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5년 4월24일 오후 5시, 국회.

비정규법 노사정 교섭이 시작됐다. 교섭 직전, 이목희 의원은 “오늘 중 잠정 합의가 가능하다”며 “합의되면 노사정 대표자들이 모여 합의 결과를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권오만 한국노총 사무총장은 한 술 더 떴다. 권 총장은 “오늘이 실무위원 마지막 회의일수도 있는데 기념사진이나 찍자”고 너스레를 떨었다. 타결이 임박한 분위기였다.

반면 김영배 경총 부회장은 “노동계가 받기 힘든 안을 주장하고 있다”며 “협상이 깨질 수도 있다”고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교섭은 밤 12시께 끝났다. 노사 실무 대표자들 모두 “이견이 여전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의원은 “일괄타결이 안 됐을 뿐이지 상당부분 의견을 접근시켰다”고 밝혔다. 도대체 어디까지 교섭이 진전된 것일까. 합의가 임박한 것이 맞기는 맞나.


#2 2005년 4월27일 밤, 국회 앞 양대노총 위원장 단식농성 천막.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이 열심히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날리고 있었다. 메시지 수신자는 국회에서 교섭을 하고 있던 권오만 사무총장이었다. 내용은 '서두르지 말고 원칙을 지켜라'였다. 합의에 연연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원칙을 지키라니. 그 안에서 무슨 '담합'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지난해 4월 진행된 비정규법 노사정 교섭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두 장면이다. 4월11일 국가인권위 의견 표명 후부터 노사정 교섭에 가속도가 붙었다. 특히 23일부터 29일까지가 절정기였다. 23일부터 29일 밤까지 일주일 동안 국회 안팎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당시 노동계는 공세적으로 정부와 사용자를 몰아붙였다. 정부와 사용자는 하루라도 빨리 교섭판을 깨고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경총은 민주노총이 총파업 일정을 잡았다는 이유를 들어 “대화 의지가 없다”는 주장도 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교섭판을 먼저 깨는 쪽이 진다. 뛰쳐나가도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들 잘 알고 있었다.

판 깨는 쪽이 진다

교섭장에서는 기간제 ‘사유제한’이 최대 논쟁거리로 부상했다. 노동계는 사전 사유제한 수용을 촉구했다. 사용자 대표들은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버텼다.

김영배 경총 부회장은 4월23일 교섭이 시작되기 무섭게 ‘3년+사유제한’이라는 새로운 ‘안’을 제시했다. 김 부회장은 이를 “사유제한을 도입하되 근속 3년 이하에는 제외한다”고 표현했다. 국가인권위 의견 표명 후부터 코너에 몰리던 사용자쪽에서 정부안인 ‘3년+해고제한’을 변형해 내놓은 고육책이었다.

노동계 대표들은 경총의 제안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단박에 잘랐다. 대부분 기간제 노동자의 근속연수가 3년 이하라는 현실에 비춰 보면 ‘3년+사유제한’은 사실상 사유제한을 하지 말자는 뜻과 같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김영배 부회장이 벌컥 화를 냈다. 그는 교섭장에서 “노동계가 3년까지는 자유롭게 사용하게 하고, 3년 이후에는 사유제한으로 하는 안을 수용했다가 뒤늦게 말을 바꿨다”고 주장했다. 노동계 대표들은 “무슨 소리냐, 그런 안을 수용한 적이 없다”며 “오히려 사용자쪽이 노동계 제안을 수용했다가 노동부의 사주를 받고 뒤집었다”고 반박했다. 누구 말이 진짜인가.


무제한 3년 후 사유제한?

당시 교섭은 교섭장 안에서 이뤄지지 않았다. 교섭 대표들은 교섭장 안팎에서 따로따로 만나가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가령 한국노총 사무총장이 따로 경총 부회장을 만나거나, 이목희 의원을 만나 의견을 조율하는 식이었다. 실제 교섭장 안에서는 농담이 오가거나 상대편을 떠보는 식의 ‘기 싸움’만 팽배했다.

