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일 밤이었다. 김원기 국회의장 주선으로 여당과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국회의장실에서 만났다. 본회의가 끝난 뒤였다. 김한길 여당 원내대표는 4월 국회 초반에 비정규 법안을 먼저 처리하자고 제안했다. 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도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 3월 한달은 아무 일도 없는 듯 지나갔다.

임시국회가 예정된 4월이 됐다. 민주노동당은 법안 저지 논리를 개발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다. 그 중 하나가 노동부 용역보고서 파문이었다.

노동부는 한국노동연구원에 용역발주를 준 연구보고서를 3월2일 노동부 홈페이지에 은근슬쩍 게시했다. 보고서 작성 사실과 홈페이지 게시 사실은 노동부 장관도, 여당도, 민주노동당도 몰랐다.

단병호 의원실은 3월초 노동부로부터 외주용역 자료 리스트를 받았다가 이 자료를 발견했다. 즉시 노동부에게 용역보고서를 요청했다. 노동부는 보고서를 단 의원실에 보냈다.

이 보고서는 정부 원안대로 입법, 시행될 경우 고용효과와 임금효과를 분석한 내용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정부 원안이 시행되면 전체 임금 근로자의 1.05% 정도의 고용량이 감소하고, 전체 임금근로자의 0.12%가 정규직으로 전환된다고 분석했다. 또 차별이 100% 해소된다고 가정하면 법 적용대상 비정규직의 임금이 6~6.9%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기업 전체로 봤을 때 연간 2조~2조7천억원의 임금비용이 추가된다는 것이었다. 정규 상용직을 기준으로 하면 비정규직의 임금이 22.2~24.2% 인상되며, 이는 전체 기업들이 15조5천억원~19조1천억원의 추가 임금비용을 지불하게 되는 것이라고 기술했다.


노동부 보고서 파동

단 의원은 약 한달 동안 비정규센터와 공동으로 보고서 분석을 끝내고 3월30일 기자회견을 열어 공개했다. 그리고 이 보고서를 근거로 여당이 차별시정 효과도 없고 고용불안만 야기하는 ‘악법’을 입법하려 든다고 성토했다.

단 의원은 “보고서 분석 결과 사용자가 선의를 최대한 베풀어 2년이 지난 뒤 계속 고용을 했다고 하더라도, 정규직 전환자는 11만5천여명에 불과하며, 이는 840만명 비정규직 노동자의 1.3%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또 “경총 자료를 추산할 경우 15만3천명의 계약해지가 예상된다”며 정규직 전환보다 계약 해지가 많아 고용불안이 심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법안이 시행되면 기간제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은 미미하고, 대다수 기간제 노동자들은 2년마다 ‘자동해고’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잠시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논란은 별로 확산되지도 않았고, 오래가지도 않았다. 보고서 내용도 부정확한 데다, 결정적으로 이 보고서가 민주노동당 주장대로 차별시정 정도를 보여주는 보고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보고서는 차별이 100% 해소됐을 때 기업이 추가 지출해야 하는 비용을 추산했는데, 민주노동당은 이 가운데 ‘100% 해소’ 대목은 생략한 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와 기업이 지출해야 하는 추가비용만 부각시켰다. 결국 보고서 논란은 내용 논란에서 은폐 논란으로 이어지다가, 4월18일 환노위 전체회의를 기점으로 잦아들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 논란은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논란은 노동부가 비정규 법안을 입법하면서 입법 효과에 대해 사전 검증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꼴이었다. 노동부와 여당이 보고서 자체의 의미를 축소하면 할수록 사전 검증 미비의 책임 또한 커졌다. 법안이 시행되면 시장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제대로 예측 한번 해 보지 않은 채 정부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여당도 이에 대한 검증은 소홀히 한 채 ‘반발 적게 처리’ 하는 데만 골몰했다는 뜻이다.

당시 노동부 관계자는 “시장반응을 사전에 예측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해명했다. 일단 법을 시행해 봐야 시장 반응을 분석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대부분의 학자들도 사전 예측이 힘들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노동부는 지난해 7월 발주한 이 연구 전에는 이런 유사한 연구를 실시하지 않았다. 모든 법안 입법 때마다 ‘사전 영향평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정규 법안은 2000년부터 갈등이 지속돼 온 주요 법안이다.

