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희생을 치른 싸움 앞에 내세운 요구라는 게 대개 약속과 법을 지키라거나 더는 죽이지 말라거나 하는 것이었다. 이 시대 상식으로 통하는 뻔한 말을 하느라 사람들은 일터에서 잘리고, 길거리를 떠돌다 몸을 또 마음을 다치고, 종종 죽었다. 저기 10년의 싸움 끝 복직을 앞뒀던 쌍용차 노동자들이 다시 청와대 앞을 찾아가 굳은 표정으로 한 말이 또 약속 이행이었
아이가 한 번씩 뻔한 거짓말을 한다. 곧장 타이르기는 피하고 싶었으니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시간이다. 그러니까 옛날에 말이야 양치기 소녀가 있었는데…. 두어 번은 잘 듣더니 금세 지겨운 모양이다. 벌거벗은 임금님과 피노키오 이야기로 돌려막았다. 거짓말은 나쁘다는 걸 알려 주는 맞춤형 이야기들이다. 얼마간 효과가 있었다. 일하며 찍은 사진을 모니터에 띄워 놓고
남편 잃은 사람 곁에 아들 먼저 보낸 엄마가 섰다. 가다 서다 자꾸만 왈칵 울던 이를 뒤따른 건 어디 해고 생활 길었던 사람과 비정규 노동자와 종교인이었다. 또 아들을, 동생을 먼저 보낸 유가족이었다. 무언가를 잃어 본 사람들이 슬퍼 꺽꺽 우는 사람 손을 잡는다. 북소리 맞춰 엎어지거나 팻말을 들었다. 인적 뜸한 도로를 천천히 행진했다. 오체투지, 별말도 없이 꾸역꾸역 일어나선 입김을 길게 뿜었다. 경마장, 이곳에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상복 입은 사람이 마이크 잡고 말했다. 일하다 고통받지 않아야 하고, 일하다 죽지 않아야 한다는
겨울, 비가 잦다. 선전물과 조형물과 또 헛상여를 이고 지느라 손이 없는 사람들이 우산 대신 우비를 껴입고 행진에 나선다. 장지도 아닌 곳에 멈춰 서 줄줄이 곡소리 나는 사연을 풀어냈다. 아픈 말들이 길고도 험했다. 말없이 상여 앞자리 앉아 비를 맞던 아빠는 종종 눈을 질끈 감았다. 우비에 고인 빗물이 흘러 눈에 들었다. 꽃상여는 젖지 않았다. 말과 함께 한 영정 사진에는 살려 내라, 날 선 말이 붙었다. 상여 앞에서 헛되고도 헛된 말이었다. 길 따라 선 사람들 목구멍에서 끓는 말이었다. 그 죽음을 헛되이 않겠다며 가족이, 또 노동
새 도로가 뚫려 서울에서 마석 모란공원 가는 길이 빠르고 편해졌다. 그 길 따라 대규모 신축 아파트단지가 어느새 삐죽 높았다. 광역급행철도 줄기 따라 그랬다. 새해맞이 인파로 붐볐을 강릉·속초 앞바다 가는 것도 이제는 별일 아니라고 옆자리 동료가 말했다. 많은 것이 변했다. 새해라고 노동조합 사람들이 모란공원을 찾아가 그 자리 우뚝 선 채로 변함없는 전태일
언젠가 내비게이션에 평택시 칠괴동으로 뜨던 곳은 이제 동삭로라고 나온다. 거기 자동차공장 인근에는 신축 아파트 단지가 어느새 빼곡하다. 한때 새롭게 꾸며 말끔했던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사무실은 여기저기 낡아 볼품을 잃었다. 많은 게 달라졌다. 또 여전한 게 거기 있었다. ‘차차’라고 이름 붙인 공간에 개가 한 마리 산다. 샛별이다. 내년 1월이면 네 살, 혈기 왕성한 골든레트리버 암컷이다. 도둑을 보고도 꼬리 친다는 아인데, 낯선 사람을 보고는 멍멍 두어 번 짖을 줄을 안다. 거기 들어온 지부 사람에게 짖었다가 구박을 먹었다. 금
백억, 그거 얼마 안 되더란다. 가늠하기도 어려운 돈이었는데, 택배 상자며 감귤 상자 몇 개면 담기에 충분했다. 한 다발이 오백이었으니, 박카스 상자 그 작은 것엔 1억이 딱 든다고 했다.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건지 보고 싶었다며 백억원어치의 모형 돈을 뽑았다. 보기에 평소 만들던 차 트렁크에 싣고도 한참 남을 만큼이었다. 차떼기며 사과박스는 옛날 말. 온갖 검은돈은 한결 가볍게 오갈 것이라고 모형 돈 백억원어치를 길에 쌓던 이가 말했다. 백억, 그러나 눈앞에 닥친 그 돈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숫자였다. 억 소리 나는 그놈의 돈
민주노총 소속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들이 대법원 판결 취지에 따라 한국도로공사가 직접고용할 것을 촉구하며 9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오체투지 행진을 하고 있다. 이들은 10일까지 이틀간 광화문광장 주변을 돌며 행진을 이어 간다. 도로공사와 민주일반연맹은 11일 서울에서 교섭을 한다.
