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 법안은 지난 2년간 노동계의 핵심 현안이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이 법안을 계기로 공조하다 이 법안 때문에 헤어졌다. 법안을 낸 정부도 결과적으로는 이 법안에 발목이 잡혀 노사관계 로드맵과 노사정위 개편 등 산적한 과제들을 뒤로 미뤘다.

그러나 비정규 법안은 핵심 현안이었던 게 분명하지만, 그것이 실제 이슈였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남아 있다. 900만명에 육박하는 비정규 노동자의 존재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우리 사회의 실제 이슈로 떠오르지 않고 있다. 철폐를 주장하든 양산을 주장하든 비정규 노동자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서도 지지율이 40%를 넘나드는 정당이 있다는 게 바로 그 반증이다.

이는 비정규 법안을 둘러싼 공방이 사회화가 '덜' 되어도 사회적으로 용납이 되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다(어쩌면 사회화가 '덜' 돼야 사회적으로 용납이 됐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법안 내용은 실로 단순했으나 법안을 둘러싼 사건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노동계 내부와 정치권 내부의 복잡다단한 이해관계와 파워게임이 이 법안을 둘러싸고 이어졌다. 욕심과 주장과 변명이 뒤엉켰다. 한국 노사정의 수준이 이 법안 공방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아무도 진정으로 격분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비정규 법안 공방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매일노동뉴스>는 지난 2년간의 기록을 2주에 걸쳐 10회에 나눠 싣는다. 그간 보도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은 이야기들도 최대한 담을 생각이다. 다 끝난 마당에 이런 기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비정규직법을 둘러싼 이 공방은 이후 옷만 바꿔 입은 채 다시 반복될 것이다. 명분과 몸 사리기에 빠져 결국 게도 구럭도 다 잃는 무책임한 행위가 더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기획시리즈는 그래서 ‘철지난 선데이서울’이 아니라 내일에 대한 경고다. 연재 순서는 다음과 같다. <편집자 주>
 

연재순서
1. 아무도 원하지 않은 '수건 돌리기'

3. 센터링 한 번에 자살골 두 번
5. 노동계가 사유제한을 포기했다? 
7. ‘전부’ 아니면 ‘전무’ 
9. 비정규 노동자의 눈물이 말라간다
2. 저지냐 쟁취냐, 그것이 문제로다
4. 노사정 교섭 최종안 있었나
6. 한국노총 최종안이 나오기까지
8. 환노위 강행처리의 진짜 이유
10. 못 다 쓴 이야기들



지난해 6월28일 오후6시. 기자들이 주섬주섬 퇴근을 준비하던 때였다. 이경재 환경노동위원장과 이목희 법안소위원장 등 환노위 소속 여당 의원들이 국회 기자회견장에 들어섰다. 의원들의 표정은 무거웠다. 먼저 마이크를 잡은 이 위원장은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환노위 회의장 점거는 입법권을 무시하고 국회 절차를 방해한 행위라고 비난한 뒤, 입법 무산과 처리 유보를 밝혔다.

여당 의원들도 민주노동당을 비난하며 더이상 비정규 법안 입법에 앞장서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목희 의원은 “앞으로 여당은 비정규직과 관련된 어떤 이니셔티브도 취하지 않겠다”며 “입법 무산에 따른 역사적 대중적 책임은 민주노동당에 있다”고 주장했다. 여당 의원들은 입법 무산에 대한 책임을 진다며 법안소위원직을 사퇴했다.

2004년 9월부터 9개월 동안 갈등을 거듭하던 비정규 법안 입법은 완전히 물 건너가는 분위기였다. 이날 여당 의원들은 입법 무산의 책임을 민주노동당에게 돌렸다. 민주노동당의 회의장 점거 때문에 법안 처리를 못했다는 것이었다. 민주노동당 때문에 입법이 지연돼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이 가중된다는 논리였다.

민주노동당과 노동계는 정부안을 ‘개악안’이라고 규정했다. 정부안은 비정규 노동자를 양산하고, 비정규 고용형태를 합법화 하는 법안이므로 저지하고, ‘권리보장법안’을 입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당과 민주노동당의 이런 대결은 그 이후에도 계속됐다. 최근 4월 국회까지도 똑같은 주장과 반박이 되풀이됐다.