그런데 노동부는 정작 국회에 법안을 제출한 지 거의 1년이 다 돼 가던 지난해 7월에서야 이 연구를 발주했다. ‘연구가 힘들다’와 ‘아무런 연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같은 뜻이 아니다. 노동부의 이런 태도는 지난 1년반 동안의 입법 과정에서의 노사정 간 또는 국회 안에서의 충분한 논의를 가로막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는 일단 밀어붙이고 보자는 전형적인 관료주의에 다름 아니었다.

사전영향평가도 없이

그러나 어쨌든 이 보고서 논란은 입법 흐름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비정규 법안은 이미 결단만 남겨 둔 정치 영역으로 넘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법사위는 예정대로 21일 회의를 앞두고 있었다. 긴장이 고조됐다.

그런데 돌발 변수가 발생했다. 한나라당이 20일 사학법 재개정과 쟁점법안 처리의 연계방침을 밝히고 나섰다. 비정규 법안이 한나라당이 말하는 ‘쟁점법안’에 포함됐는지 여부에 대해 한나라당은 말을 아꼈다. 그러나 대부분 상임위가 법안 처리 직전에 회의가 중단되는 등 파행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21일 오전 법사위 회의장을 여당 의원들이 선점했다. 민주노동당의 점거에 대비해 자신들이 먼저 ‘점거’ 했던 것이다. 비정규 법안을 처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안상수 법사위원장은 이날 법안을 처리하지 않겠다고 민주노동당 의원들에게 약속했다.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법사위가 열리고, 법안이 상정됐다.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 법사위원이 자리를 떴다. 대체토론이 중단됐다.

당시 한나라당은 사학법 재개정에 당력을 집중했다. 여당도 사학법 재개정 막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보수여야는 비정규 법안에 별 관심이 없었다.


사학법 싸움으로

법안 저지에 나선 민주노동당은 한나라당을 믿고 있었다. 한나라당은 사학법 재개정에 여당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본회의도 보이콧하겠다는 방침이었다.

그런데 국회 안팎에서 한나라당이 본회의에 참석해서 다른 법안들은 모두 보이콧하되 비정규 법안 직권상정 통과에 협조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국회 안팎을 흘러 다녔다. 출처는 환노위 여야 의원들이었다.

26일 배일도 의원은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이미 4월11일 원내대표 회담에서 여당 원내대표에게 ‘5월2일 직권상정 처리하면 한나라당이 반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안다”며 “직권상정은 여당이 제안해서 한나라당이 동의했다”고 설명했다.

이목희 의원도 같은날 “법사위에서 안 되면 직권상정 처리할 것”이라며 “법사위원장이 당 방침을 어기고 법안을 처리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으므로, 여당이 본회의 직권상정을 추진하면 한나라당도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직권상정 처리를 장담했다.
직권상정설이 나돌자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단 수석부대표는 “그럴 리 없다”면서도 즉시 한나라당에게 확인 전화를 걸었다. 안경률 한나라당 원내수석부대표는 “사학법 안 되면 본회의도 없다”고 재확인했다.

한나라당과 공조

한나라당을 믿고 있던 민주노동당은 27일 열리는 법사위에 별로 신경도 안 썼다. 비정규 법안은 공방만 하다가 끝날 판이었다. 역시 그랬다. 법사위는 20분만에 끝났다. 여당은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을 싸잡아 비난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과 한나라당의 ‘공조’는 이날까지였다.

여당은 이날부터 민주노동당과의 공조를 모색했다. 여당은 민주노동당에게 '비정규 법안 연기' 카드를 내놨다. 언제 법안을 처리하려들지 모르는 불확실한 한나라당과 손 잡지 말고, 차라리 확실한 '저지' 보증수표인 여당과 손을 잡자는 이야기였다. 이때부터 여당은 민주노동당 비난을 일절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 가운데 28일 여당과 민주노동당 원내지도부가 국회 안에서 조용히 만났다. 여당은 비정규법 처리를 유보할 테니 부동산대책 후속법안 등의 직권상정 처리에 협조해 줄 수 있냐고 제의했다. 민주노동당은 비정규 법안 유보뿐 아니라 재논의까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유제한을 포함해 입법하자는 주장은 하지 않았다. 주민소환법과 국제조세조정법도 직권상정 목록에 얹었다.