그래서 교섭장 안에 앉아 있어도 각 대표들은 ‘교섭판’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파악하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는 후문이다. 하루는 정부 교섭대표로 참석했던 정병석 노동부 차관이 교섭장을 나서며 “물만 마시다 끝났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날 노동계와 사용자쪽이 엇갈린 주장을 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3년+사유제한’은 김영배 경총 부회장과 권오만 총장의 합작품으로 알려졌다. 권오만 총장과 김영배 부회장이 따로 접촉했다. 접촉 시각은 21일부터 23일까지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20일 5차 교섭에서 노사정은 차기 회의에서 각자의 ‘안’을 갖고 교섭을 하자고 합의했다. 차기 교섭은 24일이었다. 그러나 교섭은 23일로 하루 앞당겨 열렸다. 그 사이에 둘이 만났다는 뜻이다.

어쨌든 이 자리에서 권 총장은 김 부회장에게 현실적인 타협 지점을 내 보이라고 요구했다. 김 부회장은 ‘사용 사유제한’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대꾸했다. 그러자 권 총장은 “‘3년+사유제한’은 어떠냐”고 했다. 김 부회장은 즉답을 피했다. 권 총장은 김 부회장에게 사용자쪽을 설득해 보라고 했다.

당시 권 총장은 이목희 의원에게도 이 ‘안’을 전달했다. 이 의원은 “조직의 결정이냐”고 물었다. 권 총장은 자신이 양대노총을 설득해 보겠다고 했다. 물론 민주노총에게는 다르게 말했다. 권 총장은 민주노총에게 “경총이 사유제한을 수용할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교섭날인 23일 경총이 대뜸 ‘3년+사유제한’을 제안했다. 그러자 노동계가 펄쩍 뛰었다. 경총은 어리둥절했다. 실인즉, 경총 내부에서는 ‘3년+사유제한’으로 합의할 것을 염두에 두고 ‘5년+사유제한’이라는 '블러핑 카드'를 먼저 꺼내는 방안까지 검토했다. 그런데 ‘3년+사유제한’에도 펄쩍 뛰다니. 이거 뭔가 '암수'가 있는 것 아닌가.

정작 ‘3년+사유제한’은 양대노총 위원장에게도 보고되지 않았다. 교섭대표를 돕는 실무진도 그런 제안이 오고 간 줄은 전혀 몰랐다. 다만 권 총장이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가던 길에 한국노총 실무진에게 “3년 후 사유제한은 어떠냐”고 가볍게 물어본 일은 있었다. 당시 실무진은 “말도 안 된다”고 일축했다.

이목희 의원도 권 총장으로부터 ‘3년+사유제한’이라는 ‘안’을 듣고, 양대노총 지도부의 생각인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확인을 했다. 단식농성을 하던 지도부가 펄쩍 뛰었다. “그런 안을 들어본 적도 없다”며. 당시 노동계가 공세를 펴던 상황에서 ‘3년+사유제한’은 ‘일고의 가치’가 없던 안이었다.

양대노총 지도부도 몰랐다

그렇다면 권 총장은 왜 이런 ‘황당한 안’을 들고 양쪽을 설득하려 들었던 것일까. 비리 사건으로 ‘수배 중’인 권 총장은 현재까지도 행적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이에 대한 이야기를 취재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국노총 관계자들에 따르면, 권 총장은 검찰의 수사망이 좁혀오는 것을 느끼고 몹시 초조해 했다는 것이다. 이 초조감이 ‘합의’를 서두르는 배경이 됐다는 설명이다. ‘역사적인 노사정 합의’의 공로를 인정받아 검찰 수사에서 정상참작을 받거나, 아예 정치적 도움을 받아 사건 자체를 축소시킬 수도 있다고 나름대로 생각했을 것이라는 게 한국노총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이미 권 총장은 노사정 교섭이 한창일 때 자신에 대한 검찰의 내사 사실을 알고 있었다. 권 총장에게 5억여원의 리베이트를 준 혐의를 사고 있던 T건설 김 아무개 대표는 4월26일 검찰에 구속됐다. 김 대표는 권 총장에게 리베이트를 줬다고 시인했다. 검찰 출입기자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권 총장이 비정규법 노사정 교섭에 참석 중이라는 점을 감안해 ‘엠바고(보도제한)’가 걸려 있었다. 검찰 내사는 4월20일 이전부터 시작됐다는 뜻이다.