그렇다면 과연 비정규 법안을 둘러싼 각 주체들의 주장들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또 어디까지가 ‘허풍’ 또는 거짓일까. 특히 기회만 되면 ‘조속 입법’을 강조했던 여당. 그런 여당은 실제 입법 가능성을 어느 정도로 보고 있었을까. 혹시 여당은 비정규 법안 입법이라는 난감한 과제가 선거에도, 지지율 향상에도 별 도움이 안 되는 ‘계륵(먹기에는 성가시고 버리자니 아까운 닭갈비)’ 같은 존재로 여겼던 것은 아닐까.


먹기는 성가시고 버리자니 아깝고

2004년 9월 노동부, 아니 정확히 하면 정부의 기간제법 제정안과 파견법 개정안, 노동위원회법 개정안 등 이른바 비정규 법안의 윤곽이 <매일노동뉴스>에 의해 공개됐다. 노동계는 여당 의장실을 점거하고, 양대노총이 총파업을 경고하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노동계와 정부여당 사이에 파열음이 거세졌다.

노동계의 강한 반발에 화들짝 놀란 여당은 법안 처리를 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민만 거듭했다. 노동계가 반대한다고 정부 부처간 조율까지 거쳐서 제출된 법안을 폐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당 지지율이 엉망인 상황에서 상대적 우군 그룹인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들의 반발을 뚫고 전격 처리하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더구나 당시는 국가보안법을 놓고 한나라당과 기 싸움을 하던 때였다. 유권자가 만들어준 과반수 의석을 어떤 식으로든 써야 할 상황이었다. 탄핵의 '약효'는 시간이 흐를수록 떨어졌고, 지지층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른바 '4대 개혁입법'은 이같은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과반수 의석을 쓰지 않고도 '반한나라당 전선'을 결집할 묘수였다.

비정규직법, 정말 부담되네

'4대 개혁입법'이 언론지면을 장식하는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비정규 법안은 관심권에서 점점 멀어졌다. 이 당시 민주노총에서도, 민주노동당에서도 여당이 비정규 법안을 처리할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예상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단병호 의원이 처리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시했지만 그것은 '경고'의 차원이었다.

김대환 장관이 이끄는 노동부는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게다가 10월 중순께 여당은 노동계의 반발을 고려해 파견법의 '네거티브' 조항을 현행과 같이 '포지티브'로 바꾸겠다고 밝혔다. 물론, 노동부를 감안해 허용업종을 조정하는 방안도 함께 제시했다. 2004년 10월28일 당정협의에서 정부와 여당은 연내 처리에 합의했다. 하지만 이날 당정협의에서 적극적으로 발언한 여당 의원들은 없었다. 발언은 노동부의 몫이었다.

여당의 시큰둥한 태도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노동부가 ‘표나 깎는’ 법안을 들고 와서 처리해 달라고 하는 것도 불만이었을 테지만, 한나라당과 한창 대치중인 당시 상황에서 그 법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내키지 않았다. 당시 국가보안법 폐지에 열심이었던 우원식 열린우리당 의원은 당정협의 일주일 전에 <매일노동뉴스>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범개혁 전선이 교란될 수도 있는 비정규 법안을 굳이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킬 필요가 있냐?”


내용이야 어찌되든 처리만 하자?

국가보안법이 제 자리에 돌아가고, 2005년 새해가 밝았다. 정부여당은 2월23일 오전 고위당정협의를 열고 법안의 2월 처리에 최선을 다하자고 다시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이때에도 정부와 여당은 법안 내용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법안 내용에 대한 이견은 그대로인데, 처리 시기만 합의하는 ‘이상한 합의’를 했던 것이다. 더구나 여당 의원들 사이에서도 법안 내용에 대한 인식차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법안소위는 예정돼 있었다. 열어야 했다. 그래서 소위가 열렸다.

기다렸다는 듯 민주노동당은 ‘비상령’을 내리고 회의장을 점거했다. 양대노총 위원장 등도 국회를 찾아 법안 처리 유보를 요구했다. 한국노총은 모든 노정대화 창구를 폐쇄하겠다고 했고, 민주노총은 총파업에 나서겠다고 경고했다. 여당 의원들은 법안 처리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말싸움이 난무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당시 민주노총은 이른바 '사회적 교섭'을 놓고 내부 진통을 거듭하고 있던 중이었다. '사회적 교섭'은 청와대도, 여당도, 기다리던 바였다. 사회적 교섭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사회적 교섭을 추진하는 세력을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상식이자 상도의였다.

