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27일 밤 9시. 환노위 여야 의원들이 황급히 회의장 뒷문을 빠져나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었다. 노회찬 의원을 비롯한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이들 의원들을 쫓아 뛰었다. 기자들도 같이 뛰었다. 그러나 한발 늦었다. 엘리베이터 문은 이미 닫혔다.

기자들이 노회찬 의원을 둘러쌌다. 노 의원은 잠시 머뭇거리다 “도망갈 짓을 왜 하냐"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최연희 하나 살리려고, 오늘 9시 톱뉴스에 최연희 성추행 나오는 것 막으려고 비정규 법안을 강행처리 했냐”고 일갈했다.

그날 언론들도 일제히 비정규 법안과 최연희 성추행을 연결시켜 보도했다. 한나라당이 최연희 '성추행'을 물타기 위해 비정규 법안 강행처리에 나섰다는 ‘설’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목희 여당 의원은 처리 다음날인 28일, 한 라디오 인터뷰에 출연했다. 진행자가 “이 법안이 급하게 한나라당과도 합의됐던 이유 중 하나가 ‘최연희씨 사건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고 질문하자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항상 경쟁해야 하는 관계"라고 전제한 뒤 "우리당 입장에서 왜 그런 생각을 하겠냐"고 반문했다.

"문제는 상임위 위원장이 한나라당 의원이다. 이분이 오늘 아니면 못 해준다고 했다.” 이목희 의원은 이렇게 덧붙였다. 듣기에 따라 한나라당이 최연희 사건과 비정규 법안 처리가 연동됐다고 들을 수도 있는 대목이다.
 


“최연희 살리려고…”

그러나 한나라당이 최연희 성추행 사건의 ‘물타기’를 위해 강행처리를 했다는 ‘설’은 당시 상황을 시간대 순으로 확인해 보면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7일 전체회의 소집과 강행처리는 이미 일주일 전인 20일 여당과 한나라당이 합의한 사항이었다. 당시 여당과 한나라당 환노위 의원들은 20일 공동기자회견에서 “법안을 전체회의에 상정해 2월 임시국회 중에 반드시 처리할 것이며, 민주노동당의 물리적 방해가 계속될 경우 국회법이 정한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국회법이 정한 조치’는 질서유지권 발동을 뜻했다.

민주노동당이 22일 한나라당 등과 야4당 원내대표 회담에서 법안 처리를 연기하기로 합의했지만, 한나라당 환노위 의원들은 이 합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이재오 원내대표를 찾아가 “여당과 처리하기로 일정까지 합의해뒀는데, 민주노동당과 그렇게 합의하면 우리는 뭐가 돼냐”며 항의했다. 그래서 짜낸 묘수가 ‘상임위원장 지휘 속에 27일 상임위 처리 - 원내대표 관장 속에 본회의 처리 연기’였다. 23일 열린 여당-한나라당 정책협의회에서는 ‘회기 내 처리’를 재확인했다.

이경재 위원장은 23일 <매일노동뉴스>와 만나 이같은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전체회의 소집 일시에 대해서는 “미리 밝히면 시끄러워질 것 같아 지금은 밝힐 수 없다”면서도 “2월 회기 안에 반드시 소집해서 법안을 처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27일 오후 2시에 전체회의를 소집한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 시각은 26일 오후였다. 제종길 여당 간사와 배일도 한나라당 간사는 휴일이었던 26일 오후 접촉해, 월요일인 27일 오후2시에 전체회의를 소집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이미 환노위는 24일 국회사무처에 “27일 질서유지권 발동을 할 수도 있으니 풀기자단을 구성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연희 성추행 사건이 한나라당 내부에서 문제로 부상한 시각은 휴일이었던 26일 오후였다. 최 의원이 성추행을 한 날은 24일 밤이었다. 한나라당 최고위원회는 <동아일보>가 27일자 조간신문에 관련 기사를 내보낸다는 사실을 26일 밤에 알았다. 최연희 의원도 보도 사실을 알고 이날 최고위원회에서 모든 당직 사퇴 의사를 밝혔다.

비정규 법안을 처리하자고 여당과 한나라당이 ‘의기투합’을 한 시각과 최연희 성추행 사건이 알려지는 사이에 이같은 시간차가 존재한다. 이 두 사건은 연관성이 약하다는 뜻이다.

이미 20일에 처리 합의

그렇다면 여당과 한나라당은 왜 27일을 ‘D-데이’로 정했을까.