여당쪽에서는 “어차피 6월 국회는 원 구성을 못해서 열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며 “그럼 정기국회 때까지 시간도 많으니까 법안에 대해 토론도 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여당이 재논의 가능성까지 열어 보이자 민주노동당은 직권상정에 협조하기로 했다. '공조'의 대상은 한나라당에서 여당으로 바뀌었다.

여당과 공조

여당과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이튿날인 29일 오전 청와대를 찾았다. 대통령 초청 조찬이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동산대책후속법안의 처리가 시급하다며 여당에게 사학법 양보를 사실상 권유했다. 한나라당은 웃었고, 여당은 당황했다.

여당은 비공개 긴급 의총을 열었다. 민주노동당과 손잡고 직권상정을 통해 정면돌파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민주당과 국민중심당이 직권상정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나왔다. 여당은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이었다. 의결정족수인 과반을 간신히 넘었다. 본회의에 몇명이라도 불참하면 ‘망신’을 당할 판이었다.

반면 한나라당은 의결정족수가 안 될 것으로 봤다. 국회의장을 붙잡고, 몇몇 의원들의 입장만 막으면 본회의를 무산시킬 수 있을 것이라 계산했다.

1일 오후였다. 국회의장이 직권상정 목록을 제시했다. 주민소환법과 국제조세법이 빠져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여당에게 물었다. 당황한 여당 지도부는 곧바로 국회의장 공관을 찾아 읍소했다. 의장은 여당 요구를 수용했다.

2일 오전이었다. 직권상정 목록을 살펴보던 민주노동당은 여당이 포함시킨 ‘임대주택법’은 부동산대책 후속법안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법안 내용에도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다급해진 여당은 “그럼 처리하지 말자”고 했다.

여당은 당시 민생법안 처리를 위해 직권상정이 불가피하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목록에 올라가 있는 법안 이름들만 봐서는 ‘민생’ 이미지가 부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은근슬쩍 끼워 넣은 법안이 ‘임대주택법’이라고 민주노동당 쪽에 실토했다. 이 법안은 판교 임대아파트 사업자들의 요구가 일부 반영된 법안으로, 오히려 임차인들의 주거불안을 높이는 개악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초조해진 여당은 당시 민주노동당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기세였다. 140명이 넘는 의원이 발의한 임대주택법도 민주노동당의 요구에 따라 ‘아웃’ 됐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2일 본회의가 열렸다. 김덕규 부의장이 의사봉을 쥐었다. 의결정족수 미달을 유도하려던 한나라당 의원들이 전원 퇴장했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회의장을 빠져 나간 직후 직권상정에 반대하다던 민주당 의원들이 홀연히 입장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황급히 본회의장에 뛰어들었다. 소동이 벌어졌지만, 이미 부동산대책 후속법안들은 모두 의결이 끝났다. 민주노동당이 요구했던 주민소환법과 국제조세법도 소란 중에 통과됐다. 마지막 안건으로 미뤘던 ‘임대주택법’은 상정되지 않았다. 4월 국회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날, 민주노동당은 환호성을 질렀다. ‘캐스팅보트’의 위력을 살려 주민소환제법안과 국제조세조정법안을 직권상정 처리하는 개가를 올렸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 풀뿌리 민주주의와 민생·개혁을 진전시킨 민주노동당의 존재 의미를 확인했다”, 역사를 앞으로 끌고 나갈 수 있는 힘을 9명의 의원에게 부여해준 국민에게 감사한다.” 민주노동당이 밝힌 감격의 변이었다. 17대 국회 들어 민주노동당이 자력으로 특정법안을 입법한 첫 사례였다.