그럼에도 여당은 처리하겠다는 '공포(空砲)'를 쐈다. 그리고 노동계는 이 '공포(??)'에 맞서 저지투쟁을 했다. 민주노동당도 회의장을 점거했다. 여당 관계자는 당시 상황에 대해 "부담스러워 처리할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처리할 것처럼 분위기를 잡은 것에 대해 그는 “노동부가 너무 강하게 나와서 정부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서 그랬다”고 말했다. 과연 노동부 체면을 살려주기 위한 것만이었을까.

수정안도 없고 자신감도 없고

그런데 당시 회의장을 점거한 민주노동당은 이런 상황을 간파하고 있었을까. 민주노동당은 당시 여당이 법안을 처리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심상정 의원은 “전경련과 경총이 전날 밤 한나라당 의원들을 만나 법안처리를 요구했다”며 “이를 안 여당이 자신감을 얻어 강행처리를 시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심 의원 말대로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이 경총 관계자들과 만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당시 경총이 한나라당에게 법안 처리를 주문했는지, 아니면 처리 반대 의견을 전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당시 한나라당 정책위 관계자는 “경총이 요구 때문에 태도를 바꿨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며 “한나라당은 애당초 2월 국회 처리가 무리라고 봤고, 기조는 여전했다”고 말했다. 심의를 거부할 마땅할 명분이 없으니, 심의는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할 생각이 없다는 말이었다.

한나라당에게 비정규법은 자신들의 '나와바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96년말 노동법 개악의 '추억'이 있다. 자기들이 보기에도 아직 무르익지 않은 비정규 법안 공방에 들러리를 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의 점거 이유는 4가지 정도로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 정보 부족으로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상황 파악은 제대로 했지만 여당의 입법 드라이브에 제동을 걸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점거를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민주노총 지도부 흔들기의 일환이었다는 분석이다. 사회적 교섭을 추진하던 민주노총을 코너로 몰겠다는 집행부 반대파의 의지가 반영됐다는 것이다.

결국 여당은 법안 처리가 무산됐는데도 내심 웃었다.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 처리할 생각을 애당초 접었으면서도 여당은 한나라당으로부터 ‘4월 처리’ 약속을 받아내는 개과를 올렸다. 이는 노동부를 달래는 기제이다.

한편으로 비정규 법안을 매개로 민주노총을 사회적 대화의 장으로 유도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이목희 의원은 처리 무산을 선언하고 회의장을 나서면서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매일노동뉴스는 민주노동당의 점거가 성공해서 법안 처리가 무산됐다고 보도할 거죠?”


그래도 여당은 웃었다

4월 국회가 열렸다. 노사정 교섭판이 열렸다. 여전히 여당은 적극적인 입법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대신 여당은 노사정 교섭에 공을 들였다. 여당 주도의 처리 계획을 접고 노사정 합의에 매달렸다. 당시 제종길 환노위 간사는 법안 처리 방안에 대해 “노사정 대화가 잘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한나라당도 여전히 소극적이었다. 노사정이 합의하면 추인하고, 결렬되면 여당이 알아서 하라는 태도였다.

복잡한 것은 오히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내부였다. 사회적 교섭 방침을 반대하는 민주노총 내 세력들은 노사정 교섭에도 비판적이었다. 단병호 의원은 노사정 교섭과 거리를 뒀다. 대신 단 의원은 ‘원칙론’을 폈다. 그는 4월9일 인권위 의견 발표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인권위 의견 표명을 환영한다”며 “미흡하지만 인권위 의견 수준 정도로 입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섭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다.

이 가이드라인은 교섭에 참여하고 있는 민주노총 지도부에게 큰 부담이 됐다. 지도부는 민주노동당이 합의도 하지 말고, 교섭도 하지 말라는 압력이라고 느꼈다. 합의를 하는 순간, 지도부는 반대파들로부터 “원칙을 저버리고 투쟁도 방기한 채 자본과 정권에게 무릎을 꿇었다”라는 비난을 살 게 분명했다. 지난 98년 정리해고제 도입에 합의한 배석범 민주노총 위원장 직대의 전철을 밟을 수는 없었다.