여기에는 별로 복잡한 사연이 들어 있지 않다. 여당과 한나라당이 2월 회기 내 처리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2월 회기 내 처리를 위해 남은 시간들을 역순으로 계산해 보면 27일이나 28일에 상임위를 통과해야 한다. 3월2일까지가 2월 국회 회기였는데, 이왕이면 27일 처리해야 법사위 상정 등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는데 용이했다. 따라서 27일은 가장 유력한 ‘D-데이’였다.

특히 여당이 한나라당과 ‘의기투합’한 이유도 분명하다. 이 의원이 밝힌 대로 이경재 환노위원장이 27일 아니면 안해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간 법안 처리에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던 한나라당이 태도를 바꿔 처리하자고 날짜까지 잡고 나온 마당인데, 한시라도 빨리 처리하자고 주장해 왔던 여당이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목희 의원은 “이번 국회에서 하지 않으면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에서는 더 어렵고, 하반기에 가서 개헌과 대선 국면에 닥치면 이 법을 2년 이상 끌고 갈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이는 이 의원을 비롯한 여당 환노위 의원들의 한결 같은 인식이었다.

그런데 한나라당이 27일 처리에 합의한 이유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이는 법안 처리에 소극적이었던 한나라당이 왜 돌연 태도를 바꿨느냐는 것이다. 이는 이날 처리된 법안의 내용을 보면 어느 정도 유추 해석이 가능하다.

 

 


한나라 태도 바꾼 이유

그럼 한나라당이 왜 이날 처리하자고 합의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다시 27일 환노위 주변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전체회의 소집이 예정됐던 오후 2시께부터 여당과 한나라당 의원들이 최종 법안 조율을 위한 접촉에 들어갔다. 그런데 한나라당이 이날 갑자기 '파견기간 2년 초과 시 고용의무'를 들고 나왔다. 한나라당이 지난해 12월 법안소위에 제출한 수정안은 ‘2년 후 고용의제’였다. 자신들이 냈던 수정안을 번복, 한발 더 사용자 요구 쪽으로 돌아선 내용이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처리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강경한 자세였다. 더구나 현행 파견법은 ‘2년 후 고용의제’다. 이 조항에 대한 한나라당 주장은 명백한 ‘개악’ 요구였다.

여당 의원들은 당황했다. 여당 관계자는 “한나라당이 그렇게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실토했다. 그는 “한나라당이 27일 전에는 이에 대해 단 한마디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여당은 ‘파견기간 2년 초과 시 고용의제’가 이미 한나라당과 합의된 내용이라고 여겨 왔다.

여당 의원들은 환노위 전문위원실에서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목희 의원은 “개악할 수는 없다”며 “차라리 입법하지 말자”고 흥분했다. 다른 의원들도 당황하며 흥분했다.

오후 5시가 넘었지만, 한나라당 의원들은 강경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오후 5시20분께 전문위원실을 나서던 이목희 의원은 “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법안 내용을 합의하지 못했다”며 “합의가 되면 오늘 처리할 것이고, 안 되면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까지도 여당이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환노위는 앞서 오후 4시에 질서유지권을 발동했다. 회의실 출입이 봉쇄됐다. 노동부 관계자들도 환노위의 연락을 받고 오후 5시께 회의장을 찾았다. 민주노동당 의원들과 보좌진들도 허겁지겁 회의실로 달려왔으나 경위들에 의해 회의장 진입이 막혔다. 속수무책이었다.

회의장 밖은 민주노동당 보좌진들과 기자, 경위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됐다. 한나라당 원내지도부의 설득으로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마침내 환노위 사무실 안에 입장했다.

오후 6시가 조금 넘어 여당 의원들이 전문위원실에서 환노위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내부 입장 처리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여당 의원들은 한번 더 한나라당과 맞붙고 나서 정 안 되면 한나라당 요구를 수용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환노위는 저녁7시에 전체회의를 열겠다고 의원들에게 연락했다. 그러나 7시가 넘도록 여당과 한나라당 의원들 사이에 신경전은 계속됐다.

이경재 위원장은 “정부안이 3년인데, 우리가 3년을 2년으로 양보하겠다”면서 “대신 고용의제를 고용의무로 양보해 달라”고 했다. 흥분한 우원식 의원은 “이제 와서 법을 개악할 수 없다”고 소리쳤다. 이목희 의원도 “현행법이 2년에 고용의제인데, 고용의무로 하는 것은 개악”이라며 “천신만고끝에 여기까지 왔는데 개악하려고 그 고생을 한 줄 아냐”고 따졌다.

