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 꽃망울 터지듯 와글와글 피어나던 아이들 웃음꽃이 더는 광장에 없다. 솟구치는 분수를 그냥 지나칠 리 없는 아이들 뒤꽁무니를 쫓다 그만 포기해 버린 엄마 아빠의 걱정 섞인 외침이 들리지 않는다. 4월이면 시간표 따라 어김없던 일인데, 기약 없는 일이 됐다. 언젠가 잘게 부서진 물방울이 낮은 햇볕 머금어 무지개가 뜨면, 갖은 색깔 옷차림 아이들이 그 아
서울 강남역 사거리 높다란 빌딩 샛길. 스마트폰 들여다보느라 고개 숙인 사람들이 앞도 안 보고 복잡한 길을 잘도 걷는다. 저마다 희고 검은 마스크를 쓴 채 답답한 숨을 잘도 견딘다. 길가 온 데 나붙은 현수막이며 대형 전광판에 코로나19 감염증 예방수칙이 빼곡했다. 난리 통에도 어김없는 봄볕에 꽃 틔운 나무 아래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마스크
계절은 움직임을 멈출 줄 몰라 훌쩍 봄인데, 그건 집 밖의 일이었다. 뜻밖의 손님처럼 불쑥 찾아든 봄기운이 반갑고도 낯설다. 일상을 곱씹는 시절이다.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뒹구는 뽀얀 얼굴 아이들 턱선이 둥글어 간다. 일터에 가야만 했던 엄마 아빠가 뾰족한 수를 찾느라 속이 타들어 간다. 문득 이것은 모두의 일이었으니 전화기 들어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긴급재난문자 통해 날아든 코로나19 확진자의 동선은 밥벌이 고된 길을 전한다. 여전히 붐비는 출근길 지하철을 타고 창문도 없는 일터에 간다. 다닥다닥 붙어 ‘닭장’이라 불리는 곳에 앉아 종일 말을 한다. 큰돈 드는 각종 질환과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는 안심 플랜을 상담한다. 말하기를, 일하기를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바이러스는
생선은 대가리가 제일 맛있다고, 한겨울 맨손으로 다니면서도 손 시리지 않다고 아빠가 자주 말했는데 그게 다 거짓말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종종 팔씨름하느라 잡아 본 아빠 손은 온통 거칠었다. 굳은살이 두꺼웠고, 여기저기가 쩍쩍 갈라졌다. 시멘트 독 때문이라고 엄마가 말해 줬다. 장갑 좀 끼라는 엄마 잔소리가 부족했던지, 아빠가 장갑 낀 걸 지금껏 본 적이
지상 74미터 높이였는데, 그는 어디 히말라야 고산에서나 입을 빨간색 커다란 패딩점퍼 차림이었다. 겨울이었고, 그곳엔 전기가 들지 않아 온열 매트 따위에 등을 지질 형편이 못 됐다. 늙은 해고자는 눈 덮인 산꼭대기처럼 하얗던 건물 꼭대기에 천막 치고 그저 오래 버티는 것으로 복직 싸움을 이어 갔다. 조난신호였다. 노조할 권리가 그곳 병원에서 자주 위태로웠다. 누군가에겐 목숨을 걸 일이었다. 마음 졸인 사람들이 그 아랫자리에서 곡기 끊는 것으로, 멀리서 걸어오는 것으로, 집회를 이어 가는 것으로 응답했다. 일단락됐다. 내려오는 사다리
큰 희생을 치른 싸움 앞에 내세운 요구라는 게 대개 약속과 법을 지키라거나 더는 죽이지 말라거나 하는 것이었다. 이 시대 상식으로 통하는 뻔한 말을 하느라 사람들은 일터에서 잘리고, 길거리를 떠돌다 몸을 또 마음을 다치고, 종종 죽었다. 저기 10년의 싸움 끝 복직을 앞뒀던 쌍용차 노동자들이 다시 청와대 앞을 찾아가 굳은 표정으로 한 말이 또 약속 이행이었