주민소환법 따내다

그럼 비정규 법안은? 물론 처리가 ‘유보’됐다. 비정규 법안은 이제 오는 6월 임시국회 또는 9월 정기국회에서 처리되거나, 원점에서 재논의되거나, 아예 입법 자체가 무산되는 세 가지 갈림길에 서 있다. 다시 원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민주노동당이 캐스팅보트의 위력을 발휘한 5월2일, 비정규 법안은 왜 처리되지 않았을까. 현재 법사위에 계류 중인 비정규 법안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이 요구해 온 ‘사전 사용사유제한’과 ‘불법파견 고용의제’을 담은 법안 말이다.

민주노동당은 '비정규악법' 저지와 ‘권리보장입법’ 쟁취를 외치며 1년반 동안 수차례 회의장을 점거했다. 4월에도 법사위를 점거했다. 민주노동당은 비정규 법안이 어떤 법안보다 가장 중요한 법안이라고 누누이 밝혀왔다.

더구나 4월 국회 막판은 17대 국회 들어 민주노동당의 ‘힘’이 가장 셌을 때였다. 만일, 민주노동당이 여당의 직권상정에 협조하지 않았다면 여당은 청와대가 강조한 부동산법안 처리에 실패했을 터였다. 이렇게 되면, 급속한 ‘레임덕’과 당청 갈등이 야기되고, 여당 지도부의 책임론이 제기되면서 안 그래도 낮은 여당 지지율이 곤두박질 치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여당에게 이는 가장 끔찍한 그림이다.

민주노동당은 물에 빠진 여당의 원내 지도부를 결정적인 순간에 ‘구원’ 했다.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줬다. 그런데도 민주노동당이 손에 쥔 것은 절절하게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살아난 여당이 민주노동당 손에 쥐어준 것은 주민소환법, 국제조세조정법안이었다.

이들 입법의 의미를 부정하거나 격하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그간 가장 중시해 왔던 법안이 비정규 법안이었는지 주민소환법안이었는지 정도만 따져보자는 말이다. 더구나 비정규직법안의 ‘운명’은 여당이 쥐고 있다. 여당 하기 따라서 법안이 전면 수정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은 물에 빠진 여당을 살려주고도 ‘처리 유보와 재논의 가능성’ 외에는 비정규 법안과 관련해 법안 내용에서는 어떤 것도 챙기지 못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여당의 구사일생

민주노동당 관계자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해명한다. “비정규직법안의 수정처리 요구를 여당이 수용할 수 없었다.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판을 깨자는 말과 같았다.”

판을 깨면 아무 것도 건질 수 없게 된다. 4월 국회는 정쟁만 하다 끝났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 판이 깨진다고 이것이 민주노동당의 책임인가? 당이 손해를 보나?

여기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인식은 대강 이렇다. 만약 판이 깨지만 여당이 한나라당과 손을 잡고 5월 임시국회를 열 것이다. 그래서 사학법을 개악하고, 부동산법까지 처리할 것이다. 당연히 비정규 법안도 그대로 본회의를 통과할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여당이 자신들의 ‘집토끼’가 뛰쳐나가든 말든 사학법을 개악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당이 지방선거를 완전히 포기하겠다고 작정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요컨대 이렇다. 민주노동당은 가장 힘이 셀 때도 비정규 법안 제정·개정을 통제할 수 없다. 민주노동당이 가장 힘이 셀 때 얻을 수 있는 과실은 일련의 '더 철저한 민주개혁입법'이다. 이 사실은, 다른 누구보다도 민주노동당이, 특히 의원단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판 깨질까 봐

민주노동당은 지난 2년 동안 원내에서 이처럼 결정적인 상황을 맞이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정치권이 대선과 개헌 국면으로 접어들고 여당과 한나라당의 대치가 심화되면 이런 국면이 더 자주 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럼 이런 국면이 올 때 민주노동당은 권리보장입법을 쟁취해 낼 수 있을까. 과연 민주노동당이 원하는 대로 법안에 대한 재논의를 하면 사전 사용사유제한을 쟁취할 수 있을까. 여당이 “현실 불가능하다”고 누누이 주장해 온 사유제한을 법안에 포함시킬 수 있을까. 여전히 의문이다.