거기 액자에 김용균 아닌 누가 들었대도 이상할 것 없는 세상의 광장에서 운이 좋아 죽지 않은 그의 동료가 유행 지난 롱패딩을 입고 서성인다. 비질하고 꺼진 촛불에 불 놓아 살린다. 꺼지지 않는 향에서 연기 오르는 동안 회색빛 재가 툭툭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쌓여 간다. 어느새 수북했다. 철을 모르고 싱싱한 국화가 또한 그 앞에 쌓였다. 뒷벽에 빼곡하게 붙은
김장철이다. 배추 절이고 물 빼고 무 썰고 고춧가루 풀고 섞고 바르고 담느라 한겨울 한바탕 소란 통이 벌어진다. 저기 마트에 맛 좋다는 갖은 포장김치가 가득한데도, 사람들은 애써 고된 일 하기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재래시장이 오랜만에 활기차다. 주말 유독 막히던 고속도로 위에 뒤축이 한 뼘씩은 내려앉은 차들이 설설 기어간다. 꼬릿한 김치 냄새가 풍기
공공운수노조 전국우편지부 재택집배원지회 조합원 80여명과 연대단체 회원들이 27일 오후 서울 광화문우체국 앞에서 열린 정규직화 쟁취 총력투쟁 결의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들은 우정사업본부가 대법원 판결에 따라 정규집배인력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했다. 대법원은 올해 4월 우정사업본부와 도급계약을 맺고 일하는 특수고용직 재택위탁집배원이 개인사업자가 아니라
사진 속엔 조끼 차림 사람들이 웃고 울고 춤춘다. 길바닥에 엎어져 행진하고, 경찰에 둘러싸인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또 촛불을 들었다. 이렇게 사진으로 보니 새롭다고 했다. 여기 나도 있다면서 가리킨다. 흰옷 입고 바닥에 붙어 얼굴을 확인할 길 없었는데, 뒷모습이라고 제 모습을 어찌 모를까. 그놈의 냄새가 지독했다고 사진 살피던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는
영정 사진은 어느덧 빛바래고 울었다. 표지석에 매어 둔 비정규직 철폐 머리띠도 물 빠져 낡아 갔다. 붉고 노란 조화가 다만 사철 변함없이 무덤가에 피었다. 남은 사람들은 새로운 ‘몸자보’를 만들어 입고 새로운 것 없는 싸움에 나섰다. 광장에 새로운 천막을 쳤고, 새로운 다짐을 나눴다. 그 앞 태극기 휘날리며 오가는 노인의 악다구니를 걱정하며 시린 손을 비빈다. 더 이상 죽이지 마라는 낡은 구호를 오늘 다시 꺼냈다. 입사한 지 1개월이 되지 않은 스물아홉 청년이 종이 만들던 기계에 빨려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붉은 단풍잎 흙길에
일방통행 길을 거슬러 간다. 엎어져 코 깨지기를 반복하며 사람들이 느릿느릿 행진한다. 거기 차 다니는 도로였지만 본래 사람 다니는 길이다. 차가운 도로에 엎어지기를 계속하느라 뜨거워진 이마에 물 맺혀 흐른다. 지켜보며 뒤따르던 동료 눈가에도 물 맺혀 깊은 주름 타고 번진다. 시름 깊은데 웃음 잦다. 쉬는 시간이면 도롯가에 꼭 붙어 앉아 손길 눈길 나누다 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천주교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소속 종교인과 민주노총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들이 5일 대법원 판결에 따른 한국도로공사 직접고용을 촉구하는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이들은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출발해 명동성당과 조계사를 거쳐 청와대 앞까지 행진했다. 김천 도로공사 점거농성은
언젠가 대학교 학생회관 복도에 페인트와 시너 냄새가 진동했다. 낡은 소파 양쪽으로 청테이프 착착 붙어 흰 천이 팽팽하게 걸렸다. 붓과 페인트 통 든 사람이 일필휘지, 빈자리를 거침없이 채워 갔다. 넘쳐흐르지도, 부족해 흐릿하지도 않아 선이 매끈했다. 장인의 솜씨였다. ○○체로도 불렸다. 한때의 구호가 생생하게 거기 담겼다. 늦은 밤, 채 마르지 않은 현수막
용균이 엄마는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서울 광화문역에서 정부서울청사 앞까지 걸으면서도 자꾸 들여다본다. 위험의 외주화 중단과 중대재해기업 처벌을 촉구하던 집회 맨 앞자리에 앉아서도 용균이 엄마는 틈틈이 스마트폰 들어 살핀다. 거기 할 말이 많이 들었다. 새로운 것도 없는 말이었다. 무대에 올라 용균이 엄마는 아들 보낸 지 1년이 가까운 지금, 달라
저기 앉은 문정현 신부의 머리칼과 수염은 온통 희고, 피부는 검고 또 붉었다. 희고 검고 붉은 것이 품에 안은 판화의 빛깔을 닮았다. 깊은 주름과 바탕의 거친 선이 또한 그랬다. 판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적 필요에서 불경과 성서의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삽화에서 비롯됐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 땅에선 1980년대, 판화가 노동자·시민의 이야
한때 크고 무거운 카메라와 렌즈는 기자증을 대신하곤 했다. 공연장이나 공사 현장에서 형광 스태프 조끼가 그러했듯 말이다. 좋은 촬영 조건을 찾아 무대에 거리낌 없이 오른 건 대개 큰 카메라였다. 스마트폰은 눈치를 살펴 주저했다. 오랜 관습이었으나 곧 뒤집어질 구습이기도 했다. 누구나가 찍는다. 저마다의 언로를 가진 사람들은 이제 대형 집회 무대에 거리낌 없
쪼르르 담벼락에 기대어 앉은 저들은 닮았다. 피를 나눈 가족은 아니다. 한솥밥 여러 끼를 먹었으니 식구라고 할 만하다. 요즈음 가족보다 자주 보는 사이니 친한 친구다. 길에 나서 같이 밥을 굶으니 동지다. 언젠가 나란히 앉아 보자기 두른 채 머리를 깎았는데 스타일이 한가지였다. 길이며 빛깔과 구부러진 모양도 갖가지였던 머리칼은 그날 아스팔트 바닥에 뒹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