그러자 이 위원장도 목청을 돋웠다. “불법파견 합법파견 모두 고용의무로 통일하자. 이렇게 안 하면 법 처리 힘들다”고 경고했다. 배일도 의원도 “우리도 2년으로 양보했으니 여당도 양보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단병호 의원은 멀찌감치 앉아 이 논쟁을 묵묵히 지켜봤다.

두 당 의원들이 한차례 언쟁을 벌이다가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오후8시 직전, 마침내 여당 의원들이 두 손을 들었다. 여당 의원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굳은 표정으로 환노위 전체회의장에 들어섰다. 전문위원들이 급히 수정안 작성에 들어갔다. 한나라당 주장이 법안에 전부 반영됐다.

수정안 작성이 끝난 9시30분께 한나라당 의원들도 전체회의장에 들어갔다. 민주노동당 의원들과 몸싸움이 시작됐다. 비정규 법안은 단병호 의원이 경위들에게 결박당한 가운데 10여분만에 상정, 처리됐다.

 

 

 

 

 


‘2년 후 고용의무’ 돌연 등장

27일의 상황을 장황하게 재구성한 것은 파견법의 이 대목이 어떻게 ‘개악’됐는지를 알기 위해서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이날 태도는 ‘고용의무’를 따내기 위해 한나라당이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실제로, 한나라당은 여당과 27일을 ‘D-데이’로 잡는 순간부터 ‘고용의무’를 꺼내들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정도의 제안을 하더라도 처리시기를 누누이 강조해 온 여당이므로, 결국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만약 여당이 수용하지 않으면,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입법에 협조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아쉬울 게 없었다.

하지만 여당은 이미 입법을 포기하기 힘든 지점까지 내몰려 있었다. 당 지지율이 바닥을 맴도는 상황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누누이 처리를 강조해 온 법안을 또 처리하지 못하면 또 ‘무능하다’는 소리를 들을 판이었다. 더구나 한나라당이 “이날 아니면 협조 안 해 주겠다”고 최후통첩까지 날린 상황에서, 파견법의 한 조항을 이유로 입법을 포기하면, 입법은 영영 물 건너 갈 공산이 컸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여당이 져야 했다. 여당은 이미 외통수에 몰려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당을 외통수로 몰아넣은 주체는 민주노동당의 태도까지 계산에 넣은 한나라당의 작품이었다. 결국 여당과 한나라당은 처기 시기와 법안 내용을 ‘거래’한 셈이다.

 

 

 

 


시기와 내용을 ‘거래’

여당 의원들은 이날 자신들이 한나라당과 손잡고 파견법 일부 조항을 ‘개악’한 게 영 찜찜했다. 더구나 이유야 어찌됐건 여당은 한나라당과 함께 노동법을 ‘날치기’를 했고, 일부 조항까지 개악시켰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래서 여당은 자신들의 짐을 덜고자 이튿날 민주노동당을 다시 공격했다.

이목희 의원은 28일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노동당이 법안심의에 참여했다면 우리당은 (민주노동당의 요구인) 불법파견 시 고용의제를 수용하려 했다”고 밝혔다. 민주노동당이 회의실을 점거하고 법안심의에 협조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한나라당과 손을 잡고, 후퇴한 법안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의원은 또 “한나라당의 요구에 의해 당초 안보다 후퇴한 '합법파견 기간 2년 초과 시 고용의무'를 적용키로 했는데 이를 오는 정기국회 때 ‘고용의제’로 바로 잡겠다”고 말했다. 이는 처리가 급해서 한나라당과 손을 잡기는 했지만, 본의가 아니었다는 해명인 셈이다.

그러나 ‘파견 2년 후 고용의무’로 후퇴한 것까지 민주노동당 책임이라고 떠넘기는 것은 여당의 과도한 책임전가이다. 이는 여당이 한나라당과 거래한 것이지, 민주노동당과는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에 책임 전가

그런데 여기서, 한나라당의 태도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27일 한나라당은 왜 자신들의 수정안보다 후퇴한 재수정안을 들고 나왔던 것일까. 더구나 1년6개월이 넘도록 비정규 법안 자체에 별 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한나라당이 왜 하필이면 이날 갑자기 파견법을 ‘개악’ 하지 않으면 입법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배수진까지 쳤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아직까지 입을 열지 않고 있다. 말 못할 사정이 있거나, 그냥 ‘베팅’을 해 봤거나 둘 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후자라면 싱거운 이야기가 되겠지만, ‘말 못할 사정’이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노동계 일각에서는 한나라당이 이날 갑자기 이런 요구를 들고 나온 배경에는 전경련과 경총이 있지 않았나 의심하고 있다.

