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중대재해가 발생해도 지금까지는 대표이사는 ‘몰랐다’며 처벌을 받지 않고 빠져나갔죠. 하지만 대표이사가 안전 및 보건계획을 수립하고 이사회에 승인까지 받았는데 또 ‘몰랐다’는 변명이 통할 수 있을까요?”(변호사 A씨)

“이사회 안건으로 안전 및 보건계획이 등장한 적은 그동안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이사회 안건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한 파워죠.”(플랜트기업 이사 B씨)

“안전 및 보건계획을 수립하고 이사회에 보고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죠. 그런데 안전 및 보건계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죠? 아무런 규정이 없어요. 아무 실효성 없는 제도입니다. 한마디로 ‘페이퍼 워크’(서류작업)예요. 안전·보건 관련 부서만 바쁘겠죠.”(안전공학과 교수 C씨)

“올해 회사의 안전 및 보건 계획이 뭔지 몰라요. 현장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전혀 없어요. 대표이사가 어떤 계획을 수립했는지, 또 어떤 내용으로 이사회에서 논의됐는지 통과시킨 이사들은 알겠죠. 노조는 전혀 알 길이 없어요.”(노동조합 안전보건담당자 D씨)

올해 1월1일부터 시행된 ‘대표이사 안전보건계획 수립 제도’를 둘러싼 평가다. 제도 시행 초기라는 점을 감안해도 평가는 선명하게 갈린다. 내년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시행과 맞물려 안전보건을 우선하는 경영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지만 실효성이 없어 그저 서류작업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가 상존한다. 사실 모든 제도는 양날의 검이다. 제도를 어떻게 집행하느냐에 따라 효과가 드러나기도 하고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한다. 올해 처음 시행하는 ‘대표이사 안전보건계획 수립 제도’는 지금 그 갈림길에 서 있다.

500명 이상 기업·상위 1천대 건설회사
대표이사 ‘안전보건계획 수립’ 의무화

18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8년 산업안전보건법 전부 개정에 따라 14조(이사회 보고 및 승인 등)가 올해 1월 시행됐다. 대상은 상시노동자 500명 이상 사용 기업과 시공능력 상위 1천위 안에 속하는 건설회사다.

주요 내용은 대표이사가 안전보건에 관한 계획을 수립해 이사회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에는 계획에 안전보건에 관한 △경영방침 △조직 구성과 인원 및 역할 △예산 및 시설 현황 △전년도 활동실적 및 다음 연도 활동계획을 포함하도록 못 박고 있다.

대표이사가 이런 계획을 이사회 보고하지 않거나 승인을 받지 않으면 1천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대표이사에는 안전보건계획을 성실하게 이행하고 평가해 이듬해 계획에 반영하도록 하고 있다.

이런 제도가 도입된 이유는 뭘까. 노동부는 대표이사 안전보건계획 수립 가이드라인에서 “회사 전체의 안전과 보건에 관한 최종적인 의무와 책임은 대표이사가 부담하기 때문”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실제로 산업안전보건법 175개 조항 가운데 ‘대표이사’가 명시된 조항은 이 14조가 유일하다. 일하는 사람들의 ‘안전보건’ 영역에서 대표이사의 의무와 책임범위를 유일하게 정한 조항인 것이다.

대표 의무·책임 규정한 유일한 조항

그동안 중대재해가 발생해도 대표이사 책임을 따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노동부가 발주해 한국비교형사법학회에서 수행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사건 판결 분석 연구’에 따르면 2013~2017년 사이 5년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법원 선고를 받은 사건 피고인은 자연인 1천678명, 법인 1천136곳이다. 이 중 징역형을 받은 경우(자연인)는 64명, 금고형은 22명으로 86명에 불과하다. 전체 위반사범의 3%를 넘지 못했다.

법원 선고 당시 피고인의 직책(중복응답)을 보면 안전보건 관리 책임자가 35.7%(1천756명)로 가장 많다. 원청 사업주는 34.6%(1천702명)로 두 번째였다. 이어 하청 사업주 12.7%(624명), 원청 현장소장 10.6%(522명), 하청 현장소장 5.8%(286명) 순이다.

그런데 징역형만 떼어 놓고 보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징역형을 선고 받는 비율(분석 가능한 판결문 기준)을 보면 하청 사업주가 276명 중 11명으로 4%를 차지해 직책별 징역형 선고 비율에서는 1위로 올라선다. 이어 하청 사업주(8명)와 원청 현장소장이 1.4%로 공동 2위, 원청 사업주가 징역형 처분을 받는 비율은 0.9%(1천579명 중 14명)로 꼴찌였다.