검찰이 권 총장을 내사하고 있다는 정보는 여당에게도 흘러들어갔다. 교섭을 주재하던 이목희 의원도 훗날,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권 총장은 노사정 교섭이 결렬된 5월2일, 한국노총 관계자에게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나를 버리지 마라.” 관계자들은 이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엿새 뒤인 8일 권 총장에게 출두요구서가 날아오고 나서야, 무릎을 쳤다. 권 총장은 그뒤 종적을 감췄다.

한국노총은 이후 한국노총센터 건립 리베이트 사건으로 전 위원장과 간부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의 상처는 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이 연루된 비리사건과 더불어 인구에 회자되는 등 노동계의 큰 아픔으로 남아 있다.


좁혀오는 검찰 수사망

다시 이야기를 노사정 교섭 당시로 되돌려보자. 4월26일 밤 9시쯤이었다. 오후 4시부터 시작된 교섭이 예상외로 빨리 끝났다.

브리핑에 나선 이목희 의원은 흥분된 목소리였다. 이 의원은 “협상 도중에 ‘새로운 안’이 나왔다”며 “지금까지의 논쟁은 ‘사용 사유제한’과 ‘사용 기간제한’에 대한 선택의 문제였다면 새로운 제안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차원을 뛰어넘는 제안”이라고만 설명했다. 이 의원은 이어 “이 제안이 수용되면 ‘사용 사유제한’을 둘러싼 논란은 물론이고 그외 쟁점들도 일거에 해결될 수 있다”며 “각 주체들이 새로운 제안에 대해 내부의견 조율이 필요함을 요청해서, 27일 회의를 열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순간 회의장 주변이 술렁거렸다. “외국에는 없지만 우리나라에 맞는 독특한 시스템이라는 ‘새로운 제안’”은 궁금증을 자아냈다. ‘독특한 시스템’은 기간제한과 사유제한을 모두 포함하고, 기간 만료 후 고용보장까지도 담은 말 그대로 독특한 제도였다.

새 제안은 민주노총이 했다. 민주노총의 첫 양보안이었다. 당시 민주노총이 꺼낸 양보안은 ‘사유제한 없는 6개월+이후 사유제한 적용’안이었다. 이는 ‘사유제한’이냐 ‘기간제한’이냐 하는 논쟁을 일거에 잠재우는 말 그대로 독특한 형식의 제안이었다.

민주노총의 첫 양보

27일 오후, 교섭이 시작됐다. 그런데 또 교섭이 꼬였다. 노사 모두 샅바 싸움이 치열했다. ‘독특한 시스템’은 테이블 위에 제대로 올려지지도 않았다.

그날 경총 등 사용자쪽은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전날 내놨던 제안을 철회했다. 기간제법안 대신 근로기준법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규정하자는 제안이었다. 이것을 철회했던 것. 게다가 경총은 이를 철회한다면서 며칠 전의 ‘3년+사유제한’을 다시 들고 나왔다. 후퇴였다.

그런데 노동계는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역용'했다. 근기법으로 규정하자는 경총 제안을 수용하겠다면서 대신 근기법에 사유제한을 넣자고 되받아친 것이다. 노동부와 경총 실무교섭대표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신경전이 거세졌다. 교섭은 교착됐다.

밤 8시45분이었다. 갑자기 이석행, 권오만 두 총장이 교섭장 바깥으로 나왔다. 즉석 기자회견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권 총장은 “사용자가 정부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며 “마지막 고비에서 노사가 진지하게 대화하고 있는데 정부가 딴지를 걸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사 협상을 통해 경총이 진전된 안을 내놓고 나서는 다음날 번복하는 사태가 이어졌다”며 “이 과정에서 정부가 개입한 것 같은 심증이 든다”고 덧붙였다. 경총이 양보 의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노동부가 말렸다는 것이었다. 교섭장이 뒤집어졌다.