전경련과 경총의 대국회 로비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노동계도 국회의원을 상대로 ‘로비’를 하는 마당이고,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하고 법안에 반영해 달라는 순수한 의미의 ‘로비’ 자체는 뭐라 할 것이 못 된다. 다만 노동계 일부에서는 전경련이나 경총 등 사용자단체가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대신 의원들에게 다른 대가를 건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물증도 증언도 없는 말 그대로 ‘의혹’이다.

노동계 일부에서 이런 의혹을 품은 것은 27일 상임위 전격 처리 후 사용자단체들이 보인 몇가지 이해하기 힘든 태도들 때문이다. 특히 재벌기업들이 가입해 있는 전경련은 파견법과 이해관계가 밀접하다. 현대와 LG, GM대우 등 굴지의 재벌들은 대부분 불법파견을 하다가 적발됐다. 파견법이 어떻게 개정되는가에 따라 인력 운용 방침을 새로 짜야 할 판이다.

그래서 사용자단체들은 지난 1년6개월 동안 기간제법안보다 파견법이 어떻게 되는가에 더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런 사용자단체들의 의지가 한나라당을 통해 반영된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이 그것이다.

 

 

 

 


전경련이 배후?

먼저 사용자단체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살펴보자.

경총과 상의는 환노위가 법안을 처리한 다음날인 28일 즉각 성명을 냈다. 경총은 “환노위를 통과한 비정규직 관련 법안은 노동계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반영한 것”이라며 “향후 기업 인력운용의 심각한 제한은 물론 일자리 축소를 가져와 실업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것으로 보여 매우 우려된다”고 주장했다.

경총은 이어 “국회 환노위에서 정부안을 노동계 주장과 요구를 반영하는 내용으로 대폭 수정하고 이를 통과시킨 것은, 실업난 완화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국가적 이익보다는 노동계의 표와 인기에 영합하려는 처사라고 밖에 볼 수 없다”며 “따라서 경영계는 환노위 통과 법안의 문제점이 개선될 수 있도록 향후 국회 법사위/본회의에서 경영계 의견의 적극적인 반영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대한상의 성명도 경총과 거의 똑같았다.

상의는 “환노위를 통과한 비정규직 보호관련 법안은 기업 인건비를 상승시키고 신축적인 인력운용을 제약하는 내용으로, 기업 경쟁력 약화는 물론 우리 경제의 일자리를 줄이는 결과를 가져 오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며 “국회 본회의 논의 과정에서는 기업 인력운용의 제약을 없애고 인건비의 급격한 증가를 방지할 수 있는 내용으로 법안을 마련해 줄 것을 거듭 촉구”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줄이면 “환노위 통과 법안은 노동계 요구만 반영된 법안”이므로 “법사위와 본회의 처리 과정에서 경영계 의견을 담아 수정해 달라”는 주장이다.

법안이 노동계 요구만 반영돼 인건비를 상승시키고 일자리를 줄이는 등 진심으로 우려된다면, 법안 처리에 반대한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한편 무작정 ‘반대’ 하는 것이 또다른 논의와 갈등으로 이어지는 것이 우려된다면 ‘성명’에서 밝힌 대로 법사위와 본회의 처리 과정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담아 법안을 처리해 달라고 요구하는 게 정석이다.

그런데 사용자단체들은 이 성명 내용과 반대되는 행보를 보였다.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4월8일 한국노총을 방문했다가, 파견법 2개 조항을 한국노총 최종안대로 수정하겠다고 밝히고 난 뒤였다.

전경련은 4월13일 이경재 환노위원장을 초청해 법안 수정 가능성에 우려를 표시하고, 이 위원장로부터 추가 수정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답변을 얻어냈다. 파견법을 건드리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이자 부탁이었다.

그래도 불안했던지 이수영 경총 회장은 이튿날인 14일, 국회를 찾아 여당과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잇달아 만나 수정 처리 반대 의사를 밝히고 협조를 요청했다. 경총은 이후 환노위 의원들과 각당 지도부들을 따로 만나 수정 처리를 하지 말 것을 설득하기도 했다. 역시 파견법을 손대지 말라는 뜻이었다.

당시 경총 관계자는 “경총과 전경련 모두 솔직히 기간제 법안보다 파견제 법안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고 전했다. 사용자단체들이 환노위를 통과한 파견법에 얼마나 ‘애착’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율배반

노동계 일각에서는 이런 정황을 들어 2월27일 당시 한나라당이 왜 갑자기 파견법 ‘개악’을 들고 나왔는지를 설명하려든 것이다.