안전보건 소홀한 대표이사 처벌 근거 될까

지금 무엇보다 ‘대표이사’에 주목하는 이유는 내년 시행하는 중대재해처벌법과도 연동되기 때문이다. 중대재해처벌법 4조(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등의 안전 및 보건 확보의무)의 주어는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 등”이다. 이들이 △재해예방에 필요한 인력 및 예산 등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과 이행 △재해발생시 재발방지 수립 및 이행에 관한 조치 △안전보건 관계 법령에 따른 의무이행에 필요한 관리상의 조치를 소홀히 해 1명 이상이 숨지는 중대재해가 발생했다면 1년 이상 징역형이나 10억원의 벌금형을 받게 된다.

법 제정 당시부터 사업주 및 경영책임자가 누구냐를 놓고 논쟁이 컸다. 지금도 재계는 이 범위를 좁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2조에서 경영책임자 정의는 “사업을 대표하고 사업을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 또는 이에 준해 안전보건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다. 한국경총 등 6개 경제단체는 공동으로 낸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제정에 대한 의견서’에서 처벌을 받는 경영책임자 범위에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안전보건책임자를 선임한 경우 안전보건관리책임자를 넣자”고 주장하고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권한과 책임을 가진 안전보건관리책임자를 선임하면 ‘사업을 대표하고 사업을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은 그 범위 내에서 책임을 면한다는 조항을 시행령에 넣을 것을 요구했다. 모법을 아예 뒤엎는 시행령을 만들자는 말이나 다름없다.

손익찬 변호사(법률사무소 일과사람)는 “산업안전보건법 14조에서 대표이사에게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의 책임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중대재해처벌법 4조에서 대표이사를 상대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 발생한 중대재해 책임을 묻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구의역 김군 사고가 있기 1년 전 똑같은 강남역 스크린도어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했는데도 서울교통공사는 2인1조 작업을 위한 충분한 예산과 인력을 도급비에 반영하지 않았다. 재해예방을 위한 인력과 예산 등의 계획을 원청 대표이사가 제대로 세우지 않아 사망사고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손 변호사는 “산재사고 당시 개별적 의무위반뿐 아니라 의무위반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원인을 제공한 원청 대표이사 처벌이 가능해진다”고 밝혔다.

재해예방에 실효성 있는 제도로 자리 잡으려면?

반면 실효성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안전공학)는 “안전보건 계획에 안전보건과 관련한 설비와 인력·예산·조직을 포함하라고 돼 있지만 법만 보면 무엇이 안전보건 관련 설비인지, 인력·예산인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며 “기업이 어차피 교체해야 할 노후시설을 바꾸면서 안전보건 설비라고 해도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엉성한 법체계로 처벌만 강화해 오히려 법 규범성만 해치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기업들에서는 조금씩 변화가 감지된다. 송창섭 한솔이엠이㈜ 이사는 “시공능력 1천대 건설회사 중에는 직원수가 10여명에 불과한 소규모 회사도 있다”며 “대표이사가 인력과 예산, 활동계획과 활동실적을 수립해서 이사회 승인을 받도록 한 만큼 안전보건을 고려한 경영방침을 수립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중소 건설회사에서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채워지는 안전보건 인력이 올해 들어 정규직으로 전환되고 역할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던 이들의 목소리도 커지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물론 시행 초기인 만큼 다듬어야 할 부분도 많다. 법에서 대표이사에게 안전보건 계획을 수립하고 이사회에 승인을 받도록 했지만 이를 공시하거나 이행 여부를 감시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 기업이 지키지 않아도 그만이다. 이에 대해 노동부는 “사업장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해 감독을 실시할 때 전체 회사 차원에서 안전보건 계획을 수립해 적용하고 있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중대재해 발생 이후 근로감독 과정에서나 이행 여부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김광일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본부장은 “최근 기업들이 대표이사 책임을 면하기 위해 이사회에서 권한을 위임하는 방식으로 이 조항을 피해 가는 방법을 연구 중이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며 “대표이사의 안전보건계획 수립 의무를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현정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국장은 “사업장에서 노조가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안건으로 대표이사가 수립한 안전보건계획을 논의한다면 노동자의 참여가 가능할 것”이라며 “관련한 실태조사를 해 제도개선 방안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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