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1. 20여년간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업체에서 그라인더로 배의 표면을 다듬는 사상공으로 일한 한영수(58·가명)씨는 지난해 10월 작업 도중 복숭아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한씨를 지지하던 안전벨트 고리가 빠지면서 약 7미터 높이에서 미끄러져 왼발이 철 구조물에 부딪혔다. 사고 다음날 병원에서 복숭아뼈 골절과 인대파열 등의 진단을 받았다. 한씨는 공상처리(사업주가 재해자에게 일정 금액을 보상해 주는 것)를 해 주겠다는 회사의 말에 일을 쉬면서 통원치료를 받았다. 그러다 같은해 12월 중순부터 퇴사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한씨의 계약기간이 같은달 말 종료된다는 게 이유였다.

지난해 3월 해당 업체에 입사한 한씨는 처음엔 5월 말까지 두 달여 기간을 정한 근로계약서를 작성했다. 이후 계약 갱신을 했던 터라 그해 12월 말에 계약기간이 종료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한씨가 지난 2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하자 해당 업체는 김씨의 출입증을 말소시켰다. 한씨는 2월 산재승인을 받고 지난달 울산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접수했다.

#2.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업체에서 화기감시 업무를 하던 이지우(57·가명)씨는 지난 1월 고철을 정리하다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손목이 꺾이면서 심한 통증을 느꼈다. 업체 관리자에게 사고 경위와 통증 사실을 알렸지만 관리자는 별다른 대처 없이 작업을 계속하라고 요구했다. 이씨는 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으며 출근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난 2월에 관리자에게서 “계약기간이 2월 말 종료된다”는 이유로 퇴사하라는 말을 듣게 됐다. 이씨는 산재신청을 한 뒤 “승인이 날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지만 지난달 출입증이 말소됐다.

이씨는 2019년 2월 입사 당시 3개월짜리 단기계약 형태로 일을 했다. 몇 차례 계약 갱신 이후 지난해 3월 1년 단위 근로계약서를 썼다. 2년 넘게 해당 업체에서 일한 이씨는 “이렇게 갑자기 일을 쉬게 될 줄 몰랐다”며 “(계약기간이 남은) 동료들은 계속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달 초 산재 승인 통보를 받은 이씨는 울산지노위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접수한 상태다.

산재사고 다발 사업장인 조선소에서 위험에 내몰린 하청노동자가 산재사고를 당했을 때 계약만료를 이유로 사실상 해고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조선업계 불황으로 단기계약직 고용형태가 성행하면서 ‘다치거나 아픈’ 노동자들의 계약갱신을 거절하는 형태로 일터에서 내쫓는 악용 사례가 빈번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선업계 불황으로 단기계약직 성행

21일 <매일노동뉴스> 취재 결과 업무상질병을 겪거나 산재사고를 당한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이 계약만료로 일터에서 쫓겨나는 사례가 잇따라 드러나고 있다. 한씨와 이씨를 포함해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사내하청지회에 접수된 사례는 5건이다. 사상작업이나 화기감시, 도장작업 등을 하는 노동자로 업무와 소속 업체가 모두 달랐다. 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에 접수된 2건을 포함하면 밝혀진 해고 사례만 7건이다.

사고성 재해뿐만 아니라 근골격계질환 같은 업무상질병도 마찬가지였다. 현대중공업 또 다른 사내하청업체에 소속된 정진숙(가명)씨의 경우 업무를 하다 무릎통증이 심하게 느껴져 병원 진단을 받고 휴직을 신청했는데 기간을 연장하자 회사에서 퇴사 압박을 받았다. 1년인 줄로만 알았던 계약기간은 8개월이었다. 사측의 거듭된 압박과 “계약만료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회유로 결국 정씨는 지난해 12월 말 사직서를 썼다. 지난달 산재승인을 받은 정씨는 최근 수술을 받고 자택에서 요양 중이다.

산재신청을 한 하청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쫓겨나게 된 데에는 단기계약 고용형태가 전보다 늘어난 것과 무관치 않다. 조선업계 불황이 지속되며 최근 2~3년간 물량팀이 아닌 본공(하청업체 직접고용)도 계약기간이 3개월, 6개월 단위로 짧아지고 있다는 게 노동계 분석이다. 그간 노동자들은 통상 1년 단위로 계약을 맺고 관행적으로 계약이 갱신됐다. 1년 단위 계약을 쪼개 단기계약으로 바꾸고는 이를 악용해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평가되는 산재 피해노동자들을 하청업체가 갱신거절 방식으로 우회 해고하는 것이다.

지회 관계자는 “기간제 본공들의 경우 예를 들어 3월31일까지 계약기간이었다고 하면 종료기간 이전에 계약연장 계약서를 쓰는 게 아니라 일을 하고 있다가 4~5월쯤 계약서 서명을 하는 식으로 계약 갱신이 이뤄지는 탓에 노동자들도 계약기간에 크게 민감해하지 않았다”며 “2~3년 전부터 단기계약 형태가 확산하는 추세인데 재해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청업체가 악용해서 갱신에 브레이크를 걸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원청 기성금 삭감→하청업체 비용절감→하청노동자 고통가중

이런 추세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조선업계에서 연이어 수주 소식이 들리지만 현장 작업물량이 늘어나는 데까지는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이는 탓이다. 업계 불황으로 원청의 기성단가 삭감이 이어지며 하청업체는 비용절감에 매달리게 되고 노동자들을 부품처럼 갈아 끼우고 ‘노동력을 상실한’ 재해자는 버리는 방식으로 그 고통이 하청노동자에게 전가되고 있는 양상이다.

현미향 울산산추련 사무국장은 “사업장 특성상 중대재해가 많고 일하다 다치면 중상을 입어 3개월 이상 요양이 필요한 사례가 많은데 단기계약직의 경우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다”며 “비용절감을 위해 공상이나 산재신청을 막론하고 일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에게 더 가혹해지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한씨와 이씨는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접수했지만 부당해고로 인정받기까지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칠 것으로 예상된다. 근로기준법 23조2항은 근로자가 업무상 부상 또는 질병의 요양을 위해 휴업한 기간과 그 후 30일 동안은 해고를 금지하고 있다. 문제는 한씨와 이씨 같은 계약직 노동자의 경우 계약만료를 해고로 볼 수 있는지다. 판례상 원칙적으로 계약기간 만료는 해고에 해당하지 않는다. 다만 계약갱신 기대권이 인정될 때 합리적 이유 없이 재계약을 하지 않으면 이를 해고나 다름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이선이 공인노무사(법무법인 여는)는 “계약갱신 기대권이 인정되는지 여부가 핵심 쟁점이 될 것”이라며 “단순히 계약직의 주관적 기대를 근거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재계약 관행이 있었다든지, 계약서나 취업규칙 등에 계약기간이 만료되더라도 당사자 간 합의로 계약을 연장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든지 등의 객관적으로 계약이 갱신될 것으로 보인다면 부당해고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법의 취지를 고려해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다혜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는 “근로기준법 해당 조항 자체가 산재노동자를 두텁게 보호하기 위한 취지인데 형식적으로 계약만료로만 판단하면 기간제 노동자는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된다”며 “개별적 사실관계에 따라 다르겠지만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상 불이익 처우 금지 조항도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산재보험법 111조의2에 따르면 사업주는 근로자가 보험급여를 신청한 것을 이유로 근로자를 해고하거나 그 밖에 근로자에게 불이익한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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