물론 지난 4월 국회에서 권리보장입법을 걸고 여당과 직권상정 교섭을 했더라도, 사유제한이 포함될 가능성은 낮았다. 여당의 수용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간이 흐르고 재논의를 한다면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김한길 원내대표는 직권상정 직후인 지난 3일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정규직법안은 국회 절차상 상임위를 통과해서 법사위에 가 있는 법안이다. 법사위는 자구나 체계만 보는 곳이지 내용을 고칠 수 없고, 상임위에서는 이미 의결해서 처리한 법안이다. 법사위에 가 있는 비정규직 보호 3법에 대해 우리당이 어떤 입장을 갖는다고 해서 변경되기 어렵다는 것은 민주노동당 의원들도 이해하고 있다.”

김 대표는 “다만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더 많은 대화와 토론을 민주노동당과 갖기로 했다”고 말했다. 법안을 손 댈 수는 없지만 약속한 대로 대화와 토론은 하겠다는 뜻이다.

민주노동당의 애초 요구는 법안 철회와 전면 재논의였다. 그런데 김 대표는 법안 철회는 못하고 재논의는 하겠다고 한다. 말장난도 이 정도면 과하다. 결국 여당은 사유제한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앞으로 민주노동당이 한나라당과 손잡아도 마찬가지이다. 한나라당은 사유제한은커녕 비정규 법안 입법 자체에 큰 관심이 없는 정당이다. 한나라당은 저지 공방의 와중을 틈타 ‘파견기간 2년 후 고용의제’라는 자신들의 수정안까지 뒤집고 ‘고용의무’로 후퇴시킨 정당이다.

‘저지’, 즉 네가티브 전술을 펴기 위해서는 한나라당과 손잡으면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지난해 국회에서 야4당 회담 등을 통해 2차례나 효과를 봤다. 그러나 입법이라는 ‘포지티브’ 전술을 위해서는 조속한 입법을 강조하는 여당과 손잡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4월 국회 사례에서 보듯 여당이 사유제한과 불파 고용의제를 모두 수용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권리보장법은 어디로

노동계가 오랜만에 공세적 국면을 맞아 교섭판을 주도했던 지난해 4월 노사정교섭에서도 기껏해야 ‘1+1+고용의제’ 수준도 따내지 못한 채 논의를 끝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인권위 의견표명’ 수준인 ‘사전 사유제한’에 합의하지 않으면, 합의를 하더라도 수용하지 않겠다고 노동계를 압박했다.

그랬던 민주노동당은 지난해 12월초 수세적 국면으로 밀리자 ‘1+1+고용의제’ 수준에도 못 미치는 ‘10가지 사유제한’도 제시해보고, 차별금지법과 분리처리 하자는 제안도 내놨다. 그러나 이는 법안심의 과정에서 제대로 다뤄지지도 못한 채 사장됐다.

특히 차별금지법 분리처리 제안 당시 민주노동당은 의결된 내용만 입법하자는 제안이라고 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차별시정이 가장 급하다고 하니 이 부분이라도 먼저 입법하자고 제안했는데, 이로부터 몇달 뒤인 4월에는 노동연구원 보고서를 근거로 차별시정 효과도 전무하다는 주장을 폈다.

그래서 현재 법사위에 계류 중인 비정규 법안은 차별시정 부분도 절차가 까다로워 사실상 효과가 없고, 사유제한이 없어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할 수 있고, 불법파견으로 판정받아도 과태료만 물고 고용하지 않으면 그만인 법안이 됐다. 한마디로 ‘악법’이다.

그렇다면 ‘악법’은 저지해야 한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은 원내에서, 민주노총은 총파업으로 저지하는 데까지 성공했다고 치자.

그럼 저지 후에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증가하는 현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차별이 계속되는 현실은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 민주노동당 표현대로 권리보장입법을 해야 한다. 언제? 민주노동당이 집권하는 날에? 세상을 바꾸는 총파업으로 보수정치권을 모두 굴복시킨 후에?

도대체 민주노동당의 진심은 무엇인가. 비정규직법안 저지인가 권리보장입법 쟁취인가.

앞에서도 썼듯이 민주노동당이 가장 힘이 셀 때도 비정규 법안의 운명은 민주노동당의 능력 바깥에 있었다. 민주노동당이 따낼 수 있는 한도는 이른바 일련의 '더 철저한 민주개혁입법'이다. 그리고 이 민주개혁입법조차도 실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싸움으로 국회가 파행될 때에만 그 가능성이 열린다. 지난 4월 국회가 보여준 게 그것이다.