최근 민주노총 이석행 전 사무총장은 “당시 반대파들은 비정규 법안이나 사회적 교섭보다 집행부를 끌어내리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며 “단병호 심상정 의원과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단 의원쪽 주장은 다르다. ‘거리두기’는 여당이 노사정 교섭판을 짰기 때문에 개입할 틈이 없었고, 대중조직이 하는 일인데 의원이 간섭하는 것도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지도부와 단병호 의원 등 민주노동당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2회분 : 저지냐 쟁취냐, 그것이 문제로다>에서 자세히 다룬다. 어쨌든 4월 노사정 교섭은 의견이 상당히 좁혀졌음에도 결렬됐다.

단 의원, 노사정 교섭과 거리두기

두 달 뒤 6월 임시국회가 열렸지만 논의는 더 지지부진했다. 마치 12월 국회와 2월 국회 때의 상황이 뒤섞인 것 같았다. 그 사이 4월 교섭 실무대표였던 권오만 한국노총 사무총장이 연루된 비리 사건이 터졌다. 노동계는 벌집 쑤신 듯했다. 비리 사건이 노사정 교섭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3회분 : 센터링 1번에 자살골 2번>에서 자세히 다룬다.

하여간 이목희 의원은 “합의된 부분은 합의된 대로, 안 된 부분은 국회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기세를 올렸다. 여전히 핵심 쟁점에서 당정간 이견이 남아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기습적으로 회의장을 점거했다.

그러나 처리 여부의 열쇠는 정작 다른 데 있었다. 처음부터 노사정 교섭 결과를 사실상 부정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한나라당이 윤광웅 국방장관 해임안을 제출한 것이다. 이미 여당은 의석 과반수를 상실한 상황. 민주노동당이 여당과 한나라당 사이에서 캐스팅보트를 쥐었다. 윤 장관 해임안이 처리되면 노무현 정권이 급속히 레임덕에 빠질 것이라는 전망도 흘러나왔다. 범여권은 다급했다. 윤 장관을 구하려면 민주노동당의 도움이 필요했다. 마치 2월 국회 때와 유사했다. 비정규 법안 처리의 조건이 하나도 갖춰지지 않은 것이다.

이런 가운데 회기가 거의 끝나가는 6월28일. 여당 환노위원들은 정세균 원내대표를 만나 법안 처리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정 원내대표는 “민주노동당이 저렇게 반대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냐”고 대꾸했고, 이목희 의원은 이 자리에서 벌컥 화를 냈다.

결국 민주노동당의 힘이 필요했던 여당 지도부는 비정규 법안 처리를 유보하는 대신, 윤 장관을 구하는 선택을 했다. 여당 의원들은 즉시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을 비난하며 법안소위원직에서 사퇴했다. 이날 사퇴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당 지도부를 향한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도 해석됐다.


여당과 민주노동당의 윤 장관 구하기

한동안 비정규직법은 표류했다. 여당 환노위 의원들은 ‘비정규직법안’의 ‘비’자도 꺼내지 않았다. 관련 인터뷰도 모두 거절했다. 양대노총은 김대환 노동부장관 퇴진을 내걸고 투쟁 강도를 높여갔다. 노정관계는 극도로 악화됐다. 이 가운데 9월 정기국회가 개회했다. 여당 지도부는 비정규직법 처리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조속 입법을 강조하던 노동부는 안달이 났다.

그런 가운데 10월초 강승규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의 비리 사건이 터졌다. 10월20일 민주노총 지도부가 사퇴했다. 민주노총은 물론 노동계 전체가 술렁거렸다.

이 와중에 이용득 위원장은 이목희 의원 등을 만나 정부를 뺀 ‘노사 대화’ 주선을 요구했다. 여당은 한국노총의 요구를 수용, 교섭판을 다시 벌였다. 여당은 노사 합의만 되면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었다. 잘못돼고 노사의 책임이었다. 노동계는 이경재 환노위원장도 만났다. 법안 처리에 비협조적인 한나라당쪽과 이 위원장의 보증을 받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여당의 주선과 환노위의 주시 속에 교섭판이 열렸다.

그러나 교섭은 뒷걸음질쳤다. 경총은 4월 교섭 결과까지 부정했다. 민주노총도 원칙만 강조했다. 교섭은 결렬됐다.