경총은 노동계 기자회견을 빌미로 교섭 중단을 선언하고, 퇴장했다. 교섭 중에 그런 식으로 기자회견을 연다는 것은 교섭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화를 냈다. 개입의 당사자로 지목된 노동부는 묵묵부답이었다. 정병석 차관은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처지'라며 그저 웃기만 했다.

사유제한 도입 논의 본격화

당시 기자회견은 권 총장이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부의 '배후조종설'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노동부가 교섭장 안에서 ‘딴지’를 건 것은 사실이었다. 노동부는 정부안이 흔들릴 때마다 이런저런 근거를 들이대며 ‘안 된다’는 태도를 보였다.

노동계는 노동부를 '희생양'으로 몰아 판을 한번 흔들어야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교섭이 난관에 봉착하면 ‘판’을 흔들어 돌파구를 찾아보는 것도 교섭의 한 기술이다. 이것이 권 총장이 덥석 이 총장의 팔을 낚아채다시피 해서 즉석 기자회견을 연 이유였다.

당시 이석행 총장은 당시 “경총이 제안도 하고 해서 교섭이 잘 될 줄 알았는데, 안 풀려서 답답했다”며 “저녁 먹고 올라와 양치질을 하다보니까 성질이 나서 못 참겠더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나 권오만 총장은 경총의 요구가 있어서 회견을 연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영배 경총 부회장이 권오만 총장에게 “정부의 입김이 세서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면서 "노동부의 손발 좀 묶게 판 한번 흔들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과연, 노동부는 이날 이후로 ‘입’을 닫았다. 이날 회견은 이후 교섭의 주도권을 노동계가 확실히 휘어잡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기자회견의 배경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이날 ‘판’을 흔든 진짜 이유는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이 보낸 휴대전화 ‘문자메시지’였다. 교섭판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합의에 연연하지 말고 원칙을 지키라는 메시지였다.


판이 깨지더라도 원칙을 지켜라

그럼 이용득 위원장은 이날 왜 그런 메시지를 날렸을까. 이는 그날 저녁 국회 앞 천막 단식농성장에서 벌이진 일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노총 교섭 지원 실무진은 이용득 위원장에게 “합의가 임박했다”는 식으로 보고했다. 실무진들은 이 위원장에게 “사유제한 빼고 다른 쟁점들에 대해 거의 다 합의했다”고 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쟁점도 거의 다 합의했다고 보고한 것이다.

이 보고를 옆에서 듣고 있던 이석행 총장이 “다 돼긴 뭐가 다 됐냐”고 끼어들었다. 이 총장은 “우리는 차별금지에서 ‘동등처우’를 요구하고 있지만, 사용자들은 정부안과 같은 ‘차별금지’에다가 ‘합리적 사유에 의한 차별은 차별이 아니다’는 예외조항까지 요구하고 있고, 합리적 사유가 무엇인지 꺼내지도 않은 마당인데, 무슨 합의가 다 됐다는 거냐”고 언성을 높였다. 말싸움이 시작됐다.

그동안 한국노총 실무팀은 타결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보고를 했던 반면, 민주노총 실무팀은 부정적인 뉘앙스로 보고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실관계를 떠나 정세에 대한 해석의 차이, 나아가 교섭에 임하는 자세의 차이였다.

이수호 위원장과 이용득 위원장은 이들의 말싸움을 묵묵히 지켜봤다. 잠시 후 이용득 위원장이 나섰다. 이 위원장은 한국노총 실무진을 큰소리로 다그쳤다. “민주노총이 안 됐다고 하면 안 된거다.” 이용득 위원장은 노사정 합의보다 양대노총 공조에 더 무게를 뒀던 것이다.