그렇다면 비정규권리보장입법은 민주노동당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지난 1년 반, 역사는 반복됐다. 힘이 조금이라도 있어 교섭이 가능할 때에는 교섭을 교란하고, 그나마 있던 힘까지 빠져 교섭은커녕 일방적으로 당하게 될 때에는 앞장서 '분루'를 흘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정규권리보장입법'은 시간순서대로 색깔이 바래졌다.

만일 처음부터 정부의 비정규 법안 입법을 저지하려 들었다면 일은 간단했다. 한나라당과 손잡으면 됐다. 그랬다면, 저지에 투입됐던 그 숱한 총파업의 기회비용은 선순환 투자에 돌려질 수 있었다. 다만, 이 경우 걸리는 게 있다. 이것이 바로 일련의 '더 철저한 민주개혁입법'이다. 선택적 공조가 힘들어지니까.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사회적 역할이 '민주개혁'일까.

거리에서, 고공철탑에서, 온갖 농성장에서 권리보장입법 쟁취하자며 싸우던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현장에서 온갖 차별과 고용불안 속에 힘겹게 살아가는 비정규 노동자들은 회의장에서, 교섭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민주노동당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겠지만, 비정규 노동자들은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알려진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막았다. 그리고 유보시켰고, 그 와중에 주민소환제법을 따냈다…. 민주노동당이 견인하려 했던 것은 비정규 노동자가 아니라 열린우리당이었나. 지금 이 순간, 비정규 노동자의 눈물은 넘치다 못해 말라가고 있다.


<편집자 주> 비정규 법안은 지난 2년간 노동계의 핵심 현안이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이 법안을 계기로 공조하다 이 법안 때문에 헤어졌다. 법안을 낸 정부도 결과적으로는 이 법안에 발목이 잡혀 노사관계 로드맵과 노사정위 개편 등 산적한 과제들을 뒤로 미뤘다.

그러나 비정규 법안은 핵심 현안이었던 게 분명하지만, 그것이 실제 이슈였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남아 있다. 900만명에 육박하는 비정규 노동자의 존재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우리 사회의 실제 이슈로 떠오르지 않고 있다. 철폐를 주장하든 양산을 주장하든 비정규 노동자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서도 지지율이 40%를 넘나드는 정당이 있다는 게 바로 그 반증이다.

이는 비정규 법안을 둘러싼 공방이 사회화가 '덜' 되어도 사회적으로 용납이 되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다(어쩌면 사회화가 '덜' 돼야 사회적으로 용납이 됐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법안 내용은 실로 단순했으나 법안을 둘러싼 사건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노동계 내부와 정치권 내부의 복잡다단한 이해관계와 파워게임이 이 법안을 둘러싸고 이어졌다. 욕심과 주장과 변명이 뒤엉켰다. 한국 노사정의 수준이 이 법안 공방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아무도 진정으로 격분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비정규 법안 공방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매일노동뉴스>는 지난 2년간의 기록을 2주에 걸쳐 10회에 나눠 싣는다. 그간 보도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은 이야기들도 최대한 담을 생각이다. 다 끝난 마당에 이런 기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비정규직법을 둘러싼 이 공방은 이후 옷만 바꿔 입은 채 다시 반복될 것이다. 명분과 몸 사리기에 빠져 결국 게도 구럭도 다 잃는 무책임한 행위가 더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기획시리즈는 그래서 ‘철지난 선데이서울’이 아니라 내일에 대한 경고다. 연재 순서는 다음과 같다. 


연재순서
1. 아무도 원하지 않은 '수건 돌리기'
3. 센터링 한 번에 자살골 두 번

5. 노동계가 사유제한을 포기했다? 
7. ‘전부’ 아니면 ‘전무’ 
9. 비정규 노동자의 눈물이 말라간다
2. 저지냐 쟁취냐, 그것이 문제로다
4. 노사정 교섭 최종안 있었나

6. 한국노총 최종안이 나오기까지
8. 환노위 강행처리의 진짜 이유
10. 못 다 쓴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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