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이 석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31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근로감독관이 중대재해 수사권을 확보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히면서 ‘중대재해 수사 실무 콘텐츠’ 개발에 착수했다. 검찰도 형사 실무적 대응 방안을 준비하기 위해 ‘중대재해처벌법 대응TF’를 구성해 중대재해 처리 기준을 구체화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하지만 중대재해 처벌을 위한 칼을 벼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중대재해를 예방하는 일이다.

내년 1월27일 시행하는 중대재해처벌법은 1명 이상 사망하는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안전보건확보 의무를 소홀히 한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를 1년 이상 징역, 10억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중대재해가 발생했더라도 안전보건확보 의무를 제대로 했다면 처벌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노동부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가이드라인으로 ‘안전보건관리체계 가이드북’을 내놓은 이유이기도 하다.

“도대체 안전보건관리체계가 뭐야?”
모호한 정의, 애매한 규정

안전보건관리체계는 중대재해처벌법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다. 중대산업재해와 중대시민재해의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등의 안전 및 보건 확보 의무’를 각각 규정한 4조와 9조에서 “재해 예방에 필요한 인력 및 예산(점검) 등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과 이행에 관한 조치”가 나온다. 시행령은 안전보건관리체계의 구체적 사항을 다시 8개 항목으로 규정하고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에는 안전보건관리체계 용어가 없다. 안전관리자나 보건관리자 등을 규정한 ‘안전보건관리체제’만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미 일선 현장에서는 안전보건경영 인증 제도 등을 활용하면서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이라는 용어를 일상적으로 흔하게 사용해 왔다.

노동부는 가이드북에서 “안전보건관리체계의 구축·이행이란 일하는 사람의 안전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기업 스스로 위험요인을 파악해 제거·대체 및 통제방안을 마련·이행하며, 이를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일련의 활동”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안전보건관리체계의 7가지 핵심 요소로 △경영자 리더십 △노동자 참여 △위험요인 파악 △위험요인 제거·대체 및 통제 △비상조치 계획 수립 △도급용역 위탁시 안전보건 확보 △평가 및 개선을 제시하고 있다.

노동부가 꼽은 7가지 핵심요소는 안전보건경영시스템에 대한 국제기준인 ILO-OSH 2001과 ISO45001과 관련이 있다. 2001년 국제노동기구(ILO)가 제정한 ‘산업안전보건경영시스템 구축에 관한 지침’인 ILO-OSH 2001은 △안전보건경영방침과 노동자 참여 보장 △안전보건목표와 유해위험에 대한 대책 △평가와 개선조치 같은 사업장 안전보건 가이드라인을 담고 있다. 국제표준화기구(ISO)가 인증하는 국제표준인 ISO45001 역시 최고경영자를 비롯한 전 직원 및 이해관계자가 참여해 사업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사전에 예방· 관리하는 시스템적 관리 방법이다.

중대재해처벌법상 안전보건관리체계는 이미 국제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안전보건관리시스템을 법 안으로 들여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부가 안전보건관리체계 개념을 명확하게 세우지 못하면서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돼도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이 형식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안전공학)는 “그동안 정부 차원에서 기업의 안전보건관리체계를 활성화하는 데 별다른 노력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산업안전보건법령이 전부개정되면서 안전보건관리시스템 구축의 법적 근거가 되는 조항을 삭제하기도 했다”고 비판했다. 정 교수는 “그래서 일선에서는 안전보건관리시스템 구축이 곧 ‘인증’이라는 잘못된 등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안전보건관리시스템이 관공서 제출용·마케팅용으로 전락하고 실질적인 안전보건관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장식물이 됐다”고 꼬집었다.

위험작업 2인1조 인력확충보다
안전부서 관리자만 늘어나

실제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기업들이 앞다퉈 ISO45001 인증에 나서는 모양새다. 정태교 금속노련 법규안전국장은 “노동자를 위한 안전시설을 확충하고 부족한 인력을 충원해야 중대재해를 막을 수 있는데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기업들이 안전보건 예산을 ISO45001 인증을 받거나 컨설팅을 받는 데 집중적으로 쓰고 있다”며 “심지어 삼성 사업장이 있는 천안에서는 안전관리자를 싹쓸이하는 바람에 다른 기업들은 관련 자격증을 가진 사람을 못 구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라고 전했다.

조성애 공공운수노조 노동안전보건국장도 “공공기관은 2019년 고 김용균 노동자 사고를 계기로 2년 먼저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에 나섰지만, 기획재정부가 인력과 예산을 틀어쥐고 있는 상황에서 위험한 작업 현장의 2인1조 인력보다는 안전부서 관리자를 늘리는 방식으로 대응해 왔다”고 지적했다.

“산업안전보건위원회에서
실질적인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하자”

노동계는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이 서류작업이 아니라 실질적인 재해 예방으로 구실하려면 노동자의 참여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은 4조(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및 이행조치)에서 사업장에서 종사자 의견을 듣는 절차를 마련하고 개선방안 이행 여부를 반기 1회 이상 점검한 후 필요한 조치를 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상 산업안전보건위원회로 갈음할 수 있다.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은 “사업장의 산업안전보건 의제를 심의·의결할 수 있는 산업안전보건위원회에서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에 대한 실질적인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중대재해처벌법이 경영책임자에게 제3자 도급·용역·위탁시에도 안전보건확보 의무를 부여하고 있는 만큼 산업안전보건위원회 문을 원·하청 노사 모두에 개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올해 벌써 4명의 노동자가 산재 사망사고로 세상을 떠난 현대중공업에서도 이런 요구가 나오고 있다.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는 올해 단체협약 별도 요구안으로 원·하청 안전보건협의체 운영을 요구했다. 김형균 현대중공업지부 정책기획실장은 “내년 하반기부터 수주 물량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데 지금도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미숙련 하청노동자가 투입될 가능성이 크다”며 “원·하청 노사가 다 같이 참여해 안전문제를 논의해야 중대재해를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안전진단 이후, 산재사고가 다발하는 다단계 물량팀을 양성화하는 방안으로 현대중공업과 직접계약을 체결하는 ‘단기 계약업체’를 늘려 왔다. 하지만 작업기간이 1~3개월로 매우 짧은 탓에 안전보건교육이나 안전점검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렵다. 올해 발생한 4건의 산재 사망사고 가운데 2건이 단기계약업체에서 발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현미향 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 사무국장은 “단기계약업체는 그저 계약방식만 달라졌을 뿐 노동자의 안전문제가 제대로 해결되는 구조가 아니다”며 “원·하청 노사가 참여하는 산업안전보건위원회나 안전보건협의체에서 이 문제를 깊이 있게 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사업장’ 노동자위원과 사용자위원 동수로 구성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청노동자의 참여가 보장되기 어려운 구조다. 다만 건설업의 경우 특례를 통해 원·하청 노사가 협의체를 구성하도록 하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의 실효성을 확보하려면 산업안전보건법의 노동자 참여제도를 시급히 손봐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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