합의보다 공조가 더 중요

28일과 29일은 서로에 대한 탐색전으로 시간을 보냈다. 교섭장에서는 노사 각자의 ‘수정안’이 제시됐다. 이는 속마음까지 담은 안이 아니었다. 노동계에 공세에 눌린 사용자쪽이 어느 정도 선에서 ‘항복’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했다.

동시에 이 시기는 민주노총 지도부가 ‘결단’을 요구받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이수호 위원장은 “노사정이 대등한 관계에서 대화하고, 국민적 관심도 높고, 여론도 유리하다”며 “모든 면에서 어느 때보다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이 와중에 그간 노사정 교섭에 침묵하던 민주노동당이 처음으로 공식 논평을 냈다. 홍승하 대변인은 28일 논평에서 “노사정 협상은 인권위 권고안이 가이드라인이 돼야 한다”며 “그간 협상이 난항을 겪었던 것은 협상의 가이드라인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민주노동당의 이날 논평은, 의도가 어디에 있었든, 결과적으로 민주노총 지도부의 결단을 제약하는 것으로 기능했다. 당시는 ‘1+1의무’와 ‘2+무기계약근로 간주’가 논의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말하는 인권위 가이드라인은 ‘사전 사용사유제한’을 뜻했다. 즉, 노사정 합의에 사전 사용사유제한을 담지 않으면, 당이 수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었다. 조직 내부를 설득할지 여부를 궁리하던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 논평이 나온 뒤 사실상 합의할 생각을 접었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2004년 5월 28일 현재 노사정 수정안
구분노동계 안
(근기법 및 파견법 개정)
정부 원안 사용자안
(정부법안 개정)
기간제
(임시직)
사용제한
·객관·합리적 사유없는 기간제 사용 제한
·사용기간 2년 제한
·기간 경과 정규직 간주
(고용의제)
·사유제한 없음(반대)
·3년까지 기간제 사용
·3년 초과 해고제한
(신분상 비정규직, 광범위한 예외 허용)
·업무특성, 노동력 수요, 근로자 개인적 사정 등 합리적 사유가 있는 경우 사용 가능
·3년 이하 기간제 근로자는 사유제한 예외
·3년 초과 근로자 해고 금지
차별폐지·고용형태 관계없이 임금복지 등 동등처우규정
·동일노동동일임금 명문화
·근로자 또는 노조가 차별시정기구에 시정신청
·불합리한 차별금지원칙 규정
·동일노동동일임금 명문화 반대
·차별시정기구 설치
·차별금지 조항 명문화
파견제·불법파견시 직접고용간주
·휴지기 6개월
파견제 ·파견·도급 기준 강화
·사용자 범위 확대
·포지티브리스트 유지
·파견업종전면확대(네가티브 리스트 방식)
·파견기간 2년->3년으로 늘림
·파견 3년에 휴지기 3개월
·직접고용고용의제->고용의무
·차별금지와 기간제 근로 사용자안 수용되고, 휴지기 제도 도입하지 않으면 포지티브시스템 하에 직종 확대조정
특수고용
노동자
·노동자로 인정
노동3권 보장
·노조활동이유 도급계약해지 등을 부당노동행위로 규정
·노사정위 논의로 유보
※유사노동2권 보장(노사정위 공익안)
없음
단시간
노동자
·시간제노동자 정의 현실화
(소정노동시간의 70% 미만)
·기준노동시간 외 잔업수당 지급
강제 초과노동 금지-

민주노동당의 출현

국가인권위는 4월11일 의견 표명을 통해 노동계를 지원사격 했다. 정부와 사용자측의 파상공세에 밀리던 노동계에 회심의 ‘센터링’을 해 준 셈이었다. 노동계는 실로 오랜만에 노사정 관계에서 공세적 자세를 취했다. 노사정 교섭이 관심을 끌고 인권위 의견 파동이 회자되면서, 여론도 노동계 편을 들어줬다.