아이가 한 번씩 뻔한 거짓말을 한다. 곧장 타이르기는 피하고 싶었으니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시간이다. 그러니까 옛날에 말이야 양치기 소녀가 있었는데…. 두어 번은 잘 듣더니 금세 지겨운 모양이다. 벌거벗은 임금님과 피노키오 이야기로 돌려막았다. 거짓말은 나쁘다는 걸 알려 주는 맞춤형 이야기들이다. 얼마간 효과가 있었다. 일하며 찍은 사진을 모니터에 띄워 놓고
남편 잃은 사람 곁에 아들 먼저 보낸 엄마가 섰다. 가다 서다 자꾸만 왈칵 울던 이를 뒤따른 건 어디 해고 생활 길었던 사람과 비정규 노동자와 종교인이었다. 또 아들을, 동생을 먼저 보낸 유가족이었다. 무언가를 잃어 본 사람들이 슬퍼 꺽꺽 우는 사람 손을 잡는다. 북소리 맞춰 엎어지거나 팻말을 들었다. 인적 뜸한 도로를 천천히 행진했다. 오체투지, 별말도 없이 꾸역꾸역 일어나선 입김을 길게 뿜었다. 경마장, 이곳에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상복 입은 사람이 마이크 잡고 말했다. 일하다 고통받지 않아야 하고, 일하다 죽지 않아야 한다는
겨울, 비가 잦다. 선전물과 조형물과 또 헛상여를 이고 지느라 손이 없는 사람들이 우산 대신 우비를 껴입고 행진에 나선다. 장지도 아닌 곳에 멈춰 서 줄줄이 곡소리 나는 사연을 풀어냈다. 아픈 말들이 길고도 험했다. 말없이 상여 앞자리 앉아 비를 맞던 아빠는 종종 눈을 질끈 감았다. 우비에 고인 빗물이 흘러 눈에 들었다. 꽃상여는 젖지 않았다. 말과 함께 한 영정 사진에는 살려 내라, 날 선 말이 붙었다. 상여 앞에서 헛되고도 헛된 말이었다. 길 따라 선 사람들 목구멍에서 끓는 말이었다. 그 죽음을 헛되이 않겠다며 가족이, 또 노동
새 도로가 뚫려 서울에서 마석 모란공원 가는 길이 빠르고 편해졌다. 그 길 따라 대규모 신축 아파트단지가 어느새 삐죽 높았다. 광역급행철도 줄기 따라 그랬다. 새해맞이 인파로 붐볐을 강릉·속초 앞바다 가는 것도 이제는 별일 아니라고 옆자리 동료가 말했다. 많은 것이 변했다. 새해라고 노동조합 사람들이 모란공원을 찾아가 그 자리 우뚝 선 채로 변함없는 전태일
언젠가 내비게이션에 평택시 칠괴동으로 뜨던 곳은 이제 동삭로라고 나온다. 거기 자동차공장 인근에는 신축 아파트 단지가 어느새 빼곡하다. 한때 새롭게 꾸며 말끔했던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사무실은 여기저기 낡아 볼품을 잃었다. 많은 게 달라졌다. 또 여전한 게 거기 있었다. ‘차차’라고 이름 붙인 공간에 개가 한 마리 산다. 샛별이다. 내년 1월이면 네 살, 혈기 왕성한 골든레트리버 암컷이다. 도둑을 보고도 꼬리 친다는 아인데, 낯선 사람을 보고는 멍멍 두어 번 짖을 줄을 안다. 거기 들어온 지부 사람에게 짖었다가 구박을 먹었다. 금
백억, 그거 얼마 안 되더란다. 가늠하기도 어려운 돈이었는데, 택배 상자며 감귤 상자 몇 개면 담기에 충분했다. 한 다발이 오백이었으니, 박카스 상자 그 작은 것엔 1억이 딱 든다고 했다.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건지 보고 싶었다며 백억원어치의 모형 돈을 뽑았다. 보기에 평소 만들던 차 트렁크에 싣고도 한참 남을 만큼이었다. 차떼기며 사과박스는 옛날 말. 온갖 검은돈은 한결 가볍게 오갈 것이라고 모형 돈 백억원어치를 길에 쌓던 이가 말했다. 백억, 그러나 눈앞에 닥친 그 돈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숫자였다. 억 소리 나는 그놈의 돈
