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저기 앉은 문정현 신부의 머리칼과 수염은 온통 희고, 피부는 검고 또 붉었다. 희고 검고 붉은 것이 품에 안은 판화의 빛깔을 닮았다. 깊은 주름과 바탕의 거친 선이 또한 그랬다. 판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적 필요에서 불경과 성서의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삽화에서 비롯됐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 땅에선 1980년대, 판화가 노동자·시민의 이야기를 품었다. 민중미술이라고 불렸다. 노동하는 이의 고단한 삶이, 꿈꾸는 대동세상이 나무판을 매개 삼아 종이 위에 펼쳐졌다. 용산참사 현장에서, 미군기지 싸움하던 평택 대추리에서, 제주 강정마을에서 또 어디 숱한 노동자 싸움터에서 판화는 사람들을 위로했고, 때로 선동했다. 판화가 이윤엽의 궤적이다. 문 신부의 순례길이기도 했다. 판화는 오늘 전투기 나는 배경에 주먹 쥔 제주 돌하르방을 새겨 평화의 섬 제주를 꿈꾼다. 제주 제2 공항 고시 강행 중단을 요구하는 청와대 앞 기자회견 자리에서 문 신부는 판화를 품고 앉았다. 평화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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