최근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핵심 요구이지만, 정부여당은 논의 대상도 아니라며 코웃음 치고 있는 ‘사유제한’도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실제 교섭 테이블에서 논의됐던 것이다. 당시 사유제한 도입은 기정사실이었다. 다만 이를 어떤 형식으로 도입하는가가 관건이었을 뿐이었다.

코너에 몰린 정부와 사용자들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판이 깨지기만 바랐다. 교섭에서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빠져나갈 궁리만 했다. 그리고 교섭은 결렬됐다. 여론의 관심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결렬 며칠 뒤 교섭 실무대표였던 권오만 사무총장이 비리혐의로 검거 대상에 올랐다. 한국노총 전 위원장 등 간부들도 줄줄이 구속됐다. 몇달 뒤인 10월에는 강승규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이 비리 혐의로 구속됐다. 조직 내부의 압박에 못 견딘 민주노총 집행부는 결국 만신창이가 돼 총사퇴했다.

노동계는 자본과 보수언론,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았다. 노사정 교섭 때의 기세등등했던 공세적 포지션은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수비할 힘도 없었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손가락질만 받았다. 노동계는 ‘비리집단’이라는 오명만 안은 채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비정규직법안도 노동계와 같이 잊혀졌다.

만사휴의. 수명을 다한 87년 6월이 마지막으로 보낸 회심의 '센터링'. 그것을 무위로 돌린 것은 국가와 자본의 압박수비가 아니라 87년 7~8월의 연이은 '자살골'이었다. 그것은 87년 7~8월의 수명이 다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내부경보'였다.

<상자기사①>

노동계는 경총의 제안을 환영했다. 그래서 노동계는 이날 근기법 23조(계약기간)을 개정하는 역제안을 준비했다. 하나는 근기법에 4가지 사전 사용 사유제한을 담고 2년 후 ‘무기계약근로’로 전환하는 내용이었다. 흔히 ‘사유제한 2년+무기계약근로 간주(고용의제)’가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유제한을 하지 않는 대신 1년 후 반복 갱신 없이 무기계약근로로 전환하는 내용이었다. ‘사유제한 없는 1년+무기계약근로 간주(고용의제)’였다.


이날 이석행 총장은 “경총은 근기법에 사유제한 등을 포함시키고 차별금지 관련법은 별도로 만드는 방법을 제안했다”며 “그래서 우리도 이를 환영하고 새 제안을 했는데 경총이 자신들의 제안을 철회하고 백지화 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사용자쪽은 노동계가 자신들의 제안을 왜곡했다고 흥분했다. 김영배 부회장은 “노동계가 정부법안을 만들면 현행보다 개악되는 것이라 주장하니, 그렇다면 노동계 논리대로 아예 법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었다”며 “우리가 너무 나간 것 같아서 철회한다고 했는데, 노동계가 갑자기 정부 압력 운운하면서 판을 깼다”고 말했다.


이 주장들 가운데 김영배 부회장의 말이 진실과 더 가깝다. 경총은 당시 하나의 협상 전술로서 정부안 폐기와 근기법 적용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노동계가 대뜸 그것을 수용하겠다고 나서니 경총이 당황했던 것이다. 노동부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근기법 개정으로 교섭판 논의가 흘러가고, 더구나 근기법에 비정규직 사용제한을 담겠다는 게 경총의 본뜻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날 일은 교섭 중에 벌어진 하나의 ‘해프닝’이었다.