거기 액자에 김용균 아닌 누가 들었대도 이상할 것 없는 세상의 광장에서 운이 좋아 죽지 않은 그의 동료가 유행 지난 롱패딩을 입고 서성인다. 비질하고 꺼진 촛불에 불 놓아 살린다. 꺼지지 않는 향에서 연기 오르는 동안 회색빛 재가 툭툭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쌓여 간다. 어느새 수북했다. 철을 모르고 싱싱한 국화가 또한 그 앞에 쌓였다. 뒷벽에 빼곡하게 붙은
사진 속엔 조끼 차림 사람들이 웃고 울고 춤춘다. 길바닥에 엎어져 행진하고, 경찰에 둘러싸인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또 촛불을 들었다. 이렇게 사진으로 보니 새롭다고 했다. 여기 나도 있다면서 가리킨다. 흰옷 입고 바닥에 붙어 얼굴을 확인할 길 없었는데, 뒷모습이라고 제 모습을 어찌 모를까. 그놈의 냄새가 지독했다고 사진 살피던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는
영정 사진은 어느덧 빛바래고 울었다. 표지석에 매어 둔 비정규직 철폐 머리띠도 물 빠져 낡아 갔다. 붉고 노란 조화가 다만 사철 변함없이 무덤가에 피었다. 남은 사람들은 새로운 ‘몸자보’를 만들어 입고 새로운 것 없는 싸움에 나섰다. 광장에 새로운 천막을 쳤고, 새로운 다짐을 나눴다. 그 앞 태극기 휘날리며 오가는 노인의 악다구니를 걱정하며 시린 손을 비빈다. 더 이상 죽이지 마라는 낡은 구호를 오늘 다시 꺼냈다. 입사한 지 1개월이 되지 않은 스물아홉 청년이 종이 만들던 기계에 빨려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붉은 단풍잎 흙길에
언젠가 대학교 학생회관 복도에 페인트와 시너 냄새가 진동했다. 낡은 소파 양쪽으로 청테이프 착착 붙어 흰 천이 팽팽하게 걸렸다. 붓과 페인트 통 든 사람이 일필휘지, 빈자리를 거침없이 채워 갔다. 넘쳐흐르지도, 부족해 흐릿하지도 않아 선이 매끈했다. 장인의 솜씨였다. ○○체로도 불렸다. 한때의 구호가 생생하게 거기 담겼다. 늦은 밤, 채 마르지 않은 현수막
용균이 엄마는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서울 광화문역에서 정부서울청사 앞까지 걸으면서도 자꾸 들여다본다. 위험의 외주화 중단과 중대재해기업 처벌을 촉구하던 집회 맨 앞자리에 앉아서도 용균이 엄마는 틈틈이 스마트폰 들어 살핀다. 거기 할 말이 많이 들었다. 새로운 것도 없는 말이었다. 무대에 올라 용균이 엄마는 아들 보낸 지 1년이 가까운 지금, 달라
저기 앉은 문정현 신부의 머리칼과 수염은 온통 희고, 피부는 검고 또 붉었다. 희고 검고 붉은 것이 품에 안은 판화의 빛깔을 닮았다. 깊은 주름과 바탕의 거친 선이 또한 그랬다. 판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적 필요에서 불경과 성서의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삽화에서 비롯됐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 땅에선 1980년대, 판화가 노동자·시민의 이야
쪼르르 담벼락에 기대어 앉은 저들은 닮았다. 피를 나눈 가족은 아니다. 한솥밥 여러 끼를 먹었으니 식구라고 할 만하다. 요즈음 가족보다 자주 보는 사이니 친한 친구다. 길에 나서 같이 밥을 굶으니 동지다. 언젠가 나란히 앉아 보자기 두른 채 머리를 깎았는데 스타일이 한가지였다. 길이며 빛깔과 구부러진 모양도 갖가지였던 머리칼은 그날 아스팔트 바닥에 뒹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