한나라당의 이날 행동이 스스로 사용자쪽의 입장에 충실하려고 한 행동이었는지, 아니면 노동계 일각의 의심대로 사용자쪽에 의한 집요한 로비의 결과물이었지는 여전히 베일 속이다. 또 두 가지 모두 사실일 수 도 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한나라당이 27일 내놓은 수정안은 노동자의 고용을 더욱 불안하게 만든 ‘반노동자적’ 요구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당도 이를 잘 알고 있으면서 이같은 거래를 했다는 사실이다.

 

 

 

 


항의끝에 한나라당 지도부의 설득으로 환노위 사무실로 들어간 의원들은 정작 회의장을 점거하는 등 법안 처리를 막으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여당과 한나라당 의원들 사이의 설전을 지켜보거나, 소회의실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일부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환노위원장실에 앉아 있었다.


당시 소회의실에서 전체회의실로 통하는 의원 출입구 앞에는 경위들이 몇명 배치돼 있었다. 이들 경위들이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전체회의장 출입을 통제하기는 했지만, 마음만 먹었다면 이들을 밀어내고 전체회의장 진입이 가능해 보였다. 당시 기자들은 전체회의장과 사무실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취재했다. 출입구 문이 여러차례 열렸다가 닫히곤 했지만,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회의장 진입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이경재 위원장과 한나라당 의원들이 회의장에 들어가려들자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이 위원장을 에워쌌다. 이 위원장의 회의장 진입을 막겠다는 계산 같았다. 그러나 경위들의 도움으로 이 위원장은 간신히 전체회의장 입장에 성공했다. 경위들에게 막혀 있던 단병호 의원은 이 위원장의 진입 직후에 회의장으로 뛰어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날 민주노동당의 태도를 보면, 법안을 실제 저지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술이 잘못됐거나 역부족으로 실패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막는 척만 하다가 끝내려고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편집자 주> 비정규 법안은 지난 2년간 노동계의 핵심 현안이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이 법안을 계기로 공조하다 이 법안 때문에 헤어졌다. 법안을 낸 정부도 결과적으로는 이 법안에 발목이 잡혀 노사관계 로드맵과 노사정위 개편 등 산적한 과제들을 뒤로 미뤘다.

그러나 비정규 법안은 핵심 현안이었던 게 분명하지만, 그것이 실제 이슈였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남아 있다. 900만명에 육박하는 비정규 노동자의 존재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우리 사회의 실제 이슈로 떠오르지 않고 있다. 철폐를 주장하든 양산을 주장하든 비정규 노동자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서도 지지율이 40%를 넘나드는 정당이 있다는 게 바로 그 반증이다.

이는 비정규 법안을 둘러싼 공방이 사회화가 '덜' 되어도 사회적으로 용납이 되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다(어쩌면 사회화가 '덜' 돼야 사회적으로 용납이 됐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법안 내용은 실로 단순했으나 법안을 둘러싼 사건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노동계 내부와 정치권 내부의 복잡다단한 이해관계와 파워게임이 이 법안을 둘러싸고 이어졌다. 욕심과 주장과 변명이 뒤엉켰다. 한국 노사정의 수준이 이 법안 공방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아무도 진정으로 격분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비정규 법안 공방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매일노동뉴스>는 지난 2년간의 기록을 2주에 걸쳐 10회에 나눠 싣는다. 그간 보도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은 이야기들도 최대한 담을 생각이다. 다 끝난 마당에 이런 기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비정규직법을 둘러싼 이 공방은 이후 옷만 바꿔 입은 채 다시 반복될 것이다. 명분과 몸 사리기에 빠져 결국 게도 구럭도 다 잃는 무책임한 행위가 더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기획시리즈는 그래서 ‘철지난 선데이서울’이 아니라 내일에 대한 경고다. 연재 순서는 다음과 같다. 

 

 

 

 

연재순서
1. 아무도 원하지 않은 '수건 돌리기'
3. 센터링 한 번에 자살골 두 번

5. 노동계가 사유제한을 포기했다? 
7. ‘전부’ 아니면 ‘전무’ 
9. 비정규 노동자의 눈물이 말라간다
2. 저지냐 쟁취냐, 그것이 문제로다
4. 노사정 교섭 최종안 있었나

6. 한국노총 최종안이 나오기까지
8. 환노위 강행처리의 진짜 이유
10. 못 다 쓴 이야기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