결국 한국노총이 총대를 멨다. 한국노총은 11월30일 ‘최종안’을 발표하고 정치권에서 수용할 것을 촉구했다. 여당은 한국노총의 의견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했다. 한나라당은 노동계 안이라고 격하했다. 민주노총은 한국노총을 강하게 비난하며 공조 파기를 선언했다. 민주노동당도 한국노총을 거칠게 비판했다. 한국노총의 최종안 발표를 전후한 이야기는 <6회분 : 한국노총 최종안이 나오기까지>에서 다룬다.

여당, 한국노총 최종안 발표 직후 입법 드라이브 걸어

11월30일 정부와 여당은 당정협의를 열고, 연내 처리를 합의했다. 그런데 이때도 정부와 여당은 법안에 대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정부는 계속 기간제와 파견제 기한을 3년으로 하자고 했다. 반면 여당은 2년을 고집했다.

소위가 열렸다. 그런데 연내 처리를 하겠다는 장담과 달리 소위는 정작 ‘느림보 심사’를 했다. 여당의 이런 행보는 사학법 개정 공조를 위해 민주노동당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배일도 의원은 “8일 소위에서 처리할 수 있었는데도 (사학법 개정을 염두에 둔) 여당이 법안 처리를 미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원식 소위원장은 “합의처리를 위해서였을 뿐, 12월9일 본회의 처리가 목표였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정작 8일 본회의에서 여당과 민주노동당 등 소수야당들의 공조 속에 사학법 개정안이 처리됐다. 한나라당은 9일부터 모든 의사일정을 거부했다. 소위 심사도 중단됐다.

이목희 의원은 “한나라당으로부터 사회권을 넘겨받아서라도 비정규 법안을 처리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민주노동당은 잇달아 소위에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법안은 또 해를 넘겼다.

국가보안법에 이어 사학법에 또 밀리다

해가 바뀌고 2월 국회가 열렸다. 상황이 급반전됐다. 김한길 원내대표가 2월14일 노동 당정협의에 이례적으로 참석했다. 김 대표는 이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회기 안에 법안을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당 원내대표가 처음으로 법안 처리를 지시한 것이다. ‘무슨 일’은 질서유지권을 동원한 강행처리도 불사하라는 뜻이었다.

여당 주도의 본격적인 입법 드라이브가 걸렸다. 비정규법안 처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민주노동당이 회의장을 점거하자 환노위는 20일 법안심사 종료를 선언했다. 여당과 한나라당 의원들은 2월 회기 내 처리키로 합의, 발표했다. 민주노동당은 다급해졌다.

그런데 한나라당에서 돌연 야4당 회담을 제의했다. 한나라당은 사학법 재개정에 대해 여당을 압박하기 위해 소수 야3당의 조력이 필요했다.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상대편이 가장 원하는 것을 쥐고 내놓지 않아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당시 여당은 비정규직 입법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고 있었다. 한나라당은 이 상황을 활용할 계획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민주노동당은 비정규직법 처리 연기 협조를 요청했다. 한나라당은 수용했다. 민주노동당은 환호성을 질렀다.


여당 원내대표의 법안처리 첫 지시

그러나 환노위 소속 한나라당 의원들의 입장은 곤란해졌다. 이미 여당 의원들과 회기 처리를 합의해 두고 있는데, 원내대표가 제동을 건 셈이다. 이경재 환노위원장 등은 합의 다음날인 23일 이재오 대표를 찾아가 항의했다. 이 대표는 의원들의 의견을 수용, 조율안을 냈다. 조율 결과는 이렇다. “환노위는 예정대로 법안을 처리한다. 이후 처리 여부는 원내대표의 책임 아래 결정한다.”

원내대표의 묵인 속에 이 위원장은 27일 질서유지권을 동원해, 전체회의를 열었다. ‘허’가 찔린 민주노동당은 ‘합의 위반’이라며 한나라당에게 항의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법안의 쟁점조항이었던 파견기간 초과 후 고용보장 부분은 여당이 한나라당 요구를 수용, ‘고용의무’로 후퇴시켰다. 민주노동당은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여당은 ‘후퇴’의 책임을 민주노동당에게 돌렸다. 지난해 12월에 민주노동당이 소위에 참석만 했어도, 2월에 소위를 막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후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논리였다.

