조선산업을 떠난 인력의 83.7%(7천515명)가 사내하청 노동자였다”고 밝혔다. 조선산업 구조조정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된 것이다. 하청노동자들이 줄면서 업체별로 적게는 100%, 많게는 700%가 넘는 비정규직 비율이 2010년부터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통영에 밀집해 있는 중소조선소들의 경우 하청업체들이 사무실로 쓰던 컨테이너 수백여개가 텅 빈 채 방치돼 있다. 2008년부터 단 한 척의 배도 수주하지 못한 신아SB는 지난해부터 하청업체에 아웃소싱했던 물량을 거의 대부분 회수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통영의 중소조선소 정규직들이 조금이라도 높은 임금을 위해 거제나 울산의 대형 조선소의 하청업체에 취직했다는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노동권 사각지대 속 사각지대 '물량팀'

그나마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사정이 낫다. 4대 보험에 가입해 있고 업체가 망하면 국가가 대신 체불임금을 주는 체당금 제도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사가 폐업하거나 정리해고로 실직하더라도 재취업할 때까지 부담을 덜 수 있는 완충장치가 미흡하나마 존재한다. 그러나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재하청 노동자는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조차 없다.

사실 물량팀의 역사는 깊다. 과거 물량팀은 파워공 같이 선박건조 업무 중 고숙련이 필요한 분야나 오작업 보수업무 등 갑작스러운 초단기 돌발작업에 투입되는 돌관팀 같은 형태로 운영됐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중소조선소가 난립하면서 고숙련 업무뿐만 아니라 취부·용접·사상 등 대부분의 공정에서 물량팀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물량팀이 단기·일회성 하청에서 상시·고정적 재하청의 양상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금속노조 경남지부에 따르면 통영 중소조선소의 경우 하청업체 1곳당 최소 4개, 최대 10개 가까운 물량팀을 운영하고 있다. 황씨가 일했던 HDM기업의 경우 본공(하청업체 정규직)은 20명인데, 물량팀은 85명으로 4배에 육박했다.

박종식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은 “물량팀 사내하청 노동자는 기본적으로 개인사업자 신분이어서 최소한의 노동기본권에서도 배제된다”며 “조선업종 건조와 발주물량 변동에 따라 고용불안이 상시화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조선산업 구조변화가 불가피한 시점에서 조선 노동력이 감소하기 시작했는데도 노사 양측은 물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모두 일자리 대책에 관한 논의가 거의 없다"며 우려를 표하고 있다. 지역고용학회회는 "조선업 노동시장에서 대규모 실업이 발생할 경우 자칫하면 해당 지역의 경제적 기반이 뒤흔들리는 결과가 초래되고 높은 사회경제적 비용을 유발할 수 있다"며 "정부 차원에서 일자리 유입과 유출에 대한 적절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자리 이동 프로그램을 강화하거나 공공부문 일자리 프로그램 확대 같은 조선산업 노동시장정책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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