그런데 만약 이날 노동계가 사용자쪽 요구를 전면 수용해 ‘정부법안 폐기’에 합의했다면, 비정규법 입법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기간제법이라는 특별법 형태로 만드는 것 자체가 개악이므로 입법 자체에 반대한다”는 노동계 일각의 주장이 경총의 요구에 의해 관철(?)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교섭은 돌고 돌았다.
<상자기사②> “교섭 하나는 정말 잘 했다”
이석행 총장이 말하는 권오만 총장
이석행 민주노총 전 사무총장은 권오만 한국노총 전 사무총장에 대해 “교섭 하나는 정말 잘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전 총장은 최근 <매일노동뉴스>를 만나 “권오만 총장을 보면서 민주노총은 참 교섭할 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고 말했다. 그는 “교섭은 최대한 부드럽게 하면서도, 내 속을 상대편에게 보여주지 않아야 한다”며 “권 총장은 당시 교섭장 분위기를 좌우하면서 사용자와 정부 교섭대표들을 쥐고 흔들었다”고 전했다. 가끔 권 총장은 함께 보조를 맞추던 이 총장과 상의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엉뚱한 말을 하기도 했다. 이 총장은 그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 권 총장을 따로 불러내 따지기도 여러번 했다. 그럴 때마다 권 총장은 본뜻을 이야기해 주면서, 교섭 전술을 설명해 주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씩은 권 총장이 교섭장에서 엉뚱한 제안을 하기도 했단다. 그러면 이 총장이 교섭장 바깥으로 불러내 지적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수용했다는 것이다.


‘죽’도 잘 맞았다. 권 총장이 노동부나 사용자를 몰아칠 때면 이 총장이 달랬고, 반대로 이 총장이 이들을 몰아세울 때는 권 총장이 짐짓 제지하면서 교섭장 분위기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 전 총장은 이런 게 노동계급의 단결 정신이라고 했다. “비록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역사나 전통, 조직 구성에서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상호 비판을 할 수도 있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총장은 “노동계급이 갈라져서 싸우면, 좋아할 집단은 자본과 정권밖에 없다”며 “같이 가도 힘이 모자라는데, 싸울 힘이 어딨냐”고 강조했다.


<편집자 주>
비정규 법안은 지난 2년간 노동계의 핵심 현안이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이 법안을 계기로 공조하다 이 법안 때문에 헤어졌다. 법안을 낸 정부도 결과적으로는 이 법안에 발목이 잡혀 노사관계 로드맵과 노사정위 개편 등 산적한 과제들을 뒤로 미뤘다.

그러나 비정규 법안은 핵심 현안이었던 게 분명하지만, 그것이 실제 이슈였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남아 있다. 900만명에 육박하는 비정규 노동자의 존재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우리 사회의 실제 이슈로 떠오르지 않고 있다. 철폐를 주장하든 양산을 주장하든 비정규 노동자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서도 지지율이 40%를 넘나드는 정당이 있다는 게 바로 그 반증이다.

이는 비정규 법안을 둘러싼 공방이 사회화가 '덜' 되어도 사회적으로 용납이 되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다(어쩌면 사회화가 '덜' 돼야 사회적으로 용납이 됐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법안 내용은 실로 단순했으나 법안을 둘러싼 사건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노동계 내부와 정치권 내부의 복잡다단한 이해관계와 파워게임이 이 법안을 둘러싸고 이어졌다. 욕심과 주장과 변명이 뒤엉켰다. 한국 노사정의 수준이 이 법안 공방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아무도 진정으로 격분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비정규 법안 공방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매일노동뉴스>는 지난 2년간의 기록을 2주에 걸쳐 10회에 나눠 싣는다. 그간 보도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은 이야기들도 최대한 담을 생각이다. 다 끝난 마당에 이런 기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비정규직법을 둘러싼 이 공방은 이후 옷만 바꿔 입은 채 다시 반복될 것이다. 명분과 몸 사리기에 빠져 결국 게도 구럭도 다 잃는 무책임한 행위가 더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기획시리즈는 그래서 ‘철지난 선데이서울’이 아니라 내일에 대한 경고다. 연재 순서는 다음과 같다. 


연재순서
1. 아무도 원하지 않은 '수건 돌리기'
3. 센터링 한 번에 자살골 두 번
5. 노동계가 사유제한을 포기했다? 
7. ‘전부’ 아니면 ‘전무’ 
9. 비정규 노동자의 눈물이 말라간다
2. 저지냐 쟁취냐, 그것이 문제로다
4. 노사정 교섭 최종안 있었나
6. 한국노총 최종안이 나오기까지
8. 환노위 강행처리의 진짜 이유
10. 못 다 쓴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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