민주노동당은 곧바로 법사위를 점거했다. 한나라당 안상수 법사위원장은 민주노동당의 점거농성을 이유로 상임위를 열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비정규직법을 처리하고 싶으면 사학법 재개정을 약속하라는 대여권 압박 카드를 하나 더 얻은 셈이었다. 이 부분은 <8회분 : 환노위 강행처리 진짜 이유>에서 다룬다.

민주노동당이 법사위를 점거하자 여당은 한나라당에게 법사위 진행을 요구했다. 여당은 사실 비정규법안 처리보다 정국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나라당의 기세를 꺾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비정규법안도 하나 처리 못하는 무능한 여당 소리를 들을 판이었다. 여당은 한나라당이 법사위를 열 의지가 없다고 판단되자 비정규법안의 직권상정을 추진했다.

한나라당은 그런 여당을 더 세게 조였다. 본회의 마지막날인 3월2일 야4당이 다시 만났다. 야4당은 직권상정 반대에 합의했다. 여당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날 밤 여당과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만났다. 두 원내대표는 비정규직법을 4월 국회 초반에 우선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한나라당도 비정규법안 처리 여부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도 ‘우선처리’에 선뜻 합의해 준 이유가 있다. 여당의 조바심을 키우고, 코를 꿰어 놓겠다는 것이었다.

‘우선처리’를 합의해 두면 여당은 4월초부터 한나라당에게 합의 이행을 채근할 것이 당연했다. 그럼 한나라당은 느긋한 표정으로 “그렇게 처리하고 싶으면 사학법 재개정에 도장을 찍으라”며 압박할 수 있다. 비정규법안만 붙잡고 있으면 민주노동당이 도와준다고 본 것이다. 결국 한나라당에게 비정규법안은 여당을 압박하는 카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당 압박용 카드에 불과

역시 4월 국회는 한나라당의 예상대로 돌아갔다. 여당은 비정규직법 처리를 강조하며 법사위 처리를 미루는 한나라당을 압박했다. 한나라당은 꿈쩍도 안 했다.

회기 말이 점차 다가오자 여당은 다급해졌다. 지방선거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무 것도 안 될 것 같았다. 더구나 청와대는 29일 양당 원내대표를 초청해 부동산법안 처리를 위해 사학법 양보를 권고하기도 했다.

여당은 민주노동당에게 긴급 ‘SOS’를 쳤다. 물론 ‘자존심’도 접고 비정규직법 처리 연기라는 선물 보따리를 안겼다. 재논의 가능성까지 흘렸다. 민주노동당은 한술 더 떠 주민소환법과 국제조세법의 직권상정 처리도 요구했다. 다급해진 여당은 이를 모두 수용했다.

김한길 원내대표는 지난 10일 “민주노동당이 직권상정을 도와준다고는 했지만 민주당과 국민중심당, 무소속 누구도 도와주겠다고 하지 않아 승률이 희박한 싸움이었다”며 “실패할 경우 무능한 여당 소리를 듣고 상처도 크다며 회기를 연장해 시간을 벌자고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한나라당에 막혀 아무것도 처리하지 못해도 ‘무능’ 소리를 듣지만, 처리하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할 경우에는 더 무능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여당 ‘승’ 한나라당 ‘패’로 귀결됐다. 5월2일 여당과 민주노동당은 6개 법안의 직권상정 처리에 공조했다. 비정규법안을 붙잡은 채 민주노동당을 믿었던 한나라당이 이번에는 ‘허’가 찔렸다.

비정규법 공방은 이렇게 진행됐다. 그 각각의 대목 가운데, 어떤 경우에도 비정규법안이 상수가 됐던 적은 없었다. 비정규법은 종속변수이자 '카드'였을 뿐이었다. 여당은 법안 처리에 확실한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비정규법안은 관심의 1순위가 아니었다. 한나라당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정부안조차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정당이 정부안에서 앞으로 나가려는 시도를 내켜 할 리가 없는 것이다.

‘권리보장법안’을 쟁취할 현실적 힘이 없던 민주노동당은 여당과 한나라당 사이를 오가며 '수비'에 급급했다. 그 수비와 지금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설명하는 사람이 없다. 요컨대 민주노동당은 '처리를 막았다'는 주장은 할 수 있게 됐지만, 그들이 처음 이야기한 것은 비정규 노동자의 보호였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수건 돌리기'. 비정규법안은 이렇게 